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벧엘로 올라가자 (창 35:1~8)

  • 잡초 잡초
  • 473
  • 0

첨부 1


벧엘로 올라가자 (창 35:1~8)


오늘 읽은 본문은 유명한 구절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가슴 속에 담아두고서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 3절,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야곱이 그의 식솔들에게 한 이 외침이 바로 오늘 설교제목이기도 하구요, 제 마음에 항상 담아두는 구절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짧지만 야곱의 전반적인 인생여정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인생이 원래 다사다난하지만, 야곱 또한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을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세기 25장 22절부터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형과 싸우기를 시작했구요, 결국은 먼저 나오고 있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따라 나왔습니다.  히브리어로 ‘까프’가 ‘발’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신발 메이커 중에 ‘르까프’라고 있죠?  그 때 ‘르’는 전치사고 ‘까프’는 ‘발’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합해서 ‘르까프’하면 ‘발에’, ‘발의’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로 만든 브랜드입니다.  야곱, 정확하게 발음하면 ‘야콥’에 가깝다고 하는데요, ‘야’는 ‘잡다’라는 동사이고, ‘까프’는 ‘발’ 합해서, ‘발을 잡다’라고 합니다.  이해하기 쉬우시라고 설명드렸는데 더 어렵게 만든 건 아니겠죠?  

여하튼 야곱은 태어나기 전부터 형과 싸우고, 태어날 때는 형의 발을 잡고 따라 태어난 사람입니다.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죠.  그리고 이어지는 그에 관한 이야기는 팥죽 사건입니다.  배고픈 형에게 떡과 팥죽을 주면서 장자권을 달라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보면 욕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잔꾀, 잔머리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27장을 보시면 야곱의 잔머리는 어머니 리브가에게서 유전된 것 같습니다.  27장 3절에 이삭은 늙어 언제 죽을 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에서를 불러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그것을 들은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다가 염소를 잡게 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리브가가 직접 만듭니다.  눈이 어두운 남편 이삭을 속이기 위해 염소 새끼 가죽으로 둘째 아들 야곱을 꾸며 털이 많은 첫째 아들 에서처럼 꾸미고 또한 에서의 옷을 입혀 냄새도 속입니다.  이삭은 잔꾀 많은 모자에게 속아 넘어가서 맏이 에서에게 빌어 줄 복을 막내인 야곱에게 주게 됩니다.  급기야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고자 했고, 그래도 아버지 이삭이 살아 있을 동안에 하기보다 돌아가신 뒤에 실행하려 했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건이 반복될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남편 이삭의 말을 엿들었던 리브가는 이번에는 아들 에서의 이런 계획도 듣고 야곱을 자기 친정, 하란으로 도망가게 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오기 전 머물던 바로 그 땅, 메소포타미아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도상으로 확인해보니까 약 500마일, 8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한국으로 치자면 부산에서 평양정도, 영국으로 치자면 저 남쪽 본모스에서 에딘버러 정도되는 거리입니다.  

27장 28절부터 보시면 이삭이 야곱에게 빌어 준 아주 멋진 복의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사실 이 복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이어져오던 복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거의 백 년 전에, 아브람이 저 메소포타미아 지방 우르라는 곳에 살고 있을 때부터 큰 나라와 민족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늙을 때까지 자식이 없다가 귀한 외아들 이삭으로 간신히 연결되었고, 이제 이삭대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서 좀 나아지나 했는데 아우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 축복을 가로채고, 형은 그러한 동생을 죽이려고 하고,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어머니는 결국 막내 아들을 자기 친정으로 피신시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축복을 받은 야곱은 지금 도망가고 있습니다.

28장 10절 이하를 보시면, 만민이 너를 섬길 것이라는 축복을 받은 야곱은 도망가다 어느 한 곳에서 노숙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꿈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13절부터 15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 아버지 이삭이 빌어주었던 그 복을 이번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직접 해주십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지금 도망가는 막막한 여정을 앞에 두고 너무나 감사한 약속을 받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켜 줄 것이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부모, 친척, 고향에서 도망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너를 무사히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겠다.’  

16절에서 19절을 보겠습니다.  이 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려고 하는 곳 벧엘입니다.  ‘벧’은 ‘집’이라는 뜻이구요,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니까 ‘벧엘’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원합니다.  20절부터 22절입니다.  의식주가 잘 해결되고, 안전하게 돌아오면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그 여호와라는 신을 곧 나의 신으로 섬길 것이고, 내가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은 아직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외삼촌 라반의 집입니다.  그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결혼도 하고 일가를 이루게 됩니다.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이 외삼촌 라반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야곱의 잔머리를 능가하는 사람이죠.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를 닮은 것 같다고 했는데, 라반은 바로 어머니 리브가의 오빠입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아버지의 어두운 눈을 속였던 대가를 한 번 치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7년을 하루같이 여기며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봉사합니다.  그러나 첫 날밤에 외삼촌 라반은 라헬의 언니 레아를 들여보냅니다.  야곱은 그것도 모른 채 첫 날밤을 보내고 날이 밝은 다음에야 라헬이 아니라 레아인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소설적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서 생각해볼까요?  어두운 사막의 밤, 신혼 장막 안으로 술이 거나하게 취한 신랑 야곱이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7년을 기다려 온 자기의 사랑, 라헬에게 온갖 사랑의 고백을 하며 첫 날밤을 보냅니다.  그리고 행복한 단 꿈을 꾸고 아침에 일어나 옆을 돌아보니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제 밤에 한 모든 고백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일어나서 외삼촌에게 가서 따지지만, 너무나 태연하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1주일 후 약속했던 둘째 딸 라헬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다시 7년의 봉사를 약속합니다.  그 1주일 동안 집안 분위기 참 안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두고 마음에도 없는 레아와 잠을 자러 들어갑니다.  레아는 어떻게 하든 그러한 야곱의 마음을 얻어보고자 하고, 라헬은 또한 질투가 납니다.  레아와 라헬의 질투는 결국 아들 낳기 경쟁으로 이어지고 열 두 아들과 한 딸이 태어납니다.  인간의 모든 것들, 심지어 이런 질투마저도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데에 쓰여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31장 13절을 봅시다.  벧엘의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이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외삼촌 라반이 순순히 보내 줄 것 같지는 않고 라반이 멀리 떠나 있을 동안 도망치듯 나옵니다.  고향에서도 도망쳐왔는데 이제 20년을 살아온 하란에서 온 가족과 함께 다시 도망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외삼촌에게 추격을 당합니다.  29절입니다.  라반은 너무나 아쉬워하면서 야곱일가를 떠나보냅니다.  

야곱 입장에서 보면, 조금 치사한 외삼촌 라반에게서 도망나와 이제 가야할 곳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 에서가 있는 곳입니다.  20년이 지났기 때문에 화가 풀렸는지 아니면 여전히 야곱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형이 거주하고 있는 땅 세일이라는 곳에 먼저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소식은 형이 400명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세일이라는 곳은 원래 야곱이 살았던 곳보다 한참은 더 남쪽 지방입니다.  

세일에서 지금 야곱이 있는 마하나임까지는 부산에서 만주보다도 더 먼 거리입니다.  차라리 조금 속으면서 외삼촌에게 있는 게 낫지 400명을 이끌고 저 먼 곳에서부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오고 있을 형의 모습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냥 세일에서 기다리면 되지 아니면 몇 명과 함께 오면 덜할텐데 무슨 전쟁을 치를 것도 아니고 400명이나 함께 오는 건 또 뭡니까?  

야곱은 다시 잔머리를 굴리면서 가축을 여러 떼로 나누어 선물로 바치면서 에서의 마음을 녹이려고 합니다.  가족들도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는 혼자 얍복강 나루에서 밤을 보냅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이 야곱의 열 두 아들을 기반으로 열 두 지파가 되는 것이고, 야곱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에서와의 재회는 야곱이 걱정했던 것 보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33장 16, 17절입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의미가 조금 확실하지 않은데 다른 번역본을 보면16절과 17절 사이에 ‘그러나’가 있습니다.  에서는 세일로 함께 가자고 하고 야곱은 곧 따르겠다고 하고 그래서 에서는 먼저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숙곳, 세겜 땅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에서가 사는 세일 땅과 현재 야곱이 거주하려고 하는 세겜 땅은 부산과 만주만큼이나 떨어져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이제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0년만에 고향 땅으로 무사히 그것도 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걱정했던 형과의 만남도 무리없이 해결되었습니다.  치사한 외삼촌 라반도 없고, 무서운 형 에서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두 다리 뻗고 행복하게 살 날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34장에 바로 엄청난 비극이 일어납니다.  애지중지 하나 뿐인 딸 디나가 그 동네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추장 아들 세겜은 그래도 신사적이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 아내로 맞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가축들을 먹이러 멀리 나갔기 때문에 아들들이 돌아올 때까지 잠잠히 기다립니다.  잔머리 좋은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조건으로 내세워 세겜 땅 남자들을 다 할례받게 하고, 둘째 아들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가 그 틈을 타 잔인한 복수극을 펼칩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어떻게 한다고, 남의 나라에 온 하 가족이 한 성을 완전히 몰살시켜 버린 엄청난 사건입니다.  34장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산전수전을 겪은 야곱도 놀랍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 오늘의 본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를 언급하십니다. 야곱이 일촉즉발 위기의 상황이 닥치자 하나님은 야곱을 다시금 벧엘로 부르시고, 그들이 벧엘까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게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나올 때나, 야곱의 두 아들의 심한 복수극으로 일가족의 몰살 위기에서나 야곱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을 부르십니다.  야곱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세겜은 벧엘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레딩과 옥스포드보다 가깝습니다.  여기서 비스터보다 조금 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왕 돌아온 거,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그 벧엘인데 왜 가지 않고 굳이 세겜에서 머물렀을까요?  궁금한 일입니다만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미루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두 가지 대비가 나옵니다. 2절에서 너희와 함께 하는 이방신을 버리고, 3절에서 내가 어디를 가든 나와 함께 한 하나님께 단을 쌓자로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기 집안의 신앙을 책임져야 합니다.  지난 20년간 대가족을 이루었는데 그 가족들이 이방신을 섬기고 있는 것을 방치해 왔습니다.  심지어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 일종의 우상을 훔쳐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한 가족들의 신앙상태를 쇄신해야 했습니다.  2절, 3절입니다.  이방신상을 버려라, 스스로를 정결케 하라,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돌아가자입니다.  가장 힘들고 급박했던 순간에 만나주신 하나님이 다시 부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다윗이 지은 시편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적들이 저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수 많은 전쟁터를 누볐고, 사울왕에게 쫓겼고, 노년에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외쳤습니다. 물론 노래의 마지막들은 나의 피난처시오, 바위시오, 반석이신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 하면서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 또한 지금 온 가족의 몰살의 위기 앞에서 20년전 그 벧엘, 형 에서의 손아귀에서 도망가던 그 벧엘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부르시기 때문에 너무나 반갑고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생명을 걸만한 사건이 없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 가장 급박하게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던 순간이 없었습니까?  우리가 먼저 찾았던 것 같은 그 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고 기다리고 계셨던 곳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의 벧엘, ‘하나님의 집’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이것만 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면서 야곱이 에서로부터 도망갈 때 서원하듯 그렇게 기도하신 적도 있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곳이 바로 여러분의 벧엘입니다.  그 벧엘!  자주 찾아가십니까?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꼭 맞아야 정신 차리는게 보통의 사람입니다만, 그러기 전에 벧엘로 올라갈 수 없을까요?  물론 평안할 때 지금 야곱이 가진 절박한 심정처럼 벧엘로 올라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는 말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세겜 땅과 벧엘은 그야말로 지척입니다.  야곱은 애써 애면하고 세겜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기만 가면 벧엘인데… 내가 20년전 도망가던 길에 하나님을 저기서 만났었는데… 하면서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바쁜 일이 끝나면 다음 주에 한 번 가볼까하면서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해야 되는데, 말씀 읽어야 되는데 하면서 하루, 이틀 보내고 있는 저희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이번 바쁜 일만 끝나면, 시험 끝나면 혹은, 이번에 영국 가면 말씀 많이 읽어야겠다, 신앙생활 다시 해야겠다라고 생각하시다가 그냥 하루, 이틀 보내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영국에 가기만 하면, 비자만 무사히 나오면 어떻게, 어떻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신 적 없습니까?  영국에 가기만 하면 열심히 공부해서 영어는 네이티브처럼 하리라 그런 생각 없었습니까?  학교에 합격만 하면, 아니면 학위만 무사히 끝낼 수 있다면, 직장만 잡으면 등등 여러 가지 만약에 어떻게 하기만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야곱이 20년 전 벧엘에서 했던 그런 기도를 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하나님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셨는데 세겜에 눌러 앉아 있는 야곱처럼, 그 일들을 해결해 주셨는데 내일부터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벧엘이 아닌 세겜에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런 기도를 했는데 기억조차 못하는 겁니다. 

야곱은 자금 급박하게, 정신 바짝 차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20년만에 돌아왔습니다.  진작 올 것을 꼭 사고가 나고 옵니다. 지난 20년간의 생활을 정리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벧엘입니다.  지난 20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나를 이곳에서 만나주시고, 나를 다시금 이곳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신 벧엘의 하나님을 이제 나의 주로 섬기리라 다짐하고 내렸왔을 겁니다.  이젠 정말 모든 게 안정되는 줄 알았습니다.  형과의 문제도 해결됐고, 벧엘의 하나님도 만났고, 이제 정말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벧엘에서 고향 땅으로 가는 길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이어서 큰 아들 르우벤은 자신의 첩 빌하와 동침합니다.  약간 웃기는 이야기입니다만, 20년 전 곧 죽을 것 같다던 이삭은 야곱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죽게 되고 에서와 야곱은 함께 장사지냅니다.  여하튼 다시금 신앙을 점검하던 벧엘에서 내려온 야곱은 아내를 잃고, 장남은 자신의 첩과 동침하고, 장수하긴 했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치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 아들은 요셉을 시기해서 죽이려다 팔아버립니다.  

레아와 라헬의 질투가 얼마나 강했는지, 아버지 편애가 얼마나 심했는지, 여하튼 요셉은 배다른 형들에 의해 팔려갑니다.  많은 유산을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왕위를 위한 다툼도 아니고 배 다른 동생 요셉을 죽일만큼 미워했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다시금 아버지를 속이던 장면대로 아들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눈 먼 아버지를 속이던 장면처럼 어두운 밤에 라반에게 동생과 언니를 바꿔치기 당했습니다.  짐승과 옷으로 아버지를 속이던 야곱은 이번에는 아들들에게 짐승의 피가 묻은 요셉의 옷으로 속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 유다는 며느리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태어난 베레스가 결국 다윗과 예수님에게로 연결되는 왕통라인이 됩니다만 야곱은 현재 정말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어느 누구의 이야기보다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욕심 많고, 꾀 많은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이스라엘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그 중심에 오늘 이 벧엘로 올라가자는 야곱의 외침이 있습니다.  35장 전까지는 야곱이 자신의 뜻대로, 어쩌면 하나님보다 한 발 앞서서 움직이는 듯 합니다.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려고 했고, 아버지의 어두운 눈를 속여 축복도 가로채는 등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이기 보다는 자기의 계획대로 온갖 머리를 굴리며 움직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35장 이후 야곱은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되갚음 당하면서 또한 사랑하는 이들, 아내 라헬, 아버지 이삭, 아들 요셉을 차례로 떠나보내면서 점점 하나님의 손 아래서 다듬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 벧엘의 하나님이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가족의 큰 아픔 앞에서 신앙의 아버지로 굳건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48장, 49장에서 야곱의 유언은 이 모든 삶을 담은 신앙고백입니다.  

48장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무지막지한 인생여정이라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결국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고비고비마다 벧엘에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기근 때문에 현재 우리가 잠시 애굽, 이집트에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라고 확신에 차 있습니다.  자신의 지난 삶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신실하게 지켜져 왔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요셉 또한 그 약속을 굳게 믿어 자신의 시신을 보존하여 이 땅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으로 가게 될 때 꼭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사실 총리 요셉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집트 국립묘지에 묻힐 수도 있을 정도였을 겁니다.  하지만 요셉 또한 야곱 못지 않게 힘든 세월을 살면서 하나님의 손에 다듬어진 사람입니다.  그러는 동안 요셉도 하나님의 약속을 누구보다 강하게 믿게 된 것 같습니다.  50장 24절에서 26절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400여년이 지나 모세를 통해 성취됩니다.  출애굽기 13장 18절부터 19절입니다.  그리고 땅 분배가 끝나는 여호수아 마지막 24장 3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심에 벧엘의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야곱을 길러가셨습니다.  야곱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겠지만 동시에 믿음이 단련되어지는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욥의 고백도 기억납니다.  욥기 23장 1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리고 조금 밑에 14절을 보시면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일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내가 이곳에 오기 전 혹은, 2008년을 맞이하면서, 아니면 어려웠던 지난 어느 날 나를 만나주셨고, 그에 따라 내가 다짐했던 그 벧엘.  그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십니까?  신앙의 많은 선배들, 평안하다고 외치던 그 많은 선배들,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 선배들은 사실 이러한 하나님의 손 아래서 힘든 길들을 걸으며 다듬어져왔습니다. 그 길이 욥처럼 하나님에게서부터 왔을 수도 있고, 야곱처럼 자신의 욕심으로 빚어진 일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을 통해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빚어나가십니다.  그리고 그 길들을 지나며 신앙의 선배들은 결국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찬송가 434장을 일어서서 다 함께 부르겠습니다.  2008년의 중간에 서서 나를 부르고 계시는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찾고, 만나시고,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