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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그토록 아까운가? (욘 4:5~11) - 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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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토록 아까운가? (욘 4:5~11)


미국 동부지역으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던 교포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맨손으로 건너가 열심히 일한 결과, 어렵사리 성공의 기틀을 잡는다. 돈도 좀 벌고 여유도 생기자 평소에 원하던 승용차 한대를 구입하기로 계획을 세운 것이다. 마침 포드(Ford)에서 출시된 멋진 신형 자동차가 있어서 난생 처음 거금을 들여 장만을 한 것이다. 자기의 소유라는 사실이 어찌나 기쁘고 뿌듯한지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올 정도였단다. 

더구나 미국 땅에 와서 고생하여 마련한 재산 1호이다 보니 남다른 애정이 느껴진 것이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출근할 때도 차에 뽀뽀하고 타고, 내릴 때도 뽀뽀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때가 묻고 먼지가 앉을 새라 닦고 씻고 광을 내는 등, 철저히 관리를 했다. 친자식인들 그렇게 아끼겠느냐는 주위의 핀잔도 있었으나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실은 대로 할 뿐이었다. 아내한테는 ‘잘 갔다 오겠다’는 안부인사 한마디 없어도 자동차만은 예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멀리 출장을 간 사이 집 안에 급한 일이 생긴 것이다. 그 바람에 부득불 아내가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게 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음이 급한 나머지 속력을 내다가 앞차가 급정거하는 것을 미처 피하지 못해 추돌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범퍼가 깨지고 후드가 찌그러지면서 차체가 볼품없이 망가지고 말았다. 사람이 크게 다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지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일을 수습하려고 한다. 그러나 차주가 남편의 이름으로 되어있는지라 사건의 전말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막상 연락을 하자니 성질을 부리고 욕설을 퍼붓는 남편의 얼굴이 떠올라 전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기 분신처럼 알뜰살뜰 보살피던 차를 엉망으로 만들어놨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 마음이 오죽 했겠는가. ‘이제 큰일 났다. 난 죽었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어 긴급통화를 시도한다. 신호가 가는 짧은 시간에도 여러 상념이 자신을 괴롭힌다. 

드디어 전화선을 타고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만저만 해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말을 전하자 대뜸 남편이 말을 받는다. 아니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의외로 부드럽기 이를 데가 없다. “자기야, 어디 안 다쳤어? 부러진 데 없지. 다 괜찮은 거야? 조금이라도 불편한 곳 있으면 말해. 그래 안 다친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네. 차야 우그러들었으면 수리하면 되고 정 안되면 다른 차로 바꾸지 뭐.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어디가 결리거나 아프면 즉시 병원으로 가서 검사해봐. 알았지? 자기, 사랑해.”라고 전화를 끊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이 남자 말하는 꼬락서니가 가관이다. 사고가 났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를 벌컥 내면서 소리를 지른다. '그래, 차는 어찌 됐노. 얼마나 망가졌단 말이가? 그러게 내가 뭐라 켔나. 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나.‘ 아니나 다를까 은연중에 아내의 안위보다는 차를 더 걱정하는 속마음을 내비치고 만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아내, 마음 한 구석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그동안 속아 지내왔다는 배신감이 들면서 정나미가 떨어진 것이다. ’아니 이 남자가 아무리 차를 좋아해도 유분수지 자기 아내보다 먼저 차의 안부를 물을 수가 있어. 도대체 말이나 되는 거야? 저런 속물인지도 모르고 한 평생 살아온 내가 바보지. 도무지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구먼. 어디 돌아오기만 해봐라. 내가 그냥 놔두나.‘ 그 후 대판 부부싸움을 벌이고 서류에 도장을 찍네 마네 하다가 결국 갈라섰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려면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고 아껴야하는지를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면 무엇을 아끼고 사랑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되고 행동과 판단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며,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아끼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삶의 만족과 보람을 어디서 얻는가? 자기가 아끼는 것이 충족될 때가 아닌가. 그것이 자기의 삶에 유익을 가져다주면 줄수록 만족감과 행복감은 더욱 증대될 것이다. 

본문에 보면 요나가 아끼는 것과 하나님이 아끼는 것의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나가 아끼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의 얼굴을 그늘지게 만들어 시원하게 해주는 박 넝쿨이다. 하룻밤 났다가 하룻밤에 사라지는 박 넝쿨에 자신의 삶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행여나 날라 가지는 않을까, 없어지지는 않을까 라는 염려와 불안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반면에 하나님이 아끼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의 결론이랄 수 있는 마지막 절에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힌다. 박 넝쿨이나 요나 한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니느웨 성에 거주하고 있는, 무려 12여만 명에 가까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그 무엇보다도 그들에 대해 깊은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누군가 우리에게 ‘가장 아끼는 것 한 가지를 얘기하라’고 한다면 과연 무엇을 제시하려는가? 돈인가? 권력인가? 명예인가? 아니면 주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영혼들인가? 사람은 무엇을 아끼느냐에 따라 온힘을 다해 그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행여나 없어지지나 않을까 최대한 보살피고 아끼고 지키려고 애쓴다. 우리의 생명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있는가? 우리가 아끼는 것이 기껏해야 요나가 아꼈던 박 넝쿨과 같이 유한하고 시시한 것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면 우리가 아끼는 것이 아무리 대단하고 훌륭하더라도 일시적인 만족과 기쁨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넝쿨을 아까워하는 것은 요나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모르긴 해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미 다양한 종류의 박 넝쿨들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이미 무성하게 자라 우리가 원하는 안식과 기쁨을 제공해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사라지면 마치 내 존재가 없어지는 것처럼 슬퍼하고 거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쫓아간다. 당신은 하나님의 가치와 인간의 가치, 영적인 가치와 세속적인 가치가 충돌할 때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하고 있는가. 

우리는 많은 경우에 보이지 않는 가치, 내면의 가치, 영적인 가치보다는 우선적으로 보이는 가치, 외적인 가치,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고 열정을 쏟는다. 요나는 하나님이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자신이 아끼는 그것만을 사수하면 그만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하나님이 아끼는 것이 무엇인가를 만분의 일이라도 깨달았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결코 두고 보자는 식의 방관자적인 입장이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로 뛰어들었으리라. 적어도 자포자기하는 무기력한 모습만은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는 니느웨 전체가 구원받았다고 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왕이 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주님과는 니느웨를 보는 관점이 백팔십도 달랐기 때문이다. 주님의 마음이 무엇이며 주님이 진정 아끼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했더라면 니느웨 성이 회개하자마자 즉시 달려가지 않았을까. 갓 믿기 시작한 그들을 성숙한 일꾼으로 양육하기 위해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를 세우고 기도하는 일에 전심전력 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도 아니면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에 이렇게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다면 다른 곳이라고 차이가 있겠는가?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이 죽어가는 영혼들이라면 니느웨가 아니라 그 어디라도 찾아가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이 보다 더 큰 부흥도 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믿음을 가지고 세계선교를 위해 헌신해야 옳았으리라. 

그러나 참으로 애석하게도 하나님이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기에 니느웨의 구원을 바라보고만 있었으며 위대한 사역을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는 자기가 아끼는 것을 아끼려던 나머지 아끼는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진짜 아껴야 할 것들마저 송두리째 상실하고만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아끼는 것을 조금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에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본문 5절에 보면 요나가 얼마나 이기적으로 행동하는가를 알 수 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지었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 발을 뻗고 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라. 그가 마음만 먹었으면 니느웨 성안에 자신 하나 거할 곳이 없었겠는가?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듣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은혜 받고 구원받았는데 정녕 가만히 있었을까. 너무도 감격스럽고 기뻐서라도 너도 나도 요나를 초청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니느웨 왕도 목석처럼 가만히 있지는 않았으리라. 오히려 백성들이 악을 버리고 변화를 받아 구원을 얻었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요나를 불러다가 감사의 예를 표하고 칙사vip 대접을 극진히 했으리라.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 심장부로 들어가는 대신에 성밖으로 나가 성이 어떻게 되는가를 구경꾼 입장에서 바라볼 뿐이다. 자기가 아끼는 것이 그것이 아니었기에 다른 것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아끼는 것을 위해 이기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사람의 시선이 자기를 향하게 되면 다른 것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게 된다. 왜냐면 보는 눈이 닫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만 보일 뿐, 세상이나 이웃은 물론 하나님조차 철저히 무관심으로 대한다. 판단이나 선택의 기준을 자신으로 삼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익이 돌아오지 않거나,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면 그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이 결국 자기만의 아성을 쌓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아끼는 것을 계속해서 지키려고 했었기에 니느웨 성의 변화 자체를 무시해버린다. 그가 정상적인 선지자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니느웨 성이 그렇게 부흥했다는데 과연 실제로 일어나긴 한 거야? 왕이 회개했다는데 진심이야 아니면 그런 척 시늉만 한 거야?’ 그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왕을 찾아가거나 군중 속으로 들어갔어야 할 것이다. 

니느웨 성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말고 주어진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더 헌신할 생각을 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니느웨 성이 구원받았다는 사실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왜냐면 자기가 아끼는 것에 대한 관심이 그 외에 모든 것을 단숨에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기주의에 빠지면 네 가지 질병에 걸린다고 한다. 

하나는 모든 것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질병이다. 무슨 일이든 자기 생각대로, 자기주장대로, 자기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다른 이들의 의견이나 주장을 전혀 용납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불같이 화를 내고 자기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냥 달아나버린다. 

두 번째는 지나친 우월의식에 사로잡히는 질병이다. 이기주의에 빠지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려고 한다. 자기만 존경받아야 하고, 자기만 칭찬 들어야 하고 자기만 높임을 받아야 한다. 자기 자랑이 지나쳐 다른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알고,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얕잡아보고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음악용어 가운데 ‘드럼 메이저drum major’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밴드 마스터’라는 말과 같이 쓰이는데, 악단이나 밴드의 단장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이 ‘드럼 메이저’가 되려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세우고 싶어 하는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변두리 밑바닥에서 멸시 천대를 받으며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모임에서든지 자기가 핵심역할을 해야 한다. 직장이나 교회에서도 자신이 중심에 우뚝 서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을 알아주기를 바랄 뿐, 그렇지 않으면 조금도 만족하지 않는다. 자기 우월의식에 사로잡히면 결국 교만과 독선으로 빠지고 만다. 셋째는 자아도취라는 질병이다. 다른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고 자신이 성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여긴다. 자기는 실패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실패하는 것은 예사로 생각한다. 매사 이런 식으로 성공과 실패를 논하기 때문에 남들의 지지나 협력을 얻지 못하고 늘 외톨이가 되어 살아간다. 

또 하나는 자기애self-love라는 것이다. 자기와 자기 일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 오직 내 가족, 내 직장, 내 일, 내 건강만이 최고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이나 아픔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기에 사로잡히면 요나처럼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없게 되며, 더군다나 그들의 구원을 외면하고 만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듯 다른 사람도 사랑하시고 악인도 받아주시고 원수까지도 용납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만 사랑받아야 한다는 아집에 붙들려 다른 이들을 쉽게 정죄하고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붓는다. 

요나는 극도의 이기심의 포로가 되어 하나님이 아끼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오히려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불평하고 성을 내면서 ‘이렇게 하실 바야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둬가라’고 건방지게 대들고 있다. 자기가 최고요, 제일 잘났으며, 가장 옳다고 자만하기 때문에 고의로 하나님을 무시해버린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본문에 보면 요나는 물질주의를 선호하는 나머지 세속가치만을 쫓아간다. 자기가 아끼는 것을 악착같이 지키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박 넝쿨 하나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박 넝쿨이라는 물질의 종이 되어 더 크고 위대한 가치를 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라는 엄청난 가치를 추구하는 대신에 순간 있다가 없어지는 박 넝쿨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아등바등 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이 물질주의를 꼭 돈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가 평소 누리고 싶어 하는 권력이나 명예나 세상의 인기도 그 속에 다 포함되어야 한다. 요나는 자신의 행복을 주어진 환경과 연결해서 생각하고 있다. 환경이 나쁘면 불행한 것이고 환경이 좋으면 행복한 것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린다. 이 물질주의에 빠진 자들이 오판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물질이 있으면 행복하고 없으면 불행하고, 권력이 있으면 행복하고 권력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것이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그렇게 발버둥치고 악을 쓰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그것을 쟁취하려고 머리가 터져라 경쟁하고 싸운다. 진정한 행복이 물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인 행복을 손에 쥐려고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환경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가정해보라.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환경에 따라서 지옥에도 가고, 천당에도 간다면 그 인생을 어찌 평안하다 할 수 있겠는가? 물질주의에는 두 가지 위험이 따른다. ‘벌레(7절)’와 ‘뜨거운 동풍(8절)’이라는 위험이다. 물질이라는 박 넝쿨에 벌레가 꼬이면서 하루아침에 푸른 잎들이 말라 죽는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사 그 잎사귀를 갉아 먹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님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박 넝쿨도 준비해주시지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불평하는 우리들을 경고하시려고 벌레와 사막의 열풍을 보내시기도 하신다. 

우리의 안전과 행복은 전적으로 주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정없이 물질을 씹어 먹고 돈을 씹어 먹고 권력을 씹어 먹는 이 벌레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질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하며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물질은 우리가 열심히 잘 챙기고 아껴야 할 것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최우선의 가치가 아님을 알아야 하며 그 안에는 반드시 벌레와 뿌리 채 말려버리는 뜨거운 동풍이 숨어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한계를 인식하고 지혜롭게 사용할 때 그 가치를 제대로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아끼는 것이 벌레와 동풍에 의해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다면 그처럼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요즘 권력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 사건의 내막을 어느 정도 보도를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거짓과 비리라는 벌레가 한번 갉아먹기 시작하면 명예나 권력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돈 좀 벌었다고 재세하고 자랑하고 으스대지 말라. 하나님께서 벌레로 씹어 먹게 하시고 동품으로 훅 불어버리면 그냥 사라지고 마는 것들이다. 다시 경고하지만 알거지 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주님은 박 넝쿨을 준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늘 속에서 편히 쉬게도 하시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을 때 벌레와 동풍에게 명하여 모든 것을 싹 쓸어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 우리가 아끼는 것을 가지고 사적인 기쁨이나 만족을 위하는 것은 금물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남김없이 사용되어야 한다. 

요나는 이 물질주의의 마지막이 무엇인가를 다 잃고 난 다음에야 절실히 깨닫는다. 바로 인생의 허무이다. 자기가 아끼는 것이 벌레와 동풍에 의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덧없는 삶을 노래한다. 그는 삶의 공허와 무의미를 견디다 못해 이렇게 외친다. “이런 세상 더 이상 살아서 뭐하는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우리가 언제 삶의 보람과 의미를 맛보았던가? 삶의 의미를 깨달을 때 비로소 보람이 느껴지고 기쁨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다 살고 나서 ‘아, 공허하다. 아무것도 없구나’하면 그때 가서 어떻게 하려는가? 이렇다 할 열매도 없이 그대로 인생을 마쳐야 되겠는가? 

리빙스턴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그가 아프리카 선교를 마무리하고 시체가 되어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의 심장은 자신이 선교하던 아프리카에 묻혔으나 시신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된다. 그의 장례 절차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를 존경하던 시민들이 구름떼처럼 그 역사의 현장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 때 군중들 틈에서 슬피 울며 탄식하는 한 노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리빙스턴의 친구 윌리엄이다. 

그는 리빙스턴이 젊은 시절, 세상적으로 출세가 보장되어 있던 화려한 길을 놔두고 아프리카 오지로 떠난다고 했을 때 ‘미쳤다, 멍청하다’라고 손가락질하며 놀려댔던 자이다. 그의 마지막 떠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군중을 응시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너는 아프리카에서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살았지만 그러나 너의 마지막은 이렇게 모든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마치는구나. 그에 비해서 나는 뭐냐? 그동안 열심히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긴 했지만 세상의 가치만을 추구하면서 살아왔기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구나. 이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운가?’ 얼마나 부자로 살았느냐, 얼마나 성공했느냐, 얼마나 출세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얼마나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의 인생을 다 살고 나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과 명예를 한 몸에 받는다면 이처럼 복된 삶이 어디 있으랴? 물질만을 추구하고, 이기적으로 살다가 하나님이 아끼는 것을 한 번도 아끼지 못한 채 불행하게 인생을 마치는 우리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아끼는 것을 내가 아끼고 그 아끼는 것을 이루어드리고자 힘쓸 때 주님의 놀라운 복이 임하리라.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끼는 것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다. 11절을 보라.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룻밤 있다가 사라지는 박 넝쿨을 네가 아꼈다면 내가 이 니느웨 성의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영혼들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내가 아끼는 것을 지키고 추구하려다가 허송세월하지 말고 하나님이 아끼는 것을 위해 일생을 헌신함으로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아끼는 것이 너무 많아 실패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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