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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상의 장터에 내놓은 기독교 (행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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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장터에 내놓은 기독교 (행 14:1~7)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닙니다. 사실 이 시대에 어느 국가든 특정 종교 국가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는 캐나다에도 살아봤고 미국에도 살아봤지만 그 어느 나라도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시대 세상 어느 나라도 자기 나라가 기독교 국가라고 주장하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고 기독교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핍박과 박해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고 그 가운데에서 믿음이 정금처럼 나온 신앙이기 때문에 오히려 환경이 편안하고 영광을 누릴 때는 타락한 전력이 있는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든 적든, 고위층에 기독교인들이 있든 없든 그것이 기독교의 진리라든가 교세라든가 능력을 반증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된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로였습니다. 또 윤보선 대통령이 장로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장로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였고 그 영부인 이희호 여사가 장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기독교인이고 장로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반사이익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익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누가 이익을 얻는다면 그 반대가 될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기독교를 업고 반사이익을 얻을 수는 있지만 기독교 신앙이 대통령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민족을 복음화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정치인으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고 권세로 말미암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고 했지, ‘너희가 세력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능이지 세력이 아닙니다. 돈으로 선교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힘으로 선교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정치인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을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신앙과 정치를 섞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나름대로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그 주변에 고위 각료층 중에 기독교인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국가 정책이 기독교 가치관을 반영하느냐?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경향이 많습니다. 

지금 이슬람권과의 충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은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규정하고 기독교가 이슬람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폐쇄적이고 더 보수적이고 더 경계하고 선교사들을 경계하고 내쫓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국제 정세가 소위 미국이 기독교 국가이면서 군사력을 쓰고 자기의 의지를 다른 나라에 강요하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선교의 문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제가 특정인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신앙과 정치를 섞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정치적인 방법으로, 사회운동을 통하여, 경제적인 방법으로 당신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셨다면 예수님은 정치가가 되시던가 기업인이 되시던가 사회운동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은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무엇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경제가 발전할 필요가 있지요. 민주화를 이루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의 비율이 95%가 된다고 해서 100%에 육박한다고 해서 우리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임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경험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본주의 사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신앙적인 규례인 것뿐만이 아니고 나라의 법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들의 영적인 지도자요 정치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었느냐?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계명이에요. 이미 그들이 신본주의 사회로 신앙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면 십계명을 별도로 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신앙인들 중에도 도적질 하는 사람, 살인하는 사람, 간음하는 사람, 거짓 증거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본주의 사회에 가장 기본적인 십계명을 주실 필요가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비율이 많아진다고 해서 반드시 국가가 더 의로운 나라가 된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고 인간은 여전히 성령과 육신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우리가 몸을 벗어버리기 전까지는 성령과 육신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믿던 사람이 타락할 수 있고 지도자인 사람이 도덕적으로 부패할 수도 있고 시험에 들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숫자로 비율로 누가 예수를 믿느냐를 가지고 그 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됐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시대에 신앙을 유지하고 신앙을 자라나게 하는 것은 상당한 도전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전쟁입니다. 사도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했는데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고 신앙대로 사는 데에는 싸움이 있습니다. 갈등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싸움은 내면적인 것이요 외적인 것입니다. 여러 곳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에 도전하는 것은 사방에 있습니다. 그것은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럴수록 우리의 신앙에 경쟁력을 갖춰야 됩니다. 

시장경제라는 말이 있지요.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입니다. 시장경제는 시장에 의해서 경제가 좌우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장의 매케니즘이 굉장히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물건을 시장에 내놓으면 사람들이 그 물건의 품질을 보고 가격을 고려해서 살 건지 안 살 건지를 결정합니다. 이것이 시장의 매케니즘입니다. 그러므로 품질이 좋고 가격에 경쟁력이 있으면 잘 팔릴 것이고 품질도 안 좋고 가격도 안 맞으면 퇴출될 것입니다. 시장의 논리라는 것은 냉정합니다. 

그런데 생각과 사상과 철학과 종교의 세계에도 시장이 존재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떤 것을 강요해서 믿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사상이든 철학이든 신앙을 강요할 수 없고 결국은 물건을 시장에 내놓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기독교신앙을 시장에 내놓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생각하고 고려하고 비교하고 그리고 자기 스스로 선택하든 거절하든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시장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장이 있을 때 사람들은 진가를 볼 수 있고 올바른 비교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장을 허락하지 않는 나라들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북한입니다. 만약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상에 대하여 자신감이 있다면 나라를 개방해야 됩니다. 나라를 개방해서 북한의 주민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게 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를 절대로 개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방하면 북한 주민들이 무엇을 선택할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슬람 국가도 한 예입니다. 그들은 법으로 신앙을 강요하고 국민들에게 다른 종교를 접하거나 개종하는 것을 불법화했습니다.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는 두 민족이 섞여서 사는데 중국 출신의 화교들이 있고 말레이시아 원주민인 말레이 족속이 있습니다. 화교들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레이시아 화교 중에 기독교인이 많아요. 그러나 말레이족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슬람을 믿어야 됩니다. 그들은 법으로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이 금지돼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도 그렇고 중동 국가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로마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이슬람 국가에 제안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당신의 나라를 개방하면 이슬람과 기독교가 손을 잡고 함께 인간을 비인간화 하는 물질배금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해서 함께 싸울 수 있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동반자가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들의 나라를 개방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라.’ 이것은 대단한 발상입니다. 

우리는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서 나와 다른 종교를 경쟁자로 라이벌로 여기고 적대적인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싸우는 것은 타종교가 아니에요. 타종교와 싸우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죄의 종이 되게 만들고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성을 버리게 만들고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죄와 어둠과 세속과 불신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씨름의 대상이 누군지를 잊어버리면 엉뚱한 짓을 해서 전도의 문도 막아버리고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를 아주 부정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 선교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생각의 시장, Market place of ideas 에 기독교를 내놓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전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접하게 만들고 기독교가 무엇을 전하는지를 배우게 하고 그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입니다. 

그리고 반기독교적인 사상도 그것은 하고 있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최근에 SBS TV에서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내용을 방송했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라는 주장의 내용을 방송했는데 방송국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소리를 지르고 항의했습니다마는 그렇게 해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SBS가 신학적인 차원에서 반격했다면 기독교도 스마트하게 지혜롭게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것을 믿을만한 근거가 무엇이고, 신학적이고 성경적이고 모든 면에 있어서 믿을만한 증거를 제시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생각의 장터에서 올바른 비교를 하고 올바른 결정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얼마든지 경쟁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의심하면 안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난 이천년 동안에 아주 혹독한 검증을 거쳤습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에 기독교는 혹독한 검증을 거치고 살아남고 쇠하지 않고 흥했기 때문에 우리는 경험이 있고 자신감이 있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진리로 승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이천년 동안에 별의별 고난과 핍박과 위험과 내부적인 위험, 내부적인 위험을 겪으면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것이 경쟁력이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은 칠십년을 가지 못하고 붕괴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상과 철학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러나 기독교는 그동안에 많은 위협을 겪었지요. 위협 속에서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셨어요. 또 예수 믿는 사람들 핍박하고 옥에 가두고 죽이면 기독교가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순교하러 갈 때 찬양하면서 갔습니다. 영광으로 여기고 순교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야만족에게 침략당할 때 야만족들이 기독교화 된 로마제국을 무너뜨릴 때 기독교가 망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야만족들이 기독교 신앙을 배워서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야만족 국가들이 기독교화 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중세에 교회가 타락했을 때 기독교가 망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정직한 신학자들이 다시 복음의 핵심과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개혁을 일으켜서 다시 기독교 신앙이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고 진화론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과학이 나오면서 이제 기독교는 망할 것이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독교인들도 더 연구하고 더 많이 공부해서 진화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이지 그것은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해서 우리는 더 지혜로워지고 더 기독교를 변증할 수 있는 노하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별의별 일이 일어나고 교회를 핍박하고 이런 말 저런 말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사상과 생각과 종교의 장터에 놓인 기독교입니다. 장터에는 별의별 아이디어와 별의별 주장이 난무합니다.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환영합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그렇게 전해졌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도 이천년 전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이미 이러한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굉장히 좋아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두 사도를 돌로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반감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반감,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처음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원래부터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께서 함께 역사해서 이적과 기사로 당신의 말씀을 더 확실히 증거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역사하신다고해서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안 믿는 사람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역사하시더라도 반대하는 사람, 불신자들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안 계신 게 아니고 일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생각이 장터에 기독교를 더 잘 내놓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백화점의 전시장에 사람들이 사고 싶도록 물건을 전시하는 것처럼 우리도 성경말씀을 깊이 배우고 지혜를 얻고 성령의 능력을 얻고 담대함을 배우고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이 다른 사상이든 다른 것과 비교했을 때 기독교에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에요. 

여러분은 언제까지 설득을 받아야 되는 사람으로 남겠습니까? 언제부터 여러분은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언제까지 서비스를 받아야 되는 손님의 입장으로 남겠습니까? 언제 남을 서빙할 수 있는 일꾼이 되시겠습니까? 우리는 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지혜와 능력을 겸비한 일꾼들이 있을 때 이 시대에 우리가 정정당당하게 기독교의 복음을 생각의 장터에 내어놓고 사람들이 비교하게 하고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여기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승산이 있습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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