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겸비한 신앙인(2) : 뱀 같이, 비둘기 같이 (마 10:16)

  • 잡초 잡초
  • 465
  • 0

첨부 1


겸비한 신앙인(2) : 뱀 같이, 비둘기 같이 (마 10:16) 
 
 
모순(矛盾)

영어에 패러독스(Paradox)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역설’이라고 번역합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로 ‘모순’(矛盾)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창 모(矛) 자와 방패 순(盾) 자를 쓰는데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에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가 파는 창과 방패를 선전하면서 “이 창은 아주 예리해서 어떤 방패라도 다 뚫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방패는 너무 튼튼해서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한다”고 자랑했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창으로 자네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 상인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니까요. 이런 경우를 ‘모순’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겸비(兼備)한 신앙인”이라는 주제로 성경에서 성도들이 두 가지를 다 갖추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경우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말이 좋아서 ‘겸비’지 어떻게 보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패러독스’요 ‘모순’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참 모순처럼 보입니다. 특히 뱀과 비둘기라는 두 이미지는 정말 안 어울립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볼 때도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고 아주 순결한 이미지의 동물이고 뱀은 얼마나 약아빠지고 간사하게 느껴집니까? 성경에도 비둘기는 아주 순수한 동물이고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하여(창 3:1) 하와를 꾀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게 만드는 사탄적인 동물로 나오지 않습니까? 뱀과 비둘기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인데 이 둘을 함께 닮으라니요? 참 모순처럼 들립니다.

게다가 주님이 말씀하신 ‘지혜’와 ‘순결’도 잘 어울리지 않는 듯 보입니다. 착하고 순진하면 지혜롭지 못하고, 그래서 세상 물정 잘 모르고, 반대로 지혜로우면 약아서 순진하지 못한 것이 일반적인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전도하도록 파송하면서 이 두 가지를 다 갖추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안 어울리는 두 동물이요 정말 안 어울리는 두 개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주님은 제자들에게, 특히 세상으로 그들을 파송하시면서 이 두 개의 어울리지 않는 것을 다 갖추어야 한다고 모순적인 명령을 내리신 것일까요?


뱀만 있고 비둘기가 없으면

어려울 것 없습니다. 이 두 가지만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뱀만 있고 비둘기가 없다면, 반대로 비둘기만 있고 뱀이 없다면 하는 두 가지 경우입니다.

먼저 뱀만 있고 비둘기가 없다면, 즉 뱀이 상징하는 지혜는 있는데 비둘기가 상징하는 순결함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선 오해 하나 풀고 넘어갑시다. 여기서 뱀은 창세기에 나오는 것처럼 간사한 악의 상징이 아닙니다. 뱀은 긍정적인 이미지로 아주 지혜로운 동물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 뱀 아주 질색하는 분들 많겠지만 요즈음 애완동물 중에 별별 것을 다 키우지 않습니까? 개나 고양이뿐 아니라 이구아나, 뱀, 고슴도치까지 키우는데 저는 좀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커다란 구렁이나 비단뱀을 키우는 분들은 그런 말을 하더군요. 뱀이 생각보다 너무 순하고 명석하다고요. 자, 좀 이해가 안 가더라도 일단 뱀을 좋게 보고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다시 묻습니다. 우리에게 뱀만 있고 비둘기가 없다면, 즉 뱀이 상징하는 지혜는 있는데 비둘기가 상징하는 순결함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 마디로 ‘잔머리 신앙인’이 됩니다. 너무 영악해서 절대 손해 안 보는 신앙인입니다. 끊임없이 잔머리를 굴리며 성공과 출세와 이득만 추구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절대 손해 볼 짓은 안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충분히 계산해서 이득이 될 일만 합니다. 손해 보면서 앞뒤 안 가리고 믿는 사람들 보면 정말 이해가 안 가지요. 저렇게까지 해서 예수를 믿어야 하나 싶어 좀 모자라 보이기도 하고 경멸스럽기도 합니다. 광신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믿으면 절대 손해를 안 볼지는 몰라도 절대 신앙은 안자랍니다. 아니, 나중에 보면 결국 정말 복을 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뱀만 발달하고 비둘기가 없는 분들은 이익과 손해에 밝고 계산에 빠르지만 그것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기 쉽고 그래서 타락하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 다른 것들을 의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잔머리 굴리는” 신앙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같이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잔머리 굴리지 마세요.”

이런 사람들을 시편 1편에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4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4-6절) 

시편은 이런 사람들을 ‘잔머리 신앙인’이라는 말보다 한 술 더 떠서 ‘악인’이라고까지 묘사합니다. 왜?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의지하고 눈치 살피고 계산하면서 계속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 좋은 것 있다면 이리로 확 쏠리고, 저기 이익 된다면 저기로 확 날아가는 그런 겨처럼 세상의 바람을 타고 이리 저리 휩쓸리며 살기에 처음에는 이익도 보고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결국 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는 것과 반대로 의인들이 이렇게 사는 것과 반대로 살기에 결국은 하나님의 인정도 못 받고 하나님의 도움도 못 받고 망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비둘기만 있고 뱀이 없으면 

자.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에게 비둘기만 있고 뱀이 없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즉 순결과 순수함만 있고 뱀 같은 지혜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냐는 말입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직업에 대해 가르치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 아빠는 뭐하는 분이시니?” 한 아이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합니다. “예, 우리 아빠 사장님이에요.” 또 한 아이가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우리 아빠는 의사에요.” 또 한 아이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 아빤 대학 교수님이에요.” 그런데 그 가운에 유독 한 아이만 시무룩하게 대답 안 하고 앉아있더랍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네 아빠는 뭐 하는 분이시니?” “우리 아빠는요...” 말끝을 흐리던 아이는 이윽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은 착해요.” 웃으라고 한 이야기인데 너무 심각하게 들으셔서 그런지 웃지도 않으시네요. 물론 이 이야기는 웃으라고 하는 것입니다만 마냥 웃고 넘어가기엔 좀 찜찜한 이야기입니다. 왠지 서글퍼지기까지 합니다. 요즘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장들이 가정을 이끌어가기 너무 어려운 시대임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서글픈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 아빠는 사람은 착해요.” 하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야기의 뜻을 잘 못 알아들으신 분이 계신 것 같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칭찬입니까? 좋은 아빠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욕입니까? 아마도 이 아이가 뜻한 바는 이런 뜻인 것 같습니다. “우리 아빠는 착한 분이고, 참 좋은 분이에요”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아빠는 착하지만 무능한 사람이에요”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아도 착하고 순해 빠지기만 했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빠로 비춘 것 같아 아빠요 가장의 한 사람인 저도 마음이 좀 무거워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여기서 유능하고 무능하고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기만 해서는 세상을 살아가기 힘든 것처럼, 우리도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순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순결하고 순수해서만은 이 험한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능력 있게 해나가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믿는 기독교신앙에 대해 워낙 적대적인 세력이 많습니다. 전에 비해서 아주 의도적으로 악의적으로 기독교를 비방하고 깎아 내리려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구분은 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 기독교가 올바로 서지 못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 노릇을 못할 때 세상 사람들이, 안 믿는 분들이 따끔하게 한 소리 충고하는 것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와는 전혀 달리 아예 처음부터 반 기독교적이고 악의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깎아 내리고 말살하려는 불순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사명자들을 잡아먹으려는 이리와 같은 세력들이 분명히 있음을 알았기에 주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얼마 전 SBS라는 방송에서 SBS 스페셜이라는 이름으로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4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했습니다. 특정한 방송 이름을 거명해서 유감입니다만 그래도 할 이야기는 해야겠습니다. 지금 한창 기독교계와 방송국 사이에 신경전이 오가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이 4부작이 종교 사이의 화해와 수용을 추구한다며 특정 종교, 즉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이 방송이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매도하고 이슬람교를 일방적으로 좋게 묘사했다고 항의하고 방송국과 일부 네티즌들은 기독교가 너무 과민반응을 일으킨다며 비난합니다.

 저는 이 방송을 못 보았기에 뒤늦게 자료를 입수해서 보았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상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이 방송을 보자마자 한마디로 “도대체 어떤 의도로 이런 방송을 만든 것일까” 싶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신의 아들로 보는 것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화를 혼합해 신화화시킨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다만 이슬람교의 무함마드(마호멧)처럼 탁월한 종교인일 뿐인데 후대에 예수를 신화화해서 신의 아들로, 구원자로 만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종교가 있는데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방송들이 접근한 적이 없습니다. 감히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신앙을 이런 식으로 매도하고 파괴하려는 그들의 의도가 도대체 무엇일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유난히도 방송들이 기독교의 비리나 교회의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불교나 천주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집중적으로 다뤄오고 있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너무 보수적입니까? 목사라고 너무 유난 떠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방송국이나 네티즌들이 말하는 것처럼 개독교의 미친 목사입니까? 편협하고 배타적인 기독교 광신도입니까? 여러분, 보세요. 세상이 이렇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아주 교묘하게 우리 기독교신앙을 비방, 매도하고 말살하려는 일들이 일어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순수하고 착하게 앉아서 “그러려니” 하고 참고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에 보면 신천지 이단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그동안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이미 이 신천지 이단이 저 전라도 지방을 휩쓸고 부산을 거쳐 이 포항 땅으로 들어와 포항을 집중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단 전문가들은 포항 시내 웬만한 교회마다 신천지 몇 명씩은 다 침투한 것으로 봅니다. 이미 호남이나 부산 등지의 큰 교회에서는 수백 명씩 신천지에 넘어가 교회를 엄청난 혼란에 빠뜨린 사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소문을 들었는데 우리 교회에 몇 십 명이 신천지에 빠져 교회가 시끄럽다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서 제가 “우리 교회 그런 일 없다”고 했습니다. 아마 무슨 잘못된 소문을 들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이런 소문을 퍼뜨린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이 신천지가 왜 그렇게 무섭냐? 왜 그렇게 나쁜 집단이냐? 이 땅에 수많은 이단이 있지만 그 중에도 신천지가 가장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새 신자를 가장해 교회에 침투합니다. 전에 다른 건전한 교회 다녔다며 거짓말을 하고 교회에 들어옵니다. 심지어 가짜 이름까지 써가며 속입니다. 그리고 온갖 거짓말과 속임수를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해서 순수한 성도들을 현혹해서 신천지로 넘어가게 합니다. “정말 은혜로운 성경공부 가르치는 곳이 있다”며 성도들을 데려가서 신천지 무료성경신학원에 다니게 하고 포섭을 합니다. 이런 거짓말을 그들은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고 ‘모략’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 생명 구원하려고 하는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모략이라고 정당화합니다. 심지어 교회 목사를 비방하고 거짓말과 중상모략 해 쫒아내고 자기네 쪽 목회자를 청빙하게 해 교회를 통째로 먹어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을 그자들은 ‘산 옮기기’라고 부릅니다. 

때로는 신천지임이 발각되면 목사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며 신천지 끊고 앞으로 바로 믿겠다고 약속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것이 다 거짓 눈물, 거짓 회개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목사가 근거도 없이 자기를 신천지라고 매도했다며 세상 법정에 고발해 교회를 시험에 빠뜨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 정말 대단한 거짓말쟁이요 뻔뻔한 자들입니다. 사탄이나 악의 역사가 아니고는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세상이 이와 같습니다. 세상에 우리를 삼키려는 이리가 너무 많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사방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자들(벧전 5:8)이 숱하게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세력들이 엄청나게 강합니다. 그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거짓말도 사기도 어떤 못된 짓도 아무 거리낌이나 죄책감 없이 행하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기와 거짓말에 능숙한 자들, 마귀사단의 역사를 물리치려면 비둘기 같은 순수함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단호한 결단과 뱀처럼 지혜로움이 필요합니다. 정말 이단이나 적대세력들 머리가 너무 좋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꾸미는 일들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치밀하고 조직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들보다 더 지혜로움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으로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결단하고 잘라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천지 같은 이단이 발견되면 사랑이 아니라 공의와 잘라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꼭 이런 극단적인 경우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려면 지혜와 결단력이 필요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이단이나 적대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겠지만 어떤 때는 정말 한없이 용서하고 품어야 할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똑같은 말을 해도 어 다르고 아 다르다고,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고 말 한 마디에 한 사람의 생명도 구한다고 우리의 언어나 행동 하나조차 너무도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어떤 때 용서하고 어떤 때는 끊어야 하나, 이럴 때는 야단쳐야 하나 품어줘야 하나, 이런 장소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말을 해야 하나 참아야 하나 무엇 하나도 결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결단 하나가 내 신앙을 좌우하고 한 사람의 영혼구원과 생명까지 좌우하는 경우가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이럴 때 우리에게는 지혜와 결단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순수함과 착함만 가지고 안 되는 일입니다.


뱀 같이, 비둘기 같이

말씀을 맺읍시다. 지금까지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을까? 이 모순적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뱀만 있고 비둘기가 없으면, 즉 비둘기처럼 순결함 없이 뱀처럼 지혜롭기만 하면 끊임없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성공과 출세와 이득만 추구하는 잔머리 신앙인이 될 것이요, 반대로 뱀은 없고 비둘기만 있으면, 비둘기처럼 순수하긴 한데 뱀 같은 지혜가 없으면 이 험한 세상의 이리들을 이겨서 우리 신앙을 지켜나갈 수 없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패러독스도 모순도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을 알려준 정말 심오한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험하고 악한 시대, 너무나 혼란스러운 세대에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아가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이 능력 있는 일꾼으로 살려면, 또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지혜만 가지고는 안 되고, 순결함만 가지고는 안 되고 둘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도 험하고 악했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험하고 악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에 눌려 꼼짝 못하고 꼬리 내리고 살 수도, 세상의 시류에 편승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살 수도, 세상에 눌려서 적당히 눈치 보고 손해 안 보고 타협하며 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에게, 특히 우리 자녀들에게, 그리고 우리 그리스인 모두에게 두 가지를 주옵소서. 뱀 같이 비둘기 같이 주님을 믿고 살게 하옵소서. 세상에게 눌리거나 세상의 흐름에 편승해 세상을 따라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시옵소서.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악해도 그것을 변화시킬 힘이 주께로부터 나오는 줄 믿습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