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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창 32: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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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창 32:22~31)


   우리 민족은 추석이나 설날과 같은 명절이 되면 고향을 즐겨 찾습니다. 열차나 버스를 이용할 경우 표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는 것처럼 힘들고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에도 평소에 두세 배 시간이 더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고향을 찾지 않습니까? 그리운 가족들과 동네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환담을 나눌 것 같으면 쌓인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거의 매 년 찾는 고향도 찾을 때마다 이렇게 가슴이 벅찬데 아주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에 돌아가는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저도 미주 지역에서 사역하다가 팔 년 만에 다시 귀국할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하여간 떠나 있던 기간이 얼마가 되었든지 간에 고향을 다시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고향에 돌아가는 심정이 모두에게 있어서 항상 즐겁기만 할까요?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보면 야곱이 고향 가나안 땅을 떠난 지 이십 년 만에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고향을 떠날 때는 혼자였지만 이제는 많은 처자식과 함께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때는 그가 빈손으로 고향을 떠났지만 이제는 밧단아람에서 꽤나 많은 재산을 모아 가지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야곱은 과연 어떤 인물입니까? 그는 태어날 때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창세기 25장 26절 말씀을 보면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고 해서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지나치게 욕심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는 매우 타산적이었습니다. 또 실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떡과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사지 않았습니까? 또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복도 가로챘습니다. 그리고 라반의 집에서 그가 그토록 많은 재산을 모은 것도 알고 보면 외삼촌을 속인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비한 인물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그리던 고향 땅에 돌아가고 있습니다. 웬만하면 쉬지 않고 달려가고 싶었을 것 같은데 그의 태도는 꼭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꾸만 뒤로 빼는 것 같았습니다. 형이 자기를 만나려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자기의 소유 중에서 예물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몇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겼습니다. 형의 감정을 풀고 환심을 사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물을 앞서 보낸 후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먼저 얍복 나루를 건너가게 하고 그의 소유도 다 건너가게 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했습니까? 심히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형이 와서 자기를 칠까 겁이 난다고 솔직히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처자식이 있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재물과 소유도 그의 두려움을 물리치는 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겁이 나고 두려웠기 때문에 그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얍복 강가에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문제투성이였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손에 쥐었지만 그가 가진 문제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홀로 밤을 지내던 그가 갑자기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된 야곱은 결코 약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강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아마 숱한 종들도 거느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재물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겁이 났습니다. 형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자기를 축복해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그가 비록 지금 큰 부자가 되었지만 형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황급히 고향 땅을 떠날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사람은 새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은 이름이 그 사람의 인격, 성품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야곱에게 지어 준 그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본문 28절 말씀에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여기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형이 무서워 쩔쩔 매고 있던 그가 더 이상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의 변화는 그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결코 좋은 성품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했습니다. 그것도 형의 약점과 아버지의 약점을 이용한 것은 크게 잘못된 짓이었습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었다면 그런 잘못에 대해서 먼저 반성했어야 합니다. 반성할 기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외삼촌의 집에서 지낸 이십 년 동안 그가 어떤 일들을 겪었습니까? 라헬을 사랑해서 칠 년을 봉사한 그가 외삼촌에게 속아서 또 다시 칠 년을 무보수로 봉사하지 않았습니까? 열 번이나 품삯이 바뀌는 일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자꾸 생기는가 자신을 돌아보았어야 합니다.

   지금 얍복 강가에서 어떻게 하면 형의 마음을 움직여서 화를 면할까 고민하는 그의 모습에서도 반성하는 기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서 밤새 씨름하면서도 변화된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세월의 흐름이나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사람이 결코 새롭게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의 모습은 많은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많은 재물을 가진 큰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의 모습은 새롭게 변화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십 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얍복 강가에서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오직 땅의 것만 생각하던 그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육의 사람이 변화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렇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지난 이십 년 동안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처음부터 들에서 돌을 베개로 삼고 잤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지낸 세월도 말 그대로 땀과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세월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얍복 강가에서 씨름을 하면서 어떤 부상을 당했습니까?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서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의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새로운 이름을 가진 사람은 과거와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오직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만 잘되고 자기만 평안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그는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육체의 욕망,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던 우리에게 주님은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때문에 이제 우리의 삶은 전과 달라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끝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충성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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