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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행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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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행 17:1~9)


여러분 가운데 계란에 대해서 아십니까? 계란 중에는 무정란과 유정란이 있습니다. 무정란은 아무리 오랫동안 어미 닭이 품어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지만 유정란은 어미 닭이 21일간 품으면, 반드시 병아리가 생명 되어 나옵니다. 겉으로는 도무지 판별이 안됩니다. 그러나 일단 품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무정란 같은 성도가 있고 유정란 같은 성도가 있습니다. 무정란 같은 성도들은 예수로 인하여 고난이 덮치고, 손해가 나고, 풍랑이 일어나면, 그냥 도망가거나, 무너지거나, 썩어 사라집니다. 그러나 유정란 같은 성도들은 고난이 올수록, 풍랑이 셀수록, 더욱 더 주님 품에 파고들어 마침내 생명을 출산하게 됩니다.

생명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신기합니다. 하수구에서 작은 생명의 씨앗이 날아와 싹을 트는 것을 보았습니까? 집채만한 바위 밑에 눌려서도, 생명의 싹이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한 서리가 내리는 겨울 산꼭대기에서도, 소나무가 사철나무 되어 올곧게 그리고 싱싱하게 살아 숨쉬는 것을 보았습니까? 이 모든 것이 생명을 지닌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우리 안에 당신의 참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하고, 형벌 같은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그것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생명을 소유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한 본문의 내용은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고 난 다음에 160km나 떨어진 한 지역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1절에 보면 그 장소가 데살로니가 지역으로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인구20만 정도의 마게도니아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는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고 그 명성에 걸 맞는 잘 발달된 도로가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정확히 데살로니가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2절에 '세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고 했으니 최소 3주는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3주는 뭐,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의 영향은 데살로니가 지방을 영적인 세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본문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바울이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를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대단히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살전1:3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고 1:4에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교회'였고 1:8에 보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교회' 였습니다. 믿음의 본이 되는 교회 대단한 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5-6절에 보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여기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라는 말은 당시 바울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유대인들이 오늘로 말하면 '어깨"들을 동원한 것입니다. 어깨들을 떼거지로 동원해서 바울 일행이 묶고 잇는 야손의 집을 기습했습니다. 갑자기 조폭들이 들이닥치니 얼마나 당황 해겠습니까? 일은 자다가 날벼락을 맞는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거기에 바울 일행이 없자 야손과 그의 가족을 붙잡아 읍장에게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야손과 그의 가족들은 어려움을 겪다가 나중에 보석금으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은 현대 번역에서는 "세상을 소란케 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 보면 'upset the world'라고 번역했습니다.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대충 대충 생각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바울이 무슨 일을 했기에 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3절에 보게 되면"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여기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는 이 메시지는 유대인들에게는 자존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만약 바울이 전한 이 사실을 믿는다면 자신들은 지금 누구를 죽인 것입니까? 단순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오랜 세월 기다리던 메시야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걸고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방해했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걸고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를 세상 앞에 증거 한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바울 뿐만이 아닙니다. 성령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미친 듯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보십시오. 예루살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자 120명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들이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부활하셨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살아나셨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들은 ?도 없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하루에 삼 천명, 오 천명씩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예루살렘이 교회로 바뀐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온 도성에 있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악한 사탄과 그 영들이 드디어 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을 믿으면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이 이야기 앞에 사탄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스테반을 끌어다 돌로 쳐죽이고 그때부터 피에 맛을 들인 무리들이 사나운 야수가 먹이를 덮치듯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공중 앞에 개끌 듯이 끌어내어 "예수를 욕해라. 예수를 모욕하라. 그러면 석방시켜주겠다"고 온갖 회유와 공포를 동원했지만, 당시 믿음의 사람들은 당당히 맞섭니다. 뭐, 이 때문에 수도 없는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이런 일들이 세계 도처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올 봄 아프가니스탄 NGO에서 사역하던 미국인 여성이 칸다하르에서 납치, 살해당했습니다. 작년 이 맘 때 샘물 교회 청년의 사역 중 2명의 순교자를 내엇던 현장이 아닙니까? 그녀의 노트북에 저장돼 있던 다른 선교사들의 정보가 노출되었는데, 다행히 그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터키의 안순자 선교사가 있던 사역지에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작년 4월에 안디옥 (행11:26)에서 500km 정도 떨어진 말라티아라는 도시에서 선교사 몇 명이 이슬람교도들에게 입에 담기에 처참할 정도로 난도질을 당했습니다. 당시 그 현장을 가해자가 핸드폰으로 녹화를 했는데 그것이 세상에 공개가 된 것입니다. 거의 3시간 동안이나 혹독하게 고문했습니다. 

틸만 선교사는 156번이나 칼에 찔렸고, 네자티 목사는 99번 그리고 우구르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찔려 있었습니다. 이 이슬람교도들은 선교사들의 배를 갈라 창자를 조각조각 잘랐고, 성기를 도려내고 손가락들을 절단하고, 코와 입과 항문을 도려내었습니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다른 형제들이 당하는 고통을 직접 눈으로 보게 한 것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이성을 잃고 이슬람교도들이 난도질을 한 것입니까? 이는 이 3사람 모두 이슬람교도인데 예수를 영접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로 사역자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런 잔혹한 참상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죽음마져도 기독교식으로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핍박이 있었지만, 가족들은 단호했습니다. 그 순교자 가운데 남편의 장례 식장에 있던 네자티의 부인은 장례식에 위로하러 나온 분들에게 이런 답사를 했습니다. "남편의 죽음은 참 뜻이 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나의 삶에 그가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영광의 면류관을 쓴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그 영광에 합당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무엇이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도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절망의 자리에서도 오히려 감사가 잃어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을 가진 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주위 사람을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켜 줍니다. 죄에서 그 영혼을 해방시켜 주시고, 마음이 상한 자에게 위로함을 주고, 육신이 아픈 자에게 때로 건강을 줍니다. 복음에 충만한 사람, 참 복음을 가진 사람이 가는 곳에는 그 사회가 달라집니다. 그 모임이 달라집니다. 거기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자유가 있었어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국교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전 인구의 4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통계를 내놓을 정도로 부흥하여 세계적으로 소문이 난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축복을 누리게 된 배후에는 상상할 수 없는 피와 눈물과 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27세에 선교의 비전을 품고 영국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에 오자마자 꽃다운 나이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잃어버린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는 한 가지 소식을 접했습니다. 저 중국 한 모퉁이에 붙어있는 한반도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백성들이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으며 복음을 들은 일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이 아직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말로 된 성경책을 배에다 싣고는 대동강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그 때는 대원군이 한창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때로 가톨릭 신자들을 잡아죽이던 살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야소) 소리만 내어도 세상 구경을 다시는 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성경을 전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자 우리 관군들이 그 배에 불을 질렀고 드디어 그는 강변으로 끌려 내려와서 칼에 맞아 순교를 했습니다. 순교를 당하는 그 순간에도 자기 목을 치는 사람에게 성경을 주면서 그것을 읽어보라고 말했습니다. 그 성경을 받아든 그 사람이 나중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토마스라는 젊은이의 피가 그 강변에 뿌려졌기에 그 피 값으로 인해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언더우드와 함께 이 땅에 온 아펜젤러 선교사는 전라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황해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익사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보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유능한 의사요, 학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안전하고 편한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고 성경을 들고 전도하러 다니다가 물에 빠져 허망하게 죽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 땅에 복음을 위해 온 사람들은 모두가 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패하고 병든 세상과 족속으로부터 생명을 건지는 일보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만드는 일보다 더 귀중한 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그 모든 눈물과 노고의 대가를 100배나 받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신촌을 가다보면 양화진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을 가본 분이 있으십니까? 양화진에 가면 비석이 많이 서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세기 전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풍토병에 걸려서 죽었거나 잘 적응하지 못해서 죽은 어린아이들의 무덤, 선교사 부인의 무덤,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젊은 선교사들의 무덤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무명의 선교사들입니다. 이곳은 단순히 선교사의 시신이 묻힌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는 사랑이 묻힌 곳이라는 생각을 갔다 온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게 됩니다. 거기에 다녀간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땅속에 묻힌 심장에서 뜨거운 피가 흘렀고, 지혈(地血)이 되어 차가운 땅을 녹여, 마침내 이 땅에 생명의 온기가 전해지고 죽어가던 생명이 되살아났다.”

생각해 보세요. 온갖 퇴폐와 세속의 문화로 찌들어 가는 서울이지만 그 심장부에 복음을 위한 순교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왠지 감동으로 와 닿지 않습니까? 이 무명의 선교사들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 땅에 왜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까?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 땅에 첫발을 내 딛는 순간 탄식한 소리가 들립니까?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황무한 땅에 복음 하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순수복음의 열정과 영적인 기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기백도 때로는 생사를 가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알렉산더가 4만의 군대로 이수스에서 당시 40만의 다리우스 군대를 쳐부순 것도, 중국 공산당 의 초기멤버인 정강산의 23인의 동지가 장개석의 국민당을 제압하고 10억 중국을 접수할 수 있었던 비결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는 세상의 기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 보혈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속의 파고가 높고 거칠게 밀려온다고 해도 초기 선교사들의 영적인 기백을 회복한다면 결코 뒤로 물러설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온갖 설움과 핍박이 오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사람들의 집요한 추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한 길을 나가지 않습니까? 복음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로 매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누가 미친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여 그 영생을 위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투자한 사람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 후면 사라져 버릴 명성을 위해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채 10년도 가지 못하는 권력에 미쳐 자신의 목숨을 다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 자신의 목숨을 깍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미친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 역시 예수님께 미치고 싶습니다. 완전히 미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해서라도 그들을 세우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에 미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에 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은 기쁨을 줍니다. 이제 바울과 같이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열매를 맺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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