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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일이 있는 사람 (벧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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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있는 사람 (벧전 1:3~7)


6.25 전쟁 중에 퇴각하던 한 UN군 소속 해병대가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전쟁으로 몹시 피곤하고 지쳐있었습니다. 잠시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쉬고 있을 때 그들과 동행했던 한 종군기자가 한 병사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사여! 제가 무엇을 좀 도와드릴까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 병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Give me tomorrow”, “내게 내일을 주세요.” 

이 말은 그 후로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내게 내일을 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내일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 미래가 있습니까? 내게 미래가 있다면 오늘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 정도는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뼈를 깍는 아픔일지라도 더 좋은 미래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는가? 미래가 있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를 지배할 때 한국민족을 가리켜서 비하하던 말이 있습니다. “한국말 중에는 어제라는 말도 있고, 오늘이라는 말도 있지만, 내일이라는 말은 없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쓰는 ‘내일’, ‘내일 갈게’. 그 말은 정확히 말하면 우리 한글이 아닙니다. 한자어입니다. 그러나 ‘어제’, ‘오늘’은 순수한 한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사람들이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민족은 내일이 없는 민족이다” 그런 이야기로 우리를 비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이라는 순수한 한글은 없지만 더 좋은 말이 있습니다. ‘내일’ 다음을 뭐라고 합니까? ‘모레’, 내일보다는 더 멀리 볼 수 있는 ‘모레’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레’ 다음을 뭐라고 합니까? ‘글피’ 우리는 ‘글피’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한글에는 ‘내일’이라는 말이 없다고 말하지만, 아니 우리에게는 ‘모레’도 있고, ‘글피’도 있습니다. 영원한 미래를 가진 사람. 제가 미래, 미래 하니까 또 “목사님! 우리 교회에 미래가 김미례씨가 둘 씩이나 있는데...” 그 미래 말고, 영원한 내일, 영원한 미래, 소망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출근하다보니 여신도들 몇 분이 어디를 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시냐고 물었더니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참 좋다’ 생각하면서, 무슨 영화를 보러 가냐고 물었더니 ‘놈놈놈’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요즘에 그런 영화 있습니다.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제가 그런 놈 보지 말고 크로싱을 보라고 말 해 주었습니다. 저도 크로싱을 봤는데 참 좋은 영화입니다. 마지막 부분 때문에 별로 추천은 안 합니다만, 크로싱을 보신 분이나, 신문에서 기사로 많이 소개되어서 잘 아실 것입니다. 

영화는 북한의 참 어려운 실상들을 고발하는 그런 영화입니다. 함경도지방 탄광 근처의 마을에 준이라는 아이가 삽니다. 준이아빠는 광부입니다. 탄광에 가서 열심히 일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그런 광부입니다. 축구도 아주 잘하고, 가정을 사랑하는 아빠입니다. 준이엄마도 아주 훌륭한 어머니이지만 몸이 아팠습니다. 기침이 심하다가 결국 폐결핵이 되어버렸습니다. 

북한에서는 폐결핵 약을 못 구합니다. 한국에서는 폐결핵을 병으로도 안 칩니다. 보건소에 가면 공짜를 약을 줍니다. 약을 먹으면 폐결핵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도 그 병이 심각한 병입니다. 폐결핵약을 구할 수 없어서 중국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는 ‘내가 친척들에게 쌀 구하러 간다.’ 그렇게 소문을 내고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어서 약을 사기 위해 벌목하는 곳에 가서 인부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중국 경찰, 공안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서 도망치다가 어떤 사람들과 합류하게 되었는데, 자기도 모르고 간 곳이 독일 대사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사연이 신문기사에 낫습니다. 독일대사관에 탈북자들이 뛰어들었다. 그래서 그분들이 한국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준이아빠도 같이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자긴 한국에 오길 원치 않았습니다. 빨리 북한에 가서 아내의 병을 고쳐야 합니다. 원하지 않는 일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염려하며 열심히 일을 합니다. 

소식을 들어보니까 준이엄마는 폐결핵을 앓다가 결국 죽게 됩니다. 그리고 어린 준이가 아빠를 찾아서 중국으로 오다가 붙잡혀서 다시 끌려갑니다. 준이 아빠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브로커를 통해서 준이를 한국으로 끌어오려고 했습니다. 해서 브로커들이 준이를 데리고 저 몽골을 통해서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몽골경계를 넘습니다. 그러나 거기도 가는 도중에 일행이 뿔뿔히 흩어집니다. 어린 11살짜리가 사막 한 가운데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몇 일 동안 거기서 물도 못 먹고 굶다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맙니다. 결국 준이 아빠는 기대하던 준이의 살아있는 모습을 못 보고, 죽은 준이의 차가운 시신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이야기로 끝납니다. 

내용은 너무 훌륭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마지막이 안 좋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니 몇 일 동안 마음이 울적합니다. 그래서 별로 여러분에게도 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감독 김태균씨를 한번 만나면 따지고 싶습니다. ‘왜 준이를 죽였느냐고?’ ‘당신은 준이를 살릴 수 있었는데 왜 죽였느냐고?’ ‘모든 탈북자의 아이들이 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온 가족이 탈북해서 잘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족도 많이 있습니다. 감독이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가정도 있고 불행한 가정도 있습니다. 북한에 비참한 실상을 그렸으면, 마지막은 그래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그 영화가 그게 불만이였습니다. 너무 좋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준이는 준이아빠에게 희망이고 소망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의 싹마저 끊어버렸습니다. 저는 그래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영화에는 어차피 소망이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성경이 좋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늘 소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사람에게도 소망을 줍니다. 어떤 절망한 사람도, 어떤 환경의 어려움 속에 처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소망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성경은 소망의 책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보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하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책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책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베드로전서의 기자는 사도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이 성경을 기록해서 보낸 시점은 보통 주후 63년에서 64년경이라고 합니다. 로마의 네로황제가 통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절을 하지 않고 그를 예배하지 않으면 핍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이 핍박을 피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갔는데 그것이 바로 소아시아지역으로 흩어져 갔습니다. 

터키를 성지순례하고 오는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터키에 가면 많은 동굴들이 있는데 어떤 동굴은 깊이가 지하로 100M, 200M, 300M나 된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피해서 생활을 한 것입니다. 거기서 밥을 해 먹고, 아이를 기르고, 아이를 낳고,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직업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아시아지역에 흩어져 생활할 때에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고난 받는 그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책의 동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핍팍받는 그들이 왜 핍박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터키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없습니다. 터키는 6.25전쟁 때 우리를 도와준 민족입니다. 또 월드컵 축구 4강 때 우리와 만난 민족인데 참 우리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회교국가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믿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믿으면 직장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때로는 죽임을 당하고, 때로는 붙들려가야 합니다. 

공식적으로 터키에는 3000여명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교사도 3000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선교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위장선교사입니다. 기술자로, 의사로, 간호사로, 교사로 이렇게 들어가서 선교사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년에 터키에서 선교하던 독일계 선교사 3명이 터키 청년 다섯명에게 꽁꽁 묶여지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정말 어찌보면 그들의 죽음은 비참했습니다. 왜 그들이 거기 들어갔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뜻에 순종해서 거기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순교였습니다. 

오늘 이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서 핍박받는 사람들도 왜 핍박을 받았을까요? 그들은 예수 믿었기 때문이고, 성령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그런 어려운 일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이런 핍박도 오고, 박해도 오고, 어려운 일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1950년대 남미 에콰도르 어느 지역에 5명의 젊은 선교사가 들어갔습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4명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휘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아주 촉망되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지역에 들어가 선교한지 일주일 만에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때 뉴욕타임지는 이렇게 큰 기사를 달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낭비인가? 이것이 무슨 미친 짓인가?” 그 때 짐 엘리엇의 부인은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그것이 왜 낭비입니까? 우리 남편들은 그 에콰도르 선교를 위해서 오래 전부터 기도해 왔고 이제 그것을 위해서 그들이 밀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교사의 아내들은 간호사가 되어서 그 지역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짐 엘리엇 일행이 죽은지 50년이 되었을 때 그 원주민들 전체 일천명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을 죽인 그 원주민 5명이 변화되어서 3명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정말 그들의 죽음이 헛되었을까요? 그들은 성령에 순종해서 들어갔지만 그들은 순교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참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신앙의 삶에는 고난도 있고, 역경도 있음을 늘 생각하셔야 합니다. 절대로 우리는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다고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질병도 찾아오고, 여러 가지 시련도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당하는 시험은 어떤 종류의 시험이었을까요? 오늘 성경 6절과 7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아멘!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잠간 근심하게 된다. 그렇습니다. 시험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깐입니다. 지나고보면 그것은 잠깐에 불과한 것입니다.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자의 밥이 되어갈 때, 한 어린아이가 그 무섭게 달려오는 사자 때문에 “엄마 너무 무서워요!” 하고 울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꼭 껴안으며 “얘야! 조금만 참으면 돼”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고난이 긴 것 같지만 결코 길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일생은 그렇게 긴 인생은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그것은 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근심하게 되지만 오히려 우리는 기뻐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왜 기뻐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우리가 연단된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당하는 시련과 연단, 그것은 결코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3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죽은 소망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여러분! 이 소망은 어떻게 생긴 소망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생긴 소망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영생인 것입니다. 5절에 보니까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약속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산 소망은 하늘 나라의 구원이요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산 소망을 가리켜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것을 기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4절을 한 번 더 읽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늘에 우리를 위하여 간직하신 기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기업일까요? 쇠하지 않는 기업, 더럽혀지지 않은 기업입니다. 

여러분! 이 기업은 세상 기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기업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회사도 30년, 50년을 가는 회사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100년을 넘지 못합니다. 그 큰 회사들이 공중분해되버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인이 바뀝니다. 우리도 어릴 때 보면 지역에서 큰 유지요 재벌이였는데 얼마 후에 보면 깡통차고 다니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한번 기차를 타고 대전을 가는데, 새마을호를 탔는데 좌석주인이 자꾸 바뀌더라구요. 제 앞에 타신 분이 평택에서 내리니까 다른 분이 타더라구요. 그 분이 천안에서 내리니 다른 분이 타더라구요. 여러분! 그 것은 누구의 소유가 아닙니다. 나는 표를 사 가지고 탔지만 그것은 내 영원한 소유가 아니더라구요. 가다보니 다른 사람이 또 타고 내리고, 교환되더라구요. 어찌보면 그것이 인생의 기업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요. 영원한 기업이요. 더럽혀지지 않는 기업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구원이요 영생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밖에 나가면 더럽혀집니다. 아무리 좋은 집도 100년 지나면 이제 다 낡아서 못 쓰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업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 간직하신 그 영원한 구원의 기업, 영생의 기업은 영원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있는 것들, 썩어져 갈 것들을 위해서 소망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드워드 모트라는 37살의 목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목공소에서 망치질도 하고 못도 박는 목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목수직업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목수직업도 훌륭한 직업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아주 존귀한 직업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난 다른 사람들처럼 왜 저런 일을 못할까?’ ‘왜 우리 부모는 나를 이렇게 키웠을까?’ 그는 세상에 대한 열등감과 반항심을 가지고, 또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착잡한 마음을 가지고 영국 런던 거리를 배회하던 중에 한 밤에 불 켜져 있는 교회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 교회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들어갔는데 그날의 설교제목이 거듭나는 도리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을 중심으로 거듭나는 도리에 대해서 어떤 목사님이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그 말씀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의 인생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 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난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인생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영원한 소망을 갖고나니까 오늘의 현실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 하루가 그의 삶에는 활력이요 생명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55세가 되었을 때 그는 너무 좋아서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목공소 사장이 되었는데, 자기 목공소를 다 처분하고 그 돈을 가지고 아름다운 교회를 언덕 위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볼 때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를 어느 날 부르시고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 너무 감사하고, 그에게 소망을 주신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가 찬송시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찬송가 539장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그는 이 찬송시를 남겼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소망을 주셨기 때문에, 그 소망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그는 소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내일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 있으십니까? 그 소망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오늘 하루 하루를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임스 와트라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 중에 ‘소망’이라는 유명한 명화가 있습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지구 위에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소녀가 바이올린을 들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이올린 줄은 다 끊어져 있습니다. 단 한 줄이 남아있습니다. 이 소녀는 그 한 줄 남은 바이올린 줄을 가지고 아주 아름다운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연주에 심취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하나둘 끓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는 건강하나는 자신했는데 어느날 보니까 아주 건강이 엉망입니다. ‘내게 당뇨병이 있다니’, ‘내게 심장병이 있다니’, ‘관절염이 있다니?’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도 나는 건강은 없어도 돈이 있는데...’ 돈 하나 의지하고 살았는데 자식이 사업한다고 돈 좀 달라고 해서 줬더니 그냥 망해버렸습니다. 

이제는 돈마저 내게 없습니다. ‘내게 그래도 권력이 있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아니 그들도 내 곁을 다 떠나 버렸습니다. ‘아니 내게는 자녀들이 있었는데’, 오늘 자녀들은 다 결혼해서 출가해서 다 떠나버렸습니다. 이제는 믿을 줄이 없습니다. 그에게 남아있는 한 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의 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는 신앙의 줄이 있다면 그는 아직도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줄이 다 끊어져도 주님과의 교제의 끈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결코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니엘은 사방이 캄캄하게 막힌 암담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를 헤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는 무리들 속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오직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에게 남은 줄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패배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자굴 속에 던져졌지만 그는 다시 승리할 수 있었고 다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도의 줄이 있다면, 아니 하나님의 향한 신앙의 줄을 붙들 수 있다면 내게 마지막 소망, 하늘의 간직한 기업을 내가 붙들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 승리하는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4절에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하늘의 살아있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없는 사람처럼 슬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39편 7절에 말씀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영원한 소망을 가집시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길을 한걸음 한걸음 힘차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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