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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가 걸어야 하는 길 (요 2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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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걸어야 하는 길 (요 21:18~23)


오늘의 본문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결론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저자가 꼭 말하고 싶은, 꼭 남기고 싶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소홀히 다룰 수가 없다. 더구나 이 본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의 말씀과 다름이 없기에 구절 하나하나에 보다 주의를 기울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를 보면 저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기록해놓고 있는데, 특히 요한복음과 다른 복음서를 비교해보면 서로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의 결론을 ‘부활의 증인’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도’라는 차원에다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공통적으로 주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 부활의 증인이 되어 달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천하만국을 다니며 내 부활의 증인이 되어다오. 어디로 가든 이 소식을 전하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진 후라야 내가 다시 오리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친히 당부하신다. 

그러나 본문을 살펴보면 ‘전하라’는 말씀 대신에‘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최종적으로 남기고 있다. 이는 우리가 이 땅에서 실천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제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제자를 부르는 일을 하신다. 그들을 택하실 때 첫 번째 하셨던 말씀이 ‘나를 따르라’였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 마지막 지상의 사역을 정리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가시면서 ‘너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남기고 있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이 ‘따르라’는 명령에서 시작이 되고 그 끝이 ‘따르라’는 명령에서 끝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한마디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걸어가는 길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며 제자의 사명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른 선택을 하라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걸어야 하는 길이란 과연 어떤 길인가? 과연 어떠한 삶을 실천해야 하는 것일까? ‘너는 나를 따르라’는 이 명령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선택 그 자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명령을 듣는 자는 누구나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 명령을 따라갈 수도 있고 따라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그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고 중단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제자로 성공하느냐, 아니면 제자로 실패하느냐는 것은 이 두 선택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요구받게 된다. 이 세상에서 진정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일이란 그리 쉽지가 않다. 주님의 제자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손해를 봐야할 때도 있고, 때로는 핍박을 겪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런 줄을 뻔히 알면서도 주님이 원하시는 쪽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을 인정할 것이냐.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할 것이냐, 아니면 그저 세상의 자랑을 쫓아갈 것이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내 뜻을 고집할 것이냐.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냐, 아니면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이냐.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할 것이냐. 거짓된 가치를 따를 것이냐, 아니면 진정한 하나님의 가치를 쫓을 것인가. 믿음을 택할 것인가, 불신을 택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도의 삶이란 바로 선택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요구 앞에서 진정 주님을 위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도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선택 앞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림으로 제자의 길에서 이탈하기도 하고 영영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기독교 문서 가운데 1세기경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서가 있다. ‘열 두 사도의 교훈’이라는 문서를 보면 이런 글이 기록이 되어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그것은 선택 여하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바로 무엇을 택하느냐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순간순간의 선택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있으며 그 동기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고아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조지 뮬러라는 유명한 분이 있다. 오만 번의 기도를 응답받았다는 전무후무한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 분이 말년에 제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당신은 이 거룩한 사업을 훌륭하게 해 오셨는데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비결이 있으면 우리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이에 대해 그가 이런 대답을 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이요, 내가 가장 바라고 소원하는 것은 바로 오직 하나, 하나님의 칭찬이다. 하나님의 칭찬 듣는 일을 위해서 늘 최선의 선택을 기울이고, 주님이 책망하실만한 것에 대해서 스스로 조심하다보니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해 주셨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나의 삶이 변화되고 인생의 방향이 전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지금까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하나의 비결이 있다면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기 위해 힘썼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기 원하는가? 때로는 주님을 전심으로 따르고 싶어도 주위 환경이 여의치 않아 핑계를 대고 물러설 때가 있다. 제자로 걸어가는 삶이란 바로 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칭찬하실 만한, 영광을 받으실 만한 그런 선택을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요구 앞에서 늘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

‘너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바로 고난의 길임을 증거하고 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베드로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될 것인가를 예언적으로 선고하신다. 1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최후를 마칠 것인가를 예고하는 중요한 구절이기도 한다. 젊었을 때는 자기 마음대로, 다니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니며 제 욕심만을 채우려 할지라도 마지막에는 남이 너를 이끌어다가 네 팔을 벌리고 띠를 띠우고 원치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남이 네 팔을 벌리겠다는 말씀은 바로 십자가를 지게 하기 위해서 바로 팔을 벌리고 그 벌린 팔에 못을 박는 행동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남이 누구냐고 했을 때 어느 신학자는 ‘네로 황제나 사형집행인을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의 팔을 벌리게 하는 당사자가 사형집행인이든 네로 황제든 그 누구든 제자의 길에는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함께 따라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왜 제자의 길에서 실패하는지 아는가? 왜 돌아서는지 아는가? 왜 가다가 낙심하고 절망하고 딴 길로 나가는지 아는가? 주님을 따르면, 주님의 제자가 되면 늘 행복한 일만 생길 것으로 생각하고 성공만 주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형통하게 모든 일이 풀릴 것만 생각하고 따르다가 환난을 겪고, 시련을 겪고 어려움에 처해지다보면 ‘이것이 아니구나 해서 내가 길을 잘못 들었구나 과연 이대로 가도 좋은가’하는 회의가 들면서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제자의 길이 결코 행복한 길만은 아님을 말씀하고 있다. 

많은 신앙인들은 기복신앙에 젖어서 예수만 믿으면 다 잘되고 출세하고 인기를 얻고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이 다 잘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진리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반쪽에 불과하다. 나머지 반쪽은 무엇인가? 그 이면에 주님을 위해서 받아야 할 고난과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 고난을 생각지 않고 제자의 길에 들어섰다가 뜻하지 않은 고난으로 인해 이내 실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국 교회가 괄목할 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아는가? 왜 이 교회가 사회의 근심거리가 되고 걱정거리가 되는지 아는가? 우리 신앙인들의 삶의 핵심 속에 십자가라는 중요한 메시지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 없다. 불행을 반기는 자도 없다. 손해를 좋아라하고 그것을 즐겨 찾는 자도 없다. 모두가 하나같이 그것만은 피해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불신자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믿는 자들마저 똑같이 행동하고 만다면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불행과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의 안일과 편안만을 구하며 교회 안으로 숨어 들어간다면 누가 교회에다 자신의 미래를 맡기겠는가? 

기독교의 십자가야말로 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요, 이 세상의 죄악을 몰아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들어있는 것이다. 제자의 길에는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 우리가 겪어야할 숱한 수난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아무런 고난도 받고 있지 않다면 뭔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이상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제자의 길에는 마땅히 고난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십자가의 고난을 달게 지고 주님이 우리에게 정해놓으신 제자의 길을 걸어갈 때에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주실 것이다.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예고가 있고 나서 그 죽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19절 말씀을 보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베드로의 죽음이 결코 헛되거나 무가치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죽음을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이다. 사람들은 고난이나 죽음을 결코 축복이나 영광으로 생각지 않는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가장 비극적인 불행으로 여기기 일쑤이다. 죽음이 죽음일 뿐이지 어떻게 영광이 될 수 있느냐 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약속해주신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도 먼 훗날 축복으로 돌려주신다는 것이다, 비록 제자의 길이 험난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뒤에 나타날 주님의 영광이 우리가 받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이 명령문은 세 단어로 되어 있다. ‘너는’과 ‘나를’그리고 ‘따르라’이다. 따라야 할 주체가 바로 나라는 것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따라야할 주체가 나라는 것을 깨닫기는커녕 남들을 쳐다볼 때가 많이 있다. 우리가 주님께서 분부하신 제자의 길을 제대로 걸어가지 못하는 분명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기 전에 늘 남의 일에 참견하려는 잘못된 습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네 미래가 이렇게 전개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듣자마자 따라오는 사도 요한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보통 사람 같으면 ‘네가 이런저런 고난을 겪다가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결말이 나리라’는 예언을 듣자마자 겁이 나서라도 ‘이것을 내가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걱정하는 것이 정상일텐데, 베드로는 어찌된 셈인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 그의 관심사는 온통 ‘나는 그렇게 죽는다 치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쏠려있다. 주님은 한마디로 그의 질문을 가로 막으신다. “내가 그를 다시 올 때까지 살려둔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무슨 말씀인가?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네 일이나 똑바로 하라는 것이다. 남의 일에 신경 쓰다가 정작 네가 해야 할 임무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정신 차리라는 뜻이다. 알고 보면 그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의 문제일 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해결을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처리할 문제지, 제 삼자가 그 사이에 뛰어들어서 해결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해결해준다고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남의 일을 넘보기 이전에 자기의 일부터 잘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생각지도 않고 남의 발등에 붙은 불만 쫓아다녀서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없다. 이는 남에게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남의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만 중요하니 나만 돌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남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도 중요하긴 하나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뛰어들기만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신앙이 자라지 않는 이유가 있다. 항상 남과 비교해서 잘못된 기준에 맞추려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저 사람은 안 하는데, 저 사람은 하는데’라고 떠들어대면서 이중 잣대를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사람도 안 하는데, 내가 굳이 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저 사람 혼자 알아서 다 하는데 내가 굳이 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라는 생각으로 자꾸 수준을 낮추다보니 결국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남이 헌금을 얼마나 하느냐 신경 쓰지 마세요. 자신이 할 도리만 잘하면 그만이에요. 남이 예배에 잘 참석하느냐, 못하느냐 참견하지 마시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냐, 정직하냐, 하나님 앞에서 제자의 길을 바로 걷고 있느냐를 먼저 점검해 보세요. 남이야 팥으로 메주를 쓰건 말건, 밥을 손으로 먹든 발로 먹든 상관하지 마시고 나 자신부터 고칠 것을 고치고, 버릴 것을 버리고, 늘 하나님 앞에서 바른 제자의 삶을 살도록 힘쓰세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는 쳐다볼 필요가 없다. 자꾸 그것만 신경을 쓰다보면 시험에 들고 실망하게 된다. 전도를 해보면 가끔씩 이런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모태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서 화려한 신앙전력을 자랑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어려서부터 학생회장도 하고, 교회생활도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발길을 끊은지 오래되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하는 말이 뭔지 아는가? 교회에 대해서 실망했다는 것이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그 모양 그 꼴이냐는 것이다. 남들이 잘못하는 것만 보고 실망한 나머지 자신의 신앙까지도 팔아먹어 버리는 것이다. 남들이 어떻게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서 있느냐, 어떤 제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은 아무나 가리키면서 무작위로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서 ‘너는 지금 나를 따르고 있느냐? 너는 지금 바른 제자의 삶을 살고 있느냐?’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늘 진실하게 ‘네. 제가 주님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대답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를 찾아오셔서‘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따라야 할 대상이 오직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따르고 있다. 무언가를 쫓아서 살아가고 있다. 돈을 따르기도 하고 물질을 쫓기도 하고 명예를 추구하기도 하고 인기를 따라 부나비처럼 날라 다니기도 한다. 무언가를 따라서 살아야만 이 세상에서 생존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따르고 있든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성공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 세상의 것을 원하는 만큼 다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언제나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간다면, 늘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이 시간 베드로를 부르셨던 그 음성으로 우리 각자를 향해 명령하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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