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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드온⑤ - 마무리 전투 (삿 8: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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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⑤ - 마무리 전투 (삿 8:1~28)


I. 승전 축제를 벌여야 할 시간에

사사시대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압제 아래 신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구원자로 기드온을 선택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사실 겁이 많고 유약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큰 용사"라 부르시고 큰 용사로 쓰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크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면 나는 이제 큰 용사입니다. 

그때 기드온은 자신을 불러주신 분이 하나님되심을,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친구처럼 대해 주시던 하나님께서는 사사들 가운데서는 기드온을 다정한 친구처럼 대해주십니다. 그리고 꼼꼼하게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 사사로 세우시고 미디안 연합군과의 한판 전쟁에 나서게 합니다. 이 전쟁은 숫자전쟁, 무기전쟁, 작전전쟁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몰려온 병사들을 다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깁니다. 칼 한 자루 변변히 없는 300명을 데리고 450:1의 전투를 해야할 기드온에게 보리떡 꿈을 통해 이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임을 알려주십니다. 나는 보리떡 같은 존재이지만 거기 성령이 임하면 능력의 핵폭탄이 됩니다. 

300명 기드온 용사들이 자정이 넘어서는 시간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두고 나팔을 불며 "칼이여,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고 외칩니다. 그랬더니 원수들의 손에 들려 있던 칼이 하나님의 칼이 되어 춤을 추었습니다. 원수의 손에 들려진 칼을 향하여 명령할 때 나를 찌르던 그 칼이 원수들 스스로를 찌르는 여호와의 칼이 되었습니다. 

미디안 연합군은 미치광이가 되어 자기들끼리 서로 찌르고 죽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12만명이 죽고 15000명만 살아서 도망을 쳤습니다. 이 과정에 후속전투에 참전했던 에브라임지파 사람들이 오렙이라는 장군과 스엡이라는 장군 즉 이스라엘의 원수를 잡아죽이고 그 머리를 기드온에게로 가져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사사기 6장 7장의 내용입니다. 이제 8장의 문이 열려지면 전쟁 그이후 도망간 적군을 소탕하는 "마무리 전투"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마무리 전투」입니다. 

성공적으로 이륙하여 고공전투를 잘 감당할 한 대의 전투기가 멋지게 착륙하여 모든 비행을 마무리하는 순간입니다. 바둑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끝마무리를 잘하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랍니다. 신앙의 고수, 인생의 고수도 마무리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도 있습니다.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출정했던 군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격려하고 축하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항아리가 깨지고 횃불이 불타오르고 나팔소리 고함소리가 울려퍼질 때 미친 듯이 서로를 죽이던 미디안 군대의 꼴을 전하며 전쟁담을 나누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 역시 자신들을 무참히 짓밟던 적장 오렙과 스엡을 추모하여 오렙 바위, 스엡 포도주 틀에서 쳐죽이던 통쾌함을 보고하며 박수를 받아야 할 시간입니다. 

구론대 문득 에브라임 사람들의 얼굴이 붉그락 푸르락하더니 감정섞인 목소리로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고 나선 것입니다. 1절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크게 다투는지라" 이 말은 사태가 험악해져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갔다는 겁니다. 누군가 한 마디라도 이 분노에 맞대응을 하면 동족끼리 한바탕 전쟁이라도 터질 것 같은 상환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미디안과 전쟁을 해야 한다면 숫자도 많고 전쟁에 능한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자신들과 상의도 없이 전쟁을 치루었고 자신들에겐 연합하자는 초청조차 안했다고 분노를 터트렸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횃불 들고 나팔불며 승리를 누릴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것이 못내 섭섭하고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본 게임이 끝나고 도망가는 미디안 군대나 쫓도록 자신들을 이용했다는 데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우리가 선발투수지 기껏 구원투수냐는 겁니다. 우리가 스페어 타이어냐 이겁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가나안 입성의 영웅 여호수아를 배출한 지파라는 긍지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자신들이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는데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 못내 억울했습니다. 므낫세 지파와는 같은 요셉 지파, 요셉의 자손이었지만 므낫세는 몰락해 가는 가문이었고 자신들은 흥왕된 지파였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이런 항의는 승리의 축제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렇게 불평하고 다투는 사이 적들은 지금 신나게 도주하고 있었습니다. 적을 소탕할 기회마저 잃을 수 있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이 분노는 결국 하나님의 계획과 뜻마저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제쳐두고 므낫세 지파 그것도 이름없는 가문 출신 기드온을 들어 쓰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결국 "여호와의 전쟁"을 두고 서로 자신들의 전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헤게모니 다툼으로 번져갈 조짐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근본 성격을 흩트리는 것이었습니다. 


II. 에브라임의 분노를 달래다

에브라임 지파 한 두 사람의 불평은 집단 소요로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저편 이곳 저곳에선 뭐 저런 사람들이 있어. 너무 하는 거 아냐. 또 다른 반감이 터져 나옵니다. 

이때 만약 기드온이 바른말 한 마디라도 했더라면 내전이 터질 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애를 쓴 줄이나 알고 하는 말이야? 전쟁이 끝난 다음 이삭이나 주워 챙긴 주제에 웬 불평이냐? 지난 7년동안 앞장 서 싸워보지. 그동안 뭐했어?" 얼마든지 이럴 수 있지요. 

그러나 기드온이 높은 언덕에 올라서더니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합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모두를 포용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2절 3절입니다. "내가 한 조그만 일은 여러분이 한 그 엄청난 일에 비교나 되겠습니까? 에브라임 여러분들의 끝물 포도가 우리 므낫세 가문 맏물 포도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 지파의 찌질이를 내세워도 우리 지파의 영웅보다 낫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쟁을 했다고 하지만 우리가 한일이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오렙과 스엡을 잡아오지 않았습니까? 이 보다 더 큰 전과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잠언 15:1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
분노를 사랑으로, 비난을 칭찬으로, 적대감을 온유함으로 품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대신 어리석은 에브라임 사람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었습니다. 기드온은 싸움이 대상이 동족이 아니라 미디안임을 알았습니다. 잘 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부싸움 잘하고 교인들끼리 멋지게 싸워 이겼다고 하나님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하겠습니까? 

기드온의 이 온유한 설득은 분명 효과가 있었습니다. 분명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략에 가까웠던 기드온의 이 말속에 커다란 아쉬움이 있습니다. 300명 용사로 12만 미디안 군대를 무찌른 이 전과를 축소하고 과소평가 하므로 하나님의 행하신 이 강력한 역사와 기적을 폄하하고 말았습니다. 450:1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하나님의 싸움에 대한 언급, 신학적 해석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셨는지 하나님을 드러내는 이 중요한 일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자기 겸손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역사를 숨겨버렸습니다. 형제를 달래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Let King Be King - 사사기 주인공이 사사기 주제파악이 아직도 안되어 있었습니다. 


III. 숙곳과 브누엘

에브라임이 분노를 터뜨리고 기드온이 저들을 달래는 사이 살아남은 미디안 군인들은 허둥대며 도망을 갔습니다. 미디안 15000명이 살아남았다고 하나 무참히 죽어간 12만 동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지난 7년 고개를 들고 거리와 들판을 누비던 압제자들은 이제 패잔병이 되어 또 다른 공격을 두려워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느라 전열을 정비할 힘도 보초를 세울 힘조차 없었습니다. 양식과 무기는 도망칠 때 모두 버리고 몸 하나 빠져나온 것만도 감사할 뿐입니다. 

누가 저 히브리 찌질이 겁쟁이들을 용감한 전사로 바꾸었단 말인가? 놀라울 뿐입니다. 기드온은 정말 신출귀몰한 자인가? 정말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 것일까? 온갖 것들이 궁금하고 신비했습니다. 

기드온은 도망간 저들을 추격하는데 온갖 전과를 독차지하고 싶고 불평을 일삼는 에브라임 지파 따위는 동참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조금 힘이 들더라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따라준 바로 그 300 용사만 데리고 추격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산악지대 240km가 넘는 길을 행군해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본문 4절은 이 상황을 뭐라고 보고합니까?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고 있었다" 지친 병사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걸었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모래 사막, 험산 준령을 넘고 또 넘었습니다. 발걸음은 천근만근 지금 먹을 것 마실 것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시력 좋은 한 병사가 신기루를 보았는지 소리를 지릅니다. 「저기 마을이 보인다」 기드온과 병사들이 연기를 따라 찾아간 곳은 숙곳이란 곳이었습니다. 기드온은 갓 지파 숙곳 마을을 들어서며 영웅대접을 받으며 허기진 부하들에게 배를 채워줄 수 있겠다 싶어 큰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 전사들은 싸늘한 냉대를 받았습니다. 

숙곳은 미디안과 인접한 지역이라 어느 지파보다 미디안의 압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격에 합류하여 미디안을 부셔야지요. 숙곳 지도자들은 회의 끝에 기드온에게 내어놓은 결론이 이렇습니다. 6절입니다.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 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이 말은 고작 300명 군인을 이끌고 미디안과 아말렉 왕을 잡겠다는 거냐? 집에 가서 얘나 봐라! 이 말입니다. 너희들에게 우리가 식량을 제공한 사실이 미디안에게 알려지면 우리가 보복을 당할텐데 왜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겠느냐는 것이지요.

애국심도 동족애도 없는 자들, 줏대없는 변절자들을 향해 기드온은 심판의 메시지를 던지고 그 마을을 떠납니다. 7절 말씀입니다.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숙곳을 떠나 6km의 행진을 계속했더니 브누엘이란 마을이 나왔습니다. 그 옛날 야곱이 천사와 씨름을 하고 아침 햇살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고 하여 하나님의 얼굴 - 브니엘이라 불렀던 곳입니다. 이곳에서도 기드온과 300용사는 싸늘한 냉대를 받고 저주를 남기고 떠납니다. 9절입니다.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브누엘에는 그 마을을 상징하는 망대가 있었습니다. 망대를 헐리라는 말씀은 마을을 진멸하겠다는 것이지요. 

기드온 군대는 이곳 브누엘에서 40km 산악지대를 횡단합니다. 11절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길"이란 바로 유목민들이 다니던 숨은 길을 말합니다. 큰길을 쳐들어가면 미디안이 대비를 하겠지요. 적군이 도망가 허탈과 공항 상태에 빠져 쓰러져 있을 때에 기습작전을 펴 미디안의 왕과 또 다른 연합군의 왕 세바와 살문나를 체포하여 돌아옵니다. 300명 용사들의 손톱 발톱은 찢겨져 피가 엉켜 붙어 있었고 얼굴과 팔뚝은 상처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두 왕을 체포하여 돌아오는 길에 기드온 군대를 거역하고 매국노 짓을 했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처형합니다. "보라, 너희들이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세바와 살문나다. 이 따위의 보복이 두려워 동족, 형제를 배신하고 지친 군대에게 마른떡 한 조각을 줄 수 없었더냐? 그 행위가 나라를 배신하고 하나님을 거역한 죄임을 알렸다. 가시 채찍으로 저들을 쳐 죽여라."

사사기 저자는 나팔과 횃불 전쟁 후에 에브라임 에피소드와 숙곳, 브누엘 에피소드를 담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달래고 숙곳, 브누엘은 심판합니다. 이 두 에피소드를 대조시킴으로서 사사기 지파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누가 이스라엘이냐?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 탈무드에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머리가 둘 달린 아이가 어느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랍비에게 찾아가서 이 아이를 호적신고를 해야 하는데 두 아이 이름으로 호적신고를 해야 하는지, 한 아이 이름으로 호적신고를 해야 하는지, 두 아이 인지 한 아이 인지 그것을 물었습니다. 유대인 랍비가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산에 가서 딱딱한 박달나무 막대기를 하나 만들어 와서 한 놈의 머리를 딱 때려 봐라. 그래서 둘 다 아야~ 울면 한 놈이고, 한 놈만 울고 한 놈이 웃으면 두 놈이다." 

형제가 아플 때에 나도 함께 아파하면 한 몸이라는 것이지요. 너는 울어야 하는데 너는 피를 흘려야 하는데 나는 웃어야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형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한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한 자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사사기 저자는 이 차이를 대단히 중요한 차이로 다루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싸우겠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들을 격려하고 달랬습니다. 그러나 숙곳과 브누엘은 싸움을 거절했습니다. 여호와의 싸움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심판받았습니다. 숙곳과 브누엘은 지파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지파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스라엘 지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IV. 오직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리라

체포되어온 미디안과 아말렉 왕 세바와 살문나는 숙곳에서 처형되는 사람들의 피가 튀길 때마다 내일 자신의 처지처럼 보여져 두려움에 몸서리쳐야 했습니다. 기드온이 적군의 왕을 묶어 본국으로 돌아올 때 수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환호하며 환영했습니다. 오랜 전투의 누적된 피로가 풀어지는 듯 했습니다. 기드온은 두 왕을 끌고 다볼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기드온의 두 형들이 이들에 의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참히 죽어 갔습니다. 

기드온의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18절입니다. "아무개날 이곳에서 네가 죽인 사람들이 기억나느냐? 어떻게 생겼더냐?" "너를 닮았었다. 왕자처럼 귀품이 있었느니라"
19절입니다. "그들이 바로 나의 형님들, 내 어머니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느니라. 그들이 이곳에서 비참히 죽었듯이 너희도 그렇게 죽어야 할 것이다." 

기드온은 수치스런 죽음을 안겨주기 위해 자신의 장남 - 어린 여델의 손에 칼을 쥐어 주며 이자들의 목을 치라 명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여델은 두려움에 칼을 뽑지 못합니다. 적장 세바와 살문나는 왕다운 눈빛을 잃지 않고 기드온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대가 장부라면 그대의 손으로 우리를 죽여라!" 기드온은 아들 여델의 칼을 빼앗아 휙휙 칼을 휘두르니 그들의 목이 땅에 떨어집니다. 

백성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자손대대로 이 나라를 다스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때 기드온은 대답합니다. 23절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Let King Be King! 왕이 다스리신다. 이 순간이 기드온 생애의 절정이었습니다. 

기드온 사건의 결론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오직 하나님이 싸우신 것입니다. 이 나라를 다스릴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국민이 원한다면 내가 왕이 되어 섬기겠소." 얼마든지 응할 수 있는 기회를 기드온은 담대히 거절합니다. 


IV. (결론) - 마무리 전투!

아! 그러나 기드온에 관한 사사기의 기록이 23절에서 끝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기드온 가문의 불행은 바로 그 다음절 24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비극적 기록은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마무리 전투 과정에서 있었던 기드온의 멋진 모습 그대로를 오늘은 기억하며 말씀을 맺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분노를 다스리는 아름다운 성품, 구원자요 사사 즉 이스라엘의 심판자로서 거룩한 전쟁의 방해꾼 숙곳과 브누엘을 처단하는 정의의 사도로 기드온을 기억하십시다. 지난 7년동안 이스라엘을 그토록 못살게 굴던, 무참히 양민을 학살하던 세바와 살문나를 형님들과 동족이 죽어간 다볼산에서 처형하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만방에 선포하는 그 멋진 기드온을 기억하십시다. 왕이 되어 달라는 백성의 요청을 거부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우리의 왕이시다」라고 선포하는 사사의 용기를 우리도 간직하십시다. 

행여 우리는 본 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후속 전투를 포기하고 살지는 않는지 자신을 더듬어 보십시다. 구원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성화의 전투는 게으르고 나태해서 포기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헌신과 충성의 싸움은 아예 접어두고 살지는 않는지요? 심지어 교회의 거룩한 싸움을 구경하듯 바라보고 숙곳, 브누엘처럼 떡 한 조각을 움켜쥐고 떨고 있지는 않는지요? 신앙의 고수는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당신에게 남아 있는 「마무리 전투」를 새롭게 살피고 새로운 전선으로 나서는 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국교회 또한 본전투, 전도 싸움, 선교 싸움에서는 멋지게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후속 전투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과제가 있다면 마무리 전투, 후속 전투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이 시대가 바로 새로운 사사시대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저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왕입니다. 이때 우리는 기드온처럼 외쳐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오직 하나님이 왕이시다」

미디안 잔당들이 나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말씀으로부터 떠나 살게 합니다. 기도에 나태하도록 합니다. 충성과 헌신을 아까워하게 만듭니다. 숙곳과 브누엘처럼 하나님 위해 내어놓기를 두려워합니다. 마무리 전투에 담대히 나서십시오. 내 안에 숨어 있는 세바와 살문나를 끄집어 내십시오. 그들을 처단하십시오.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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