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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렘 31: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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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렘 31:21~22)

 
역사적으로 선택받은 민족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잘못된 길을 빠질 때 큰 낭패와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과 맺은 언약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특권을 누렸습니다. 천하 만민 가운데서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제사장 나라로 삼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백성이 언약을 저버리고 우상숭배를 하는 등 이방인의 길로 갔기 때문에 무서운 징벌을 받으며 사멸될 위기에까지 몰렸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방황하는 백성에게 살길을 일러주었습니다. 본래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원점에서 살펴보고 어디서부터 고장이 났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교회가 본래의 길에서 이탈하게 되면 그 존재 목적을 상실하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 방황하는 시대

길을 잘못 들게 되면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사람이 삶의 목표인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그 인생길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1) 목표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자입니다. 범죄한 인간의 불행은 삶의 목표인 하나님을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는 결국 허무한 것에 굴복하며 엉뚱한 것에다 목을 매게 됩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여러 가지 형상으로 만든 우상에게 매달려 살았습니다(사 40:19). 현대인들은 인간의 지식이나 기술이나 문명의 종이 되어 거기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영원한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요한1서 2:17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궤도를 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8:15에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정해준 바른 길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궤도를 이탈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6:16에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3) 불확실한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방향이 확실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희망을 가지지 못합니다. 오늘날 인류는 고도화 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도 불안한 나날을 살아갑니다. 요즈음은 지구촌 전체가 자연 재난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정치적인 혼란이나 경제적인 불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념의 대립과 사회적인 갈등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구심점을 잃게 되고 성도들은 영적 공황상태에 빠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교회가 지켜내 온 진리파수와 경건운동이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2. 처음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베소교회에 처음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계시록 2:5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1) 예배와 헌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거룩한 민족”이라고 칭했습니다(신 7:6). 이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들의 사명을 논할 때 “제사장 나라”라는 말을 하였습니다(출 19:6). 이는 예배하는 백성임을 뜻합니다. 신약의 경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려야 된다고 하였습니다(롬 12:1). 이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적 사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드리는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4:24). 성도는 예배를 위해서 사는 자요,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되는 사람입니다.

2) 기도하는 일입니다.

흔히 기도를 신앙생활의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기도 역시 성도의 신앙에 가장 요긴한 도리입니다.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살전 5:17). 예수님께서도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당부 하셨습니다(눅 18:1).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강론하시면서 우리가 드릴 기도문의 요목을 정리해 주셨습니다(마 6:9-13). 또한 예수님 자신이 기도생활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눅 22:39-42).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기도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행 1:14). 거기에 성령이 충만하게 나타났습니다(행 2:1-4). 한국 교회 초기에도 기도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 기도의 능력이 한국의 복음화를 이루어냈고 수없는 박해도 이겨내게 하였습니다. 기도는 교회부흥의 원동력입니다(막 9:29).

3) 정성된 헌금입니다.

헌금의 기본 정신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답입니다. 고린도후서 9:15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제게 있는 전재산을 드려 감사하고 헌금하였습니다(행 2:45). 한국 교회의 초기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헌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십일조 생활에 철저하였고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나 선교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성전을 건축할 때는 재산을 바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경제가 어렵고 살기가 힘들수록 십일조와 헌물에 철저해야만 합니다(말 3:10-11). 이것은 물질의 축복을 거두기 위하여 씨를 뿌리는 행위라고 하였습니다(고후 9:6).  십일조와 연보에 자유로운 사람이 물질생활에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4) 적극적인 봉사생활입니다.

믿음은 말이나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증명됩니다(약 2:22). 산을 옮길만한 믿음과 방언을 하는 신비의 체험과 자기 몸을 불태울 수 있는 열심이 있어도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가 없으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3:1-3). 성도는 모름지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열심히 봉사하여야 됩니다. 디도서 2:14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봉사하며 섬기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께 보답하는 행위인 동시에 자기의 인생을 행복하고 윤택하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3. 여호와께로 향하는 삶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아는 사람에게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게 됩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온 탕자가 굶어 죽게 되는 비참한 지경에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첩경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눅 15:17-19).

1) 치유와 회복이 있습니다.

구약의 호세야는 이스라엘이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하고 백성이 극도의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그 치유와 해결의 방법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했습니다. 
호세아 6:1에“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도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1:5에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고 하였습니다. 18절에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게 됩니다.

호세아 6:2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하나님과 눈을 맞추며 사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할 때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민 6:25-26).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거기에 맞추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의 조명 아래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3) 신비로운 축복이 보장됩니다.

호세아 6:3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호세아의 메시지는 신앙의 원리를 이처럼 간단명료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인간 세계의 혼란과 방황은 본래의 길에서 떠난 데 원인이 있다고 보고, 거기에서 돌아오는 것만이 해답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레미야는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게 될 신비로운 축복의 약속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모세 때부터 예언된 메시야가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외양간에서 탄생하신 예수가 세상의 구주가 되고 구원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 예수의 문명이 오늘날 방황하는 인류에게 유일하고 확실한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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