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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간구 (시 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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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간구 (시 51:1~12) 


사람들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몇 번 만난다고 합니다. 그 일생일대의 기회, 정말 놓쳐서는 그 기회는 대체로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 옵니다. 그 기회는 멋진 일을 통할 수도 있고 정반대로 전혀 아닌 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일을 통해서도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런 기회를 처리하는 모습은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멋진 기회를 아주 멋지게 만들어 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멋진 기회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절망적인 일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절망적인 수순을 거쳐 가는 사람도 있지만 도리어 망할 일을 가지고 인생일대의 역전극을 연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소원해야할 것이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간에 아주 멋지게 만드는 연금술사 같은 능력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인생 살다 절망적인 일을 당할 때 혹은 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을 때 절대로 실망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포기도 절망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멋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입니다. 다윗, 우리는 좋은 이름으로 기억하지만 부하의 아내를 죄를 짓도록 하는 아주 악한 다윗이었습니다. 게다가 진짜 다윗의 죄는 그 충성스러운 부하를 그 일로 말미암아 악질적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윗의 죄가 더 악한 것은 그 죄를 저지르기 바로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내가 너를 위대하게 하겠다, 틀림없이 챙기겠다, 자자손손 챙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죄를 지었을 때 어쩔 수 없이 징계는 하겠지만 절대로 망하도록 만들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대단한 복입니다. 사실 마지막 한 부분만 보아도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는 이처럼 복을 받은 다윗 같은 사람이 이런 죄를 지었으니 다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겠다고 생각되는데 하나님의 사람은 다릅니다. 정말로 내 속에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여기에서 표가 납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주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멋진 계기로 만들어 내고, 기어코 하나님으로부터 인생 최고의 복을 만들어내는 계기를 만들어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생 살다보면 고의적으로 혹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좋은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은 더 좋게 만들고 좋지 않은 일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좋게 만드는 그런 은혜, 그런 지혜를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일로 다윗은 어떻게 해서 그런 기회를 만들 수 있었던가를 시편 51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다윗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어떤 일이든 간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어쩌다가 하나님을 벗어났는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져서 그런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난 뒤 세상적으로 좋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를 짓고 난 뒤 세상적인 복이 정말로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또 찾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더 가까이 가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길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 제게 어떻게 이런 기쁜 일을 주셨습니까?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좋아서 기쁜 일을 주시고 또 주십니다. 얼마나 순진한지 모릅니다. 한번 경험해보십시오. 마치 아이가 칭찬받으려고 하는 것처럼 주시고 또 주십니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으므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애통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슬픔을 당하면 슬픔 때문에 죽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 가기만 하면 애통을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행복으로 바꾸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그런 일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쩌다 선한 일을 합니다. 참 좋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난 뒤 하나님을 반드시 찾으십시오. ‘하나님,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선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 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좋아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또 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또 기억할만한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선한 일을 하고 난 뒤에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대신 하나님께 이야기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복을 주십시오.’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 생색이지 하나님 앞에는 생색이 아닙니다. 할머니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애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좋아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또 여러분들에게 선한 일을 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마음도 주시고, 환경, 여건도 만들어 주십니다. 인생 살면서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지만 몇 번으로 다 끝이 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화자찬하고 자기를 높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가면 선한 일을 자꾸 하게 되고 인생이 편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선한 일을 할 정도가 되면 하나님 앞에 이것 달라 저것 달라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가 부족한데 다른 사람을 도와줄 정도가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해주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인생 살다 잘못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다윗처럼 죽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이때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베드로 당시 사람들은 두 번이나 세 번 용서하면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용기를 내서 “주님,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두 번, 세 번만 용서하면 되는데 어떻게 일곱 번이나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느냐? 그런데 일곱 번을 일흔 번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있는 것은 우리 주님 당신은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지지난주에 죄를 지었고 지난주에 또 죄를 지었는데 이번 주에 와서 또 회개하니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십니다. 용서해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었던 걸로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을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때문이라도 찾아오는 그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자꾸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어쩌다가 이런 죄를 지었는가? 나와 같이 정직하게 살고 정말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던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얼른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기억해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할 지니라(히11:6)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 그냥 기도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후회입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이고 그저 내 소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도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가고, 십자가 앞에 가야합니다. 지금도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계신 주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야합니다. 그냥 기도만 하면 고백이고 독백일 수 있고, 잡념일 수 있습니다.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할지니라 라는 이 말씀 속에는 단서가 하나도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한 사람만 찾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찾는 모든 자들에게, 혹시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찾아오기만 하면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십시오. 어떤 일이든 간에 나가고 또 나가고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은 그렇게 무서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상 최고의 복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다윗이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합니다. 다윗은 그런 죄를 지었다고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여 말씀하지만 그 내용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얼마나 성군입니까? 얼마나 거룩하며 얼마나 하나님과 많이 교통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그냥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죄에게 넘어가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썼을 것입니다. 죄는 알을 품은 두꺼비처럼 그 앞에서 얼마나 유혹하는지 모릅니다.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으면 두꺼비 속에 있던 알이 부화하여 뱀의 살을 뜯어 먹고 삽니다. 뱀은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먹지 않으려고 하다고 기어이 두꺼비를 잡아먹어 버립니다. 다윗도 정말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모든 애를 다 썼습니다. 그러다 그런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한 번 죄를 짓고 난 뒤 다윗은 아마도 틀림없이 한 번 어쩌다가 정말로 실수하여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 되었던 것입니다. 넘어가도 또 넘어갔습니다. 결심도 했겠지만 잠깐 뿐이었습니다. 불가능했습니다. 

정지용의 ‘호수’라는 시입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밖에’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자꾸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유치환은 그의 시 ‘그리움’에서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눈을 감은들, 파도에게 소리친들 해결이 납니까? 시보다 노래로 더 유명한 이은상의 ‘그 집 앞’입니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그냥 쓰윽 지나가고 싶은데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되오면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서 잇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악한 마음을 버리고 싶어 합니다. 질투하고 미워하고 죄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죄지으려고 작정하고 죄짓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싶은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싶은 남편이 어디 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 좋은 것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결단하고 다짐했건만 잘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정말로 잘 키우고 싶지만 잘 안됩니다. 강제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다윗은 인간은 애를 쓰면 쓸수록 죄를 더 짓게 되고 도리어 더 악한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더 악한 일을 한 자신을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 5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잘 알아야합니다. 다윗이 책임 전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어머니가 이런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자체가 이렇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해서 많은 애를 썼습니다. 역사 이래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악한 마음을 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고 인간의 힘으로서는 그렇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어떻게 나같은 사람이 이런 죄를 지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깜짝 놀라게 되었고, 그것은 인간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이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세 가지 마음을 간구하였습니다. 자기가 결단해서 가질 수 없는 이 마음을 간구하였습니다. 

첫 번째가 정한 마음입니다. 영어성경에는 pure, clean 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깨끗하고 순전한 마음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파랄 거예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이 노래를 독창을 하든 합창을 하든 항상 좋았습니다. 그때는 그 까닭을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18장에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파란마음, 하얀 마음이 천국에 합당한 그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 마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내 앞에서, 남편 앞에서 이 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힘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것이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에게 정한 마음을 주십시오.’ 자녀에게도 어떻게 하든 간에 하나님을 찾아가도록 만드십시오. 여러분들이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정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조금 덜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조금 덜 풍족해도 괜찮습니다. 이 마음이 있으면 여러분의 아들, 딸, 며느리, 사위 다 행복합니다. 

두 번째 다윗은 정직한 영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정직함이란 굳건함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합니다. 우리 인생은 흔들립니다. 가야겠다고 결심했건만 어느 틈에 내 발걸음이 그 집 앞을 지나게 되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셔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46편에서 하나님은 우리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46:1-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움직이지 아니하고 요동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그런 마음을 주십니다. 연애할 때 좋았던 그 아내를 평생 사랑하는 남편이 되고, 어렸을 때 엄마, 아빠를 찾는 그 마음으로 부모님께 효도하십시오. 효도하는 마음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변수 때문에 잘 안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합니다. 어느 누가 효도하지 않겠다고 합니까? 교회에서 봉사할 때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세 번째 요구하는 마음은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아주 기쁘게 하나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인데 이것만 보면 이처럼 좋은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일과 세상 좋은 일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좋은 일은 세상에게 정말로 좋은 것입니다. 때로는 인생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정말로 좋은 일이 하나님 뜻입니다. 하나님 뜻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는 것,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은 별로 없습니다. 사랑하고 다른 사람 도와주고 용서하고 뭐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 순종하면 몸이 좀 피곤해도 피곤한 줄 모르고 손해를 보아도 손해 보는 줄 모릅니다. 경험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조금 더 큰 엿을 먹었다고 좋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좀 낫다고 좋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푸근한 것이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인생 최고의 모든 것을 다 가졌던 다윗의 고백입니다. 그는 전부 다 해보았고 전부 다 가졌습니다. 다윗이 통치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영토가 제일 넓었습니다. 다 해보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한 마음을 주시고 정한 심령을 주시고 정직한 영을 주시기만 한다면 이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악한 마음이 있습니다. 인정해야합니다. 죄를 지으려고 하는 마음, 불순종하려고 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와 사망의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의 선한 것이 구하지 아니하는 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내게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는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이것이 있습니다. 눌려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우리를 누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선한 마음이 힘을 쓰지 못하고 일어서지 못합니다. 우리의 노력과 결단으로 깨뜨리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깨 주셔야합니다. 하나님이 다 깨뜨려주시면 속에 있던 마음이 일어납니다. 기도할 때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할 때 그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그렇게 힘쓰고 애를 쓰고 노력해도 불가능했던 그 귀한 정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 깨끗한 마음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주십니다. 

기도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남편을 위해서, 여러분의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할 때 믿으십시오. 정말로 믿음으로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 남편에게 내 아이들에게 정한 마음을 주시고 자원하는 심정을 주시고 정직한 영을 주셨습니다. 비록 아직 그 사람이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정말로 여러분이 믿음으로 기도했다면 우리 아들 딸 마음속에 그것이 있고 내 남편의 마음, 내 마음에도 그것이 있다고 믿으십시오. 반드시 그 마음이 활짝 꽃이 피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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