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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쁨과 슬픔 사이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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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슬픔 사이 (빌 4:4~7)


이 시간 우리는 실의에 빠진 한 남자를 만나 보고자 합니다. 그는 몹시 화가 난 모습으로 친구들 앞에서 나오는 대로 가슴의 불만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헛 살아온 것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과 달리 매우 훌륭한 사람입니다. 부잣집 맏아들에 성실하고, 책임감도 강합니다. 자신이야말로 집을 지키고 세워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럴만한 능력도 있다고 믿는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말씀에 순종했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런 그를 마을 사람들도 칭찬했고, 아버지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심각한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기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칭찬하는데도, 자신이 보아도 부족함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기쁘지 않았습니다. 늘 권태롭고 짜증이 났습니다. 때로는 열심히 집안을 돌보고 일을 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로는 집을 뛰쳐나가 어디론가 훨훨 가고 싶기도 했습니다. 어처구니없게 동생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가끔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내가 왜 그 형편없는 녀석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동생은 몇 해 전 자기 앞으로 돌아올 재산을 미리 달라고 아버지에게 떼를 써서 그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떠난 동생은 소식 한 장이 없었습니다. 

동생이 집을 떠날 때 그는 덤덤했습니다. 본래부터 동생은 안정감이 없었고, 하는 짓이 모두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사고를 칠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동생이 한심한 생각이 들수록 자신이 더 훌륭해 보였고, 책임감도 더 느꼈습니다. <제깐 녀석이 그러면 그렇지. 그 녀석은 어려서부터 늘 그랬어. 그러나 난 달라. 난 맏아들이야. 난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는 자신을 아버지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세우길 원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집안을 지키고 아버지를 계승할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버지, 동생 녀석은 잊으세요. 그 녀석은 희망이 없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늘 이렇게 말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그가 기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도 가끔은 집을 뛰쳐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기 안에도 동생 같은 탕자가 들어 있음을 알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안 중에서도 그는 애써 웃음을 지으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태도는 아버지를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밭에서 돌아오던 그는 떠들썩한 집안 분위기와 풍악 소리에 놀랐습니다. 종을 불러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잔치라도 하는 모양인데...> 그러자 종이 말했습니다. <작은 도련님이 돌아오셔서 어르신이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동안 쌓인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 녀석이 무슨 염치로 집에 돌아온단 말인가? 못된 짓 하느라고 재산만 날려버린 그 녀석이 돌아오다니....> 

그리고 정말 화가 난 것은아버지의 태도였습니다. 종의 말을 들어보니 아버지는 그 녀석을 무슨 금의환향하는 영웅이라도 맞이하는 태도로 끌어안았고, 입을 맞추고,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 당장 때려 쫓아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잔치까지 열다니.....> 

그는 마음이 불편해서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쫓아 나오셨습니다. 그리곤 어서 빨리 들어와서 동생을 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슴에 있는 말을 쏟아 놓았습니다. <정말 너무 하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수고했는데,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는데, 아버지 재산을 다 날려버린 그런 망나니가 왔는데, 이토록 환대를 하시다니, 정말 너무 하십니다> 아버지는 말씀했습니다. <얘, 화를 풀어라.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고, 이 집의 모든 재산은 다 네 것이 아니냐?> 그러나 아버지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동생 녀석과 마지못해 인사는 나누었지만, 매사가 귀찮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동생이 미웠을 것입니다. 

여러분, 흠 없는 모범생인데, 기쁨이 없는 한 불쌍한 남자, 제가 무슨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있는지 다 아시지요? 지금 저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중에서 맏아들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쁨 없이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때로는 기쁨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있지만, 사실은 기쁨이 아니라 일시적 쾌락인 경우가 많습니다. 일시적 쾌락은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황이 바뀌면 금방 사라집니다. 그러나 기쁨은 상황이 바뀌어도 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쾌락은 있는데, 기쁨은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범생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늘 자신에 대해 철저합니다. 맡은 책임을 잘 감당합니다. 예배며, 봉사를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기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기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늘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마치 1등을 했는데도 기뻐하지 않는 학생과 같습니다. 그는 1등을 한 것을 기뻐할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음 번에 2등으로 떨어질까 염려합니다. 늘 눌리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약해지지 말자. 내가 누구냐? 잘 해야 돼. 자 힘 내!> 그런데 이렇게 다짐할수록 그의 얼굴을 찡그려집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 철저한 만큼 남에게도 철저합니다. 잘못하는 사람들을 도저히 받아주지 못합니다. 마치 비유 속의 형이 동생을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 동생 같은 사람을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아버지 같은 사람들에게도 불만이 많습니다. <사랑도 다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거야. 저건 사랑의 낭비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 생활을 하면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맏아들 이야기를 좀 더 해 봅시다. 그렇게 몇 일이 지난 후 그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동생은 일찍부터 밭에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이건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전에 그 녀석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뒹굴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딴 사람이 되었는지 날마다 일찍 밭에 나왔습니다. 그는 동생의 태도를 보고 놀랐습니다.

게다가 일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닙니다. <몇 일 저러다 말겠지>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진심인 것 같았습니다. 늘 감격스러워하고, 때로는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그리고 정말 날마다 기뻐하는 것 같았습니다. 형님에게 철든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형님, 이제 이 모든 재산은 형님 몫입니다. 제가 형님 몫이 탐이 나서 일하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절 받아주셔서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동생은 얼굴이 훤했습니다. 

맏아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무일푼인 동생은 기쁜데, 모든 것을 다 가진 나는 기쁘지 않다니...> 자신은 다 가졌으나 못 가진 것처럼 슬프고, 동생은 아무 것도 없으나 다 가진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 후로 두 형제는 모두 아버지 일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기쁘게 일하고, 한 사람은 슬프게 일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예배를 드리는데, 한 사람은 기쁘게 예배하고, 한 사람은 슬프고 괴로워하면서 예배합니다. 한 사람은 기쁨에 넘쳐서 교회에 오고, 한 사람은 교회 오는 게 힘이 듭니다. 겉으로 보면 똑같이 예배하고, 섬기고, 봉사하는데, 그 내면은 다릅니다. 

<기쁨 없는 기독교>는 심각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려 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을 보세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기독교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 기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말씀하길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기쁨은 감옥도 빼앗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상태만 다른 게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결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그런 상태에 대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0-41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한 사람은 기쁘게 섬기다가 부름을 받고, 한 사람은 슬프게 섬기다가 버림을 받습니다. 이게 바로 기쁨과 슬픔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오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이런 차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엄한 분이시다. 잘못하면 가만 두지 않으신다. 동생 녀석은 이제 끝났다. 다신 이 집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오해했습니다. 아버지는 정죄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우는 분이었습니다. 돌아오길 기다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아들을 받아주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오해를 했던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너무도 무섭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늘 종아리를 때릴 채찍을 들고 다니는 감시자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큰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늘 위축되어 있었고, 힘들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열심이냐?>고 물으면 <그래야 하니까 나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일 나니까 나간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 그에게는 기쁨이라곤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엔 달라졌습니다. 누가 <왜 나가는가?>라고 물으면 <너무 기뻐서, 너무 감사해서........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너무 즐거워서>라고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달라진 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채찍 보다 더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과 <은혜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은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었지만,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셨음을 압니다. 그래서 늘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은혜를 알면 기쁨이 넘칩니다. 사랑을 받음녀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기쁨도 모릅니다. 늘 자신이 노력해서 하나님 앞에 칭찬 받으려 합니다. 이런 사람을 <율법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늘 <하나님, 저 잘했지요? 칭찬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잘 하지 못한 날은 하나님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합니다. 비유 속의 맏아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실망하셨죠? 죄송해요. 오늘도 하느라고 했는데, 제대로 못했네요. 잘 봐주세요. 제게 힘을 더 주세요. 지혜도 주세요. 그러면 내일은 더 멋지게 하겠습니다. 하나님, 저 좀 안아 주세요> 그러면서 하나님 품으로 달려듭니다. 이게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맏아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그런 동생을 따스하게 받아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맏아들은 아버지 품으로 달려들어 안기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는 늘 아버지에게 성숙한 사람으로 잘 보이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게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완벽하게 노력해도, 성숙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써도, 그는 아버지 앞에서는 벌거벗은 아들일 뿐입니다. 그도 아버지 앞에서 기저귀를 찬 적이 있고, 똥을 싼 적이 있습니다. 그도 아버지 앞에서 핏덩이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걸 모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 앞에서는 언제까지나 어린 아기일 수밖에 없음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직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에서 그는 언제나 어린아이입니다. 아버지는 늘 그가 달려와 <아빠> 하면서 안기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발치에서 아버지 눈치만 살피는 맏아들을 더 안타까워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완벽주의자가 되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요? 왜 쓰러지기 직전까지 완벽한 척 하느라고 애를 씁니까? 왜 아버지 품에 안기지 못합니까? <아버지, 저 아버지 품이 그리워요. 날 받아주세요>라고 못할까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분 앞에서 언제까지나 연약한 아이입니다. 그 앞에서 어른인 척 하지 마십시오. 버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넓은 품에 무너지듯 안기십시오. 그 품의 따스함을 맛보십시오. 그 품에서 우십시오. 그 품의 위로를 받으십시오.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자격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앞에서 한없는 평안을 누리십시오. 

비유 속에서 동생은 바로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은혜, 그 품의 따스한 사랑을 압니다. 그래서 기쁩니다. 그러나 형은 아직 모릅니다. 이제 맏아들도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까지는 그는 그 집의 품꾼이나 마찬가지일 뿐, 아직 아들은 아닙니다. 아들과 품꾼은 다릅니다. 품꾼은 일 잘하고 칭찬 받고, 아들은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받습니다. 품꾼으로 하나님을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로 그 앞에 서시길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날 안아주세요>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가 중병에 걸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오라비를 고쳐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1장 3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여러분, 잘 보세요.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으니 고쳐 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으니 고쳐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나는 주님을 충분히 사랑하기 때문에, 이 정도의 기도는 드릴 자격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희망메시지>란 책에서 말하기를 <기도의 힘은 기도하는 자가 아닌 기도를 들으시는 분께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 6-7절을 보세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할 문제가 있으십니까? 당당하게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수 있음을 감사하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그 평강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자격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게 아님을 잊지 말고, 기쁨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으로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씀은 그 품에서 위로받고, 은혜를 입은 후에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고맙습니다. 이제부터 기쁨으로 아버지를 섬기겠습니다>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그 후의 모든 예배, 모든 섬김이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기쁨의 일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가식적 일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진실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요셉 님의 <요셉 일기>란 책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사우가는 영하 30도의 추운 날씨에 매일 40분 이상 걸어서 새벽기도회를 나온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든 길을 걸어서 새벽기도를 나오느냐고 사우가에게 물었다. 그가 말했다 “왜냐하면 주님을 너무 사랑하고 날마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이에요. 마음에 감사가 떠나지를 않아 찬양하고 걸어오면 교회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아요”>

우리의 섬김과 예배가 그러해야 합니다. 교회 생활은 자칭 우등생들의 자축 파티가 아닙니다. 낙제생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받아주신 은혜에 기뻐하는 사람들의 파티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쁨에 겨워 살게 될 것입니다. 기쁨의 신앙, 우리 신앙이 그렇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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