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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를 좋게 하랴 (갈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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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좋게 하랴 (갈 1:6~10)


얼마 전 sbs에서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송이 되었습니다. 그 방송에서 말하기를 예수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했고 또 예수는 단지 신의 아들이 아닌 인간의 아들일 뿐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혼란스러워하고 있고 그리고 기독교를 말살시키겠다고 하는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서 적극적으로 반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점일 것입니다. 

과연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분인가? 그리고 그 예수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예수가 인간의 아들인건 분명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건 그 누구도 지금까지 자기가 신이라고 하거나 신의 아들이라고는 했어도 나는 사람의 아들이요 동시에 신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세계 역사 가운데 변함없이 이단들에 의해서 제기되어 왔던 바요 수없이 많은 역사적인 논증들을 통해서 이미 다 끝난 이야기들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에 대한 반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는 단지 인간이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는 인간이 아닌 처음부터 신이었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을 인자 그러니까 사람의 아들이라고 즐겨 표현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의 몸으로가 아니고서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동시에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의 몸으로 오셔야 했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하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죄 가운데 태어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라야만 죄값을 대신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아무 죄도 없으신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속박 죄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풀어내어 자유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더 이상 죄의 굴레에 매이지 않고 이제는 영원히 자유한 사람이요 하늘나라 백성이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복음 즉 good news입니다. 오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먼저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메시야와 같은 뜻입니다. 즉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구약 시대 때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에게 기름을 부어 세웁니다. 메시야는 이 세 가지 역할을 다 하는 분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도록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허락을 받아 나와서 용서를 선포하며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저들을 왕으로서 다스립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줍니다. 그분이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물을 드리되 죄 없으신 자신을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의 굴레, 죄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용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은 단지 그것을 믿는 것뿐입니다. 값없이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셨기에 은혜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그 값을 받으셨지만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값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러주신 이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속히 떠나더라고 하니까 우리가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돌아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려도 떠나기는 아주 쉽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도 우리가 경험하거니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도록 만드는 세상의 유혹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워도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고 떠나고 내가 원하고 구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떠나고 사람에게 시험 들어서 떠나고 “뭐 교회 다녀야만 하늘나라 가나 천만에!” 그러면서 떠나고 예수를 믿어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주장일 뿐 사실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다고 하면서 떠납니다. 

누구는 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이쪽으로 가라고 하셨다고 하면서 떠납니다. 그 반대로 내가 죽거들랑 너희는 반드시 교회에 나가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지키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교회를 떠나도록 하는 유언은 왜 또 그렇게들 잘 지키는지요? 그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길에 서지 못하도록 만드는 배후의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시험하는 자가 있단 말입니다. 뭐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프로그램도 그러한 의도로 제작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는 신학자라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할 정도니까 세상 사람들은 역시 그래 하는 것이겠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또 그렇구나 그럼 꼭 교회에 다닐 필요만은 없겠구나 하고 또 떠나갑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그러니까 예수 외에 구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고백하기를 예수 외에 우리에게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줄기차게 주장들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고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엇이 다른 것이 또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다른 복음 그러니까 거짓된 진리를 우리들 앞에 전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우리를 흔들어 놓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그러니까 바르게 믿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말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또 디도서 3장 5절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관한 한 분명한 것은 오직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데 있어서 나의 공로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우리는 마음 속 깊이 새기고 감사하며 예수 안의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저주 밖에는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은 처음에 바울 자신이 다른 복음을 전하던 자였습니다. 예수 밖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없다고 하는 주장을 사울은 반박했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왜요? 그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눈으로 보고 귀로 그 주시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울은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바른 길로 들어와서 생각해보니 참으로 자기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의 자기처럼 예수는 가짜다 구원의 길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를 믿기는 믿되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만이 구세주요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이 진리는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건 믿음 안의 형제 자매들을 흔들어 놓아 믿음에서 떠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런 자는 저주 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고 하더라고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들이야 말로 해 무엇하겠습니까? 아니 아무도 저주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건 너무 한 것 아니냐고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들을 바울처럼 저주하지 않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고 전함으로 우리 믿음 안의 형제 자매들을 흔들어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의 결국은 저주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진노의 심판 아래 그들을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다른 소리가 들린다고 해도 거기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를 떠나지 말고 주님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주님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안아주시고 등을 두드려 주시면서 다시 힘을 내서 해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없으십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 천국 백성이 되는 길은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요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을 주님께서 또한 붙들어 주십니다. 이 주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도 좋고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구원받는 사람이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 모두가 기뻐하며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 또한 함께 사랑을 나누며 기뻐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 또한 그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받아 누리게 되니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 역시 그로 말미암아 순금과 같이 나오게 되니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 역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이 우리 앞에 있을 때는 전혀 다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를 어떻게 축복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누가 우리를 핍박한다고 해도 그 사람을 위해서 복을 빌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어찌 복을 빌어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물론 저런 사람도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복된 인생으로 바뀔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는 결코 축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그들을 저주까지 했겠습니까? 그것은 단순한 저주라기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마땅히 받을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보고 박수를 합니다. 예수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신학자를 보고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그거 봐라 신학자도 그러는데 예수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더라. 나도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그건 너희가 너무 민감하게 너무 편협하게 반응하기 때문이야. 오히려 자기 말만 하는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서 몰아내 버려야 돼.”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그 말을 듣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건 사람이나 박수치지 하나님은 그 사람을 향해 진노의 채찍을 드실 것입니다. 

결국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들은 기뻐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아닙니다. 멸망당할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그것이 좋겠죠. 하지만 하나님께도 좋은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하지만 자기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그것은 자기는 결코 다른 복음을 전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본 예수가 아니라 내가 깨달은 예수를 그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양보하고 싶어도 양보할 수 없는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진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 죄를 지고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영원한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결코 예수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예수만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더욱 예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만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복된 인생들 다 되시기를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우리도 기쁨과 더불어 하늘 상급을 받아 누리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흥분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속이는 자가 많이 있다고 해도 그로 인한 핍박의 소용돌이가 몰아친다고 해도 두려워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에베소서 6장 12절은 말씀합니다. 이 선한 싸움을 우리는 지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한 생명이 주님 앞에 있게 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구원 얻은 생명도 그를 주님 앞으로 인도한 우리도 다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요 그것이 바로 참으로 하나님도 좋게 하고 우리 모두도 좋은 그런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오늘도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 예수님만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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