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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 (고전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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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 (고전 3:1~9)


예수님께서 12살이 되셨을 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유월절 절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고향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아들 예수가 보이지 않지만 친구들이나 또는 다른 친척과 동네 어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룻 길을 갔을 때 아들 예수가 너무 오랫 동안 보이지 않자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본 사람이 없냐고 물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당황한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찾아서 왔던 길로 돌아갔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아들 예수를 본 사람이 없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기웃거리며 예수를 찾았습니다. 마을 마다 들러서  예수를 찾아 보았지만 없었습니다. 

결국 사흘에 걸쳐 다시 예루살렘에 도착해 성전에 들어가 보니 아들 예수가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함께 율법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향해 ‘어찌 여기에 있느냐?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고 말하자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들인 예수가 자신들과 함께 동행하는 줄로 착각하고 하룻 길을 내려간 일을 생각하면서 우리 신앙 생활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신학적으로 인간을 구분할 때 셋으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본능과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인격이 육체의 본능과 욕망에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1절에서 바울은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한 목소리로 1절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함과 같이 하노라’ 여기에 보면  ‘육신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이 나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자’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차이는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더 강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옛 사람의 속성을 온전히 벗어 버리지 못하고 옛 사람의 성품에 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인격이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 있기는 하지만 성령으로 온전히 지배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와 지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따르는 삶입니다. 영혼이 그의 인격을 지배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내 뜻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신령한 사람’보다는 ‘육신에 속한 사람’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대부분의 신앙 생활이 ‘육신에 속한 사람’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사람’의 삶을 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신령한 사람’의 삶으로 성장하라고 오늘 본문을 통해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체 속한 사람’의 자리에 있는 분들이 혹시 있습니까? 이들은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나오지만 예수님과 개인적인 신앙의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혹시 그런 분이 계시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신령한 영의 눈이 열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나의 구주 되심을 고백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예수을 믿으면서도 ‘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다면 ‘신령한 사람’으로 영적인 성숙한 성장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신령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산 사람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고 축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신령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며 축복된 삶을 산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의 장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믿음의 장에 기록된 신령한 사람들의 이름에 이어서 불려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사람’의 특징을 오늘 본문에서 크게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 아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부드러운 젖을 먹여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여 더 건강하게 키웠으면 좋겠는데 소화를 시키지 못해 항상 부드러운 젖을 먹이는 상태입니다. 이 말은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폭이 매우 좁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합니다. 내 입맛에 맞으면 삼키고 입맛에 맞지 않으면 뱉어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깊이와 폭이 좁으니 신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어린 아이같이 매우 유치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시기와 분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중심적이다 보니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싫으면 싫은 것이고, 내가 좋으면 좋은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주장하고 행동하니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분란이 끊이질 않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나 어느 공동체이든지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은 끊임없이 분란이 일어나고 시끄럽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씀하면서 ‘육신에 속한 사람’의 신앙인의 모습에서 ‘신령한 사람’의 신앙인의 모습으로 성장해 나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의 신앙 생활을 건천과 옹달샘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건천이 많다고 합니다. 건천은 큰 강 또는 개천인데, 비가 오는 우기에는 강물처럼 물이 흐르다가도 우기가 끝나 비가 그치면 금방 흐르던 물은 마르고 강은 바닥을 드러내어 모양만 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건천과 같은 신자들이 많습니다. 위로부터 은혜가 임하면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헌신하기도 하고, 물질을 드리기도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섬기기도 하고, 눈물로 찬송하기도 하고,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가슴 뭉클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은혜의 우기가 끝나면, 곧 심령의 바닥이 들어납니다. 본성이 드러납니다. 물이 마르면 강바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감추어졌던 육체의 본성과 근성이 송두리채 드러납니다. 감정과 분노가 절제되지 않습니다. 시기와 미움이 싹이 틉니다. 마음은 밴댕이 속처럼 좁아집니다. 예배가 짐이 되고, 헌금이 아깝고, 헌신이 쓸모없는 짓처럼 느껴집니다. 건천이 물은 없어도 물이 흐르던 골짜기의 흔적은 있는 것처럼 과거의 신앙 생활에서 경험했던 흔적은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자랑합니다. 신앙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하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습니다. 은혜 받았을 때를 이야기 합니다. 헌신적으로 섬겼을 때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는 우기가 지나간 흔적만을 자랑할 뿐이지 땅이 쩍쩍 갈라진 건천의 바닥과 같은 모습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영혼이 쩍쩍 갈라지는 건천의 바닥과 같이 갈라진 영혼을 소유한 ‘육신에 속한 사람’의 모습은 아닙니까? 

  건천 신앙의 반대는 옹달샘 신앙입니다. 옹달샘은 화려하지도 않고 큰 웅덩이도 아니지만 끝없이 솟아오릅니다. 건천은 외부에서 물이 유입되지 않으면 강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되지만 옹달샘은 물이 내면에서 솟아 오릅니다. 건천이 다 말라도 옹달샘이 마르지 않는 것은 그 물의 근원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옹달샘과 같은 신앙입니다. 외부의 환경과 상황이 바뀌어도 크게 요동치지 않습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맺으며 도리어 어려운 환경들을 믿음 안에서 극복해 나갑니다. 감사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어려운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삽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동네의 여인에게 ‘내가 너희에게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과거의 신앙의 흔적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 신앙의 충만함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용어를 사용한다고, 영적인 지식이 뛰어나다고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좋아한다고 해서 영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면에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옹달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영적인 삶을 현재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생명의 특성은 자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생명 있는 믿음이라면 자라가야 합니다. 매일 젖만 먹는 어린 아이와 같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건천과 같은 신앙 생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단단한 음식을 먹고 넉넉히 소화시키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쁨으로 일할 수 있는 신령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육신에 속한 사람의 자리에서 벗어나 신령한 사람으로 자라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하나님의 진정한 동역자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잠자는 영혼이 아니라 깨어 있는 영혼이 되어 신령한 사람으로까지 성장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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