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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환난과 삶의 자세 (막 13:14~23) - 말세,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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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환난과 삶의 자세 (막 13:14~23)


만약 제가 사람들의 미래와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였는데 그대로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3일 후의 주식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여 말하는데 항상 그대로 됩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만 그것을 발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리에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미국에서 날씨를 예측하여 거부(巨富)가 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크리크라는 사람입니다. 1930년 캘리포니아 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했지만 불황이 혹심하여 취직을 못했는데 앞으로 항공(航空)이 성해질 것을 예측하고 기상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1933년 어느날 야간비행을 떠나는 비행사에게 대서양 연안에 맹렬한 폭풍우가 일 것이라고 예언을 했는데 그 예언은 적중했다고 합니다. 3년 후인 1936년 가을에 내년 1월에 대한파가 닥쳐 과수원은 전멸할 것이라는 예고도 들어맞아 명 예보자로 이름을 떨쳤다고 합니다. 

그 후 그의 단골손님은 런던의 선박보험재벌 로이드를 비롯, 세계적으로 망라되어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루 앞만 정확히 예언할 수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거부가 될 것입니다. 날씨만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도, 미래도 예측을 합니다. 과학자들도 미래를 예측합니다. 미래학자들은 미래에 대하여 여러 가지 예측을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지 못합니다. 

미래학자들의 단체인 세계미래학회에서는 최근 그들이 과거에 내렸던 예측의 정확도가 과연 어떠했는지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우선 1967년 세계미래학회의 잡지 <퓨처리스트> 1호에서 행한 60여 가지 예측 가운데 현재 검증 가능한 35개 항목의 정확도를 살펴보았는데 23개를 정확히 맞췄다고 합니다. 68%의 정확도입니다. 가끔 언론을 보면 딕슨(Jeane Dixon)이나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케이스(Edgar Cayce) 등의 예언을 말합니다. 세계적인 심령술사 25명의 예언의 성취도를 분석한 보고서에 의하면, 72개의 예언 중에 66개(92%)는 완전히 잘못된 예언이고 성취되는 것은 8%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아주 정확하다고 생각하지만 확실한 예언이라는 2%도 정도고 그것도 억지로 꿰맞춘 해석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언은 어떻습니까? 정확합니다. 바톤 페인(J. Barton Payne)의 성경예언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성경에 기록된 예언은 총 1817개로, 구약성경엔 1239개, 신약성경엔 578개의 예언이 있다고 합니다. 8,352 구절에 들어있으며 이는 전체 성경 내용의 27%나 된다고 합니다. 그 예언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된 것을 보면 성경은 인간의 책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이사야42:9).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고, 또 그것을 역사 속에서 성취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심을 분명히 성경을 통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성경이 더 이상 합당하지 않은 책이라고 주장하는 속임수 곧 인기 있는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으면 순진한 신앙이라고 매도합니다. 이런 과학시대에 문자주의적 해석은 미신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40여명의 기록자들은 성경은 오류가 전혀 없으며 가장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거짓말쟁이고 미치광이이겠습니까? 어느 책보다도 가장 훌륭한 문학 서적이요, 가장 완전한 도덕 법전이며 또한 전 시대에 걸쳐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가장 위대한 책인 성경입니다. 

성경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려 3,000번이 넘게 언급했습니다. 성경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들 가운데 하나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수많은 성경의 예언들이 상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성취되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언은 애매한 표현이 아니라 명료하고 구체적입니다. 막연한 것을 예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한 것이 정확히 역사 속에서 실현되었습니다. 성경을 인간의 책으로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예언들은 어떤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 보십시오. 구약성경에 있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모두 191개나 나옵니다. 메시야에 대한 최초의 예언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창세기(3:15)의 예언을 필두로 해서, 메시야의 동정녀 탄생(사7:14 마1:18,22,23), 탄생지(미5:2 눅2:4,6,7), 애굽에서 유년기(호11:1 마2:14,15), 메시야의 가계도, 메시야의 선구자, 메시야의 사역, 죽으신 목적(사53:4-6 고후5:21,벧전2:24), 배반(슥11:12,13;13:6 마26:14-16;27:3-10),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시22; 마27), 그리스도의 부활(시16:9,10 행2:31,32),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한 191개의 예언이 모두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오신 후에 기록되었습니까?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53:2-12)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열두 가지의 특징이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미가는 예수님의 베들레헴에서 출생(미 5:2)을 예언했습니다. 스가랴는 은 30에 팔리 것을 예언했습니다(슥 1:13), 그 은 30은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했습니다(슥 11:13) 얼마나 정확합니까? 수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메시야에 대한 16개의 예언이 한 사람에게 이루어질 확률은 10의 45승분의 1이라고 합니다. 48개의 예언이 한 사람에게 이루어질 확률은 10의 157승분의 1이라고 합니다. 

메시야에 대한 모든 예언은 나사렛 예수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살아계셔 역사를 주관하시고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기름 부음받은 메시야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서“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눅 24:25-27)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부인 할 것(마26:34), 제자들의 흩어짐에 대하여(마26:31), 베드로의 순교(요21:18),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질 것에 대하여(마17:22), 3일만의 부활할 것에 대하여(마20:19) 수많은 예언을 하셨는데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마가복음 13장에서는 미래의 우주적 종말에 대하여, 대환난에 대하여,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예언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오늘 우리는 대환난의 예언을 읽었습니다.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최후에 있을 대환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단순한 환란이 아닙니다.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 13:19)” 전무 후무한 환란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24-26절까지를 보십시오. 그 환란이 있을 후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주적 종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대 환란은 예수님 재림 전에 있을 대 환란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대환란이 어떻게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다고 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무엇이고 서지 못할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니엘서를 인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통하여 하나님은 네 차례 (단 8:13; 9:27; 11:31; 12:11) 말씀해 주었습니다. 성소가 짓밟히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단 8:13).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단 11:3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단 12:11)”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만든 우상이 서지 못할 곳 곧 하나님의 성전에 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이 가증한 우상으로 더렵혀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실제로 BC 168년에 헬라주의자였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인의 민족주의를 없애는 일환으로 유대인들의 종교의 중심지였던 성전의 번제단을 헐고 그곳에 헬라의 최고 신인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혐오하던 돼지를 제물로 바침으로 인해 본절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니엘의 예언을 다시 인용하여 앞으로 발생될 미래의 종말론적인 사건을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가깝게는 AD 70년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 황제의 초상과 독수리가 그려진 군기를 예루 살렘 성에 들여 놓음으로서 성취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계시록 6장부터 19장까지 예언된 세상 종말에 발생할 대환난를 예언하시는 것입니다(19, 24-27).

이런 대환난이 있을 때 예수님은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라고 말씀합니까?

1. 그 사실을 확실히 믿고 세상에 미련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14-17). 

14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예언한 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거든 그 때는 이미 환란이 임박한 줄 알고 급히 도망을 가라고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지붕 위에 있는 사람들은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즉시 있는 그대로 도망을 하라고 합니다. 대환란은 급격하게 이를 것이기 때문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밭에서 일하는 자가 겉 옷을 밭 모퉁이에 두고 일을 하다가 이러한 소식을 들으면 그 순간 겉 옷을 가지러 뒤를 돌이키지 말고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겉옷이 이불과 같기 때문에 밤을 대비해서는 가지고 가야하지만 속히 임할 것이니까 그것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환란이 닥치는 속도가 급격할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머뭇거릴 수가 없음을 말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가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도망하는데 크게 지장을 받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가지는 것이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은 “롯의 처를 생각하라 (눅 17:32)”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쾌락주의, 황금만능주의, 폭력으로 얼룩진 소돔성이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불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도성이 불바다가 되어 멸절되는데 롯의 가족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천사의 도움을 받아 모든 부귀 영화를 놓고 산으로 도망을 가고 있는데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천사가 당부합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에 대하여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이 버린 것, 유황불로 태울 것 즉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것에 집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각심과 신뢰감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뒤 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반신반의한 것입니다. 호기심도 있었겠지만 "정말 성이 망할까?" 하고 의심하면서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요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유물론적 과학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합니다. 완전 축자 영감을 주장하는 근본주의는 문자주의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오류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성경관, 낭만주의적 비합리주의 성경관, 자유주의 성경관, 양식 비평적 성경관, 신정통주의 성경관, 고등비평적 성경관, 신복음주의 성경관, 실존주의적 성경관, 로마 카톨릭 성경관, 과정신학의 성경관, 해방신학의 성경관 등 않은 성경관이 성경을 100%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문서들을 사람들이 편집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과학 이전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신앙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이성이란 권위에 어긋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학과 배치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속죄, 부할 등의 교리는 한낱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초자연적 계시를 부인합니다. 성경계시의 역사성을 부인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들 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도의 종교적 영감을 받은 종교적 천재들이 기록한 작품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적 오류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논란이 된 SBS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같은 영상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 대속, 부활 등을 단지 신화나 설화 정도로 간주되었습니다. 

<신의 길, 인간의 길> 가운데 인터뷰이로 나오는 옥스퍼드 대학교 유대학 교수인 버미스(G. Vermes)와 미국 역사적 예수 연구회에서 활동하는 크로싼(J. D. Crossan)은 예수님은 "지혜로운 사람(an wise man)"이었을 뿐 메시아도 아니었으며 신도 아니었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무하마드와 다름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용된 선지자였는데, 다만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를 신화적으로 신격화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님 탐구의 절정을 이룬 것은 1985년에 만든 <예수세미나> (The Jesus Seminar)입니다. 예수 세미나에는 대략 200명의 회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참석 인원들 중에 근본주의 교단에 속한 이들은 한 명도 없고, 보수주의나 복음주의 교단에 속한 이들이 3-4명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예수 세미나의 목적, 곧 근본주의자들이나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지니는 전통적 예수 상을 뒤집기 위해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학자들을 처음부터 배제시켰습니다. 단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북미(North America)의 학자들이었고 그것도 백인 남자들뿐이었습니다. 

여기다 미국 내 주류(主流) 신학대학 즉 예일, 하바드, 프린스톤, 듀크, 유니온, 에모리, 시카고. 카톨릭 유니버시티 에 소속된 성서학자들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일년에 두 차례 만나서 예수에 대한 자료들의 역사적 가치를 논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논의 과정과 결과물들이 매번 유수의 잡지나 TV를 통해서 의도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들의 작업 목표는 복음을 문자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 또는 근본주의자들과 거의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일반 그리스도인의 그릇된 시선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어떤 오류도 없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문자주의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내용은 초대교회에 의해서 창작되었거나 재해석 각색되었다는 것입니다. 회원 중 일부가 발제 논문들을 썼고, 그 논문들은 모임이 있기 전에 각 회원들에게 배부되어져서 미리 읽혀졌습니다. 세미나 모임에서 관련 주제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밀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이 얼마만큼 역사적 가치를 갖는지 가늠하여 네 가지 색깔(빨간색, 분홍색, 회색, 검정색)의 주사위 중 하나를 투표함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역사적 비중은 모든 주사위를 수합하여 낸 평균 수치를 갖고서 결정하였습니다. 

빨간색 주사위는 예수님이 그 말과 행적을 정말 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할 때, 혹색 주사위는 반대로 예수님이 그런 말을 했거나 행위했을 리 없다고 거의 확신될 때, 분홍색은 아마도 예수님이 그렇게 얘기하거나 행위하지 않았을까 추측될 때, 회색은 예수가 그렇게 얘기했거나 행위했을 가능성보다는 아닐 가능성이 더 많을 때 던지게 하였습니다. 

예수 세미나 작업은 두 단계에 걸쳐서 총 10년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했던 발언으로 전해지는 1,500개의 자료들을 점검하여 예수님의 진정한 말씀만 가려낸 것입니다. 그 결과 마태복음 (전체 말씀 420) 빨간색 11 분홍색 60 회색 115 검정색 234, 마가복음 (전체 말씀 177) 빨간색 1 분홍색 18 회색 66 검정색 92, 누가복음 (전체 말씀 392) 빨간색 14 분홍색 65 회색 128 검정색 185, 요한 복음 (전체 말씀 140) 빨간색 0 분홍색 1 회색 5 검정색 134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마태복음에는 2.6%, 마가복음 0.5%, 누가복음 3.5%,요한 복음에는 하나도 예수님의 진짜 말과 행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거의 확실하거나 어느 정도 확실하다 보여지는 것은 18%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82%는 거의 확실히 예수 말씀으로 볼 수 없거나 아마도 예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감람산 말씀과 같은 세상 종말 때 나타나는 현상, 대환란, 예수님의 재림 등과 같은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후대에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임을 알리고 메시아임을 알리기 위해서 꾸며낸 것이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고(검정색)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동정으로 예수를 낳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검정). 세상 종말에 다시 올 인자이며, 재림했을 때에 최후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투표로 결정했습니다. 기준이 주로 상이성(차별성)이었습니다. 유대교와 다르고 초대교회와 달라야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꾸며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변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합리를 주장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얼마나 비합리적입니까? 예수의 가르침을 듣던 청중은 그 시대의 언어를 말하고 그 시대의 인식체계를 따라가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유대교와 아무런 상관없는 말만 예수님이 하셨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이 초대 교회 전통과 일치하면 무조건 역사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가복음은 예수 사후 대략 35년 정도 뒤에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35년이란 기간은 신화의 형성과정 안에서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신앙과 신학을 삽입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 이야기를 위해, 신화를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이 있겠습니까?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종교의 창시자도 예수처럼 그렇게 빨리 창시자의 가르침이나 전기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BC 1000년경에 생겨났지만, 그것에 대한 경전이 나온 것은 AD 3세기입니다. 무려 1300년 지나서입니다. 부처는 BC 6세기 인물이지만, 부처의 전기는 AD 1세기 말에 나왔습니다. 무려 700년이 지나서입니다. 모하메트는 AD 570년에서 632년까지살았지만 그의 전기는 100년이 지난 767년에 나왔습니다.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은 실재적인 역사적 예수님입니다. 만일 예수가 자신이 초월자이며 메시아라는 주장을 한 적이 없었다면, 예수의 제자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예수가 마치 그런 주장을 한 것처럼 꾸밀 수 있겠습니까? 스승이 보여주었던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모습의 예수를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 그렇게 꾸며내어 신화적 인물로 만들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언젠가 대환난이 임하고 우주적 종말이 오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눅 17:26)” 

성경의 예언은 정확하고 다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전체적으로도 폐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도 폐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요 10 : 34-36, 시 82 : 6과 요 12 : 34)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2.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18-20). 

대환난을 말하면 오늘 같은 시대에 무슨 대환난이냐고 부정하거나 방관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대환란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실 것을 말씀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 24:20)”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은 겨울에는 도피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안식일에는 유대인들이 먼 여행을 하기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은 우기 이기 때문에 통행이 불편하고 양식 구하기가 힘듭니다. 재난이 없을 수 없으나 비교적 견디기 힘들지 않도록 비교적 좋은 때가 되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자연적 환경으로 인하여 더욱 고통받고 제도적 환경으로 인하여 더욱 고통받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환란이 어떤 환란이기 때문입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이는 이라는 말은 이유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환난의 날은 환난의 날인데 어떤 환난의 날입니까? 전무후무한 환난의 날입니다. 대환란이 극심할 것을 예고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감하여 주지 않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록 고통스러운 환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행이 택하신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 날을 짧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적그리스도의 활동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단7:25 12:7 9:27 계13:5) 환란의 때를 오래 끌게 놓아두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대환난의 기간 역시 전적으로 적그리스도의 손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조절하고 택한 백성들을 무방비의 상태로 버려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 환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이 납니다.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크고 작은 환난이 늘 닥쳐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스기야 왕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적군을 앞에 놓고 아이도 낳지 못한 상태에서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그 때 무엇을 합니까? 환난의 때에 기도합니다. 한나를 보십시오.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기도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수많은 환난을 만납니다. 그 때 무엇을 합니까?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6:25-33에서 앞으로 당할 환난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탁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 16:26)”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탁하신 말씀이 그 환난을 당할 때 담대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환난의 때는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는 실제적인 힘이 있습니다. 단순한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종교적 형식이 아닙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문에 95개조항의 "개혁선언문"을 붙여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고 절대권력과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오라토리오「천지창조」를 작곡하여 명성을 얻은 하이든의 예술성과 열정은 기도에서 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미국의 백화점왕 이라고 불리는 워너메이커를 부도에서 일어나게 한 것도 기도였습니다. 어느날 하이든은 한 평론가로부터 "그렇게 초인적인 열정으로 창작을 하고 금방 회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할 때 그는 "제가 살고 있는 집에 골방이 있는데 저는 작곡하다가 지칠 때 혹은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그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샘솟는 열정과 영감을 주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찰스 웨슬리는 매일 두 시간씩 기도했고, 죤 웨슬리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기도했으며, 죤 풀리처는 때때로 철야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기도할 때 힘을 얻었지만 기도를 중지할 때 힘을 잃었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인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사 최고의 엔지니어 찰스 케터링은 빈틈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 업계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모임에서 사회자가 그의 '신화의 손'을 높이 쳐들며 "케터링 씨, 이 손으로 한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회자는 물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자동차 탄생!'이라는 말을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손으로 한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두 손을 잡고 기도한 일이었습니다."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창조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단순한 심리효과나 종교적 형식이 아닙니다. 기도는 단순히 자신의 마음의 평강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실제적인 효용성이 있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능력의 통로입니다. 눈물로 기도하면 기도는 눈의 눈물을 멈추게 해 줍니다. 사람은 약하지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기도는 은혜의 통로, 능력의 통로입니다. 


3.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21-23).

대 환난이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때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 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자들은 무엇을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이적과 기사를 행합니다. 이적은 인간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초자연적 사건입니다. 기사는 자연계에 나타나는 일입니다. 
왜 이적과 기사를 행합니까? 택한 백성을 미혹하기 위해서입니다. 택한 백성을 속이기 위해서입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삼가라는 것입니다.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속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일을 미리 말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누구이겠습니까?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요일 2:22)”
거짓 선지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 1:4)”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하게 하는 적그리스도의 유혹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의 길 신의 길]에서 보았듯이 그 영상물은 "예수가 결국 인간이다"는 유대교의 2천년 동안의 주장을 교묘히 끼워넣었습니다. 논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해야 기독교가 타 종교와 소통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절대화시키기 때문에 이렇게 전쟁이 많이 일어나고 불화가 역사속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여자의 몸에서 난 자연인으로서 단지 지혜로운 선지자의 삶을 살다 간 사람의 아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종교 다원주의자인 오강남 교수는 2001년에 출간한 그의 책 [예수는 없다]에서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믿는 문자주의에서 일단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잘못된 믿음은 “성서 무오설, 동정녀 탄생, 기적, 육체 부활, 인간의 죄성, 대속, 예수의 재림과 심판 등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인정하고 의심없이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화적 존재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야 인류에게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문적으로 접근을 합니다. 보라 과학적으로 생각할 때 “인간이 어떻게 바다를 걸어 갈 수 있으며, 물로 포도주를 만들 수 있으며, 죽었다가 살아 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대환난도 천국과 지옥도 단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설령 예수님이 실제적으로 존재한 한 인물이 이라 할지라도 여러 인물과 신화를 조합하여 허구적 인물을 만들어 신격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마술사, 열심당원, 막달라 마리아의 남편, 영지주의자, 심지어는 부활을 획책한 사기꾼” 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이마루스는 "성경이 합리주의적 사고를 하는 인간에게 결코 받아들여 질 수 없는 옛날 사람들의 책에 불과하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없으며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부인한다"고 하였습니다.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은 슈트라우스는 한층 더 나아가 신화적 방법의 입장에서 복음서의 모든 사건을 신화로 간주하고 “예수전”을 통하여 초자연적 요소 전체에 역사적 기초를 부정하였습니다. 이후 리츨, 하르낙, 바이스, 브레데 등으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예수가 원래부터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데 그들 따르는 공동체에서 그리스도로 선포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훈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는 초대교회의 선포를 적은 것이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안병무, 변선환, 김경재, 오강남 등 종교 다원주의 자들에 의해 “예수님만 유일한 그리스도요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독선적이라”고 비판받았습니다. 종교 다원주의야 말로 성숙한 신앙이요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사상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교의 알라신, 힌두교의 시바신, 중국의 상제, 한국 전래의 하늘님 등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한 하나님에 대한 상이한 견해, 표현, 관념일 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계시가 아니며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것도 아니고 육체적으로 부활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재림주도 신인도 말씀이 육신이 된 것도 대속주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한 것은 부활 후 공동체의 신앙 고백일 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사단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모습으로 믿는 사람들을 유혹할 것입니다. 마치 가장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것처럼 위장하고 유혹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약 성경에 대한 사본들이 약 5,000여개 존재합니다. 그러나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 마치 절대 진리인 양 인용하고 있는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타키투스의 사본들은 많아야 10개 미만입니다.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왜 성경 자체의 가르침은 멀리하고 사람의 작품들과 전승들과 흔적들만 내세웁니까? 그것을 우리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편향 통계라고 말합니다. 교묘하게 위장하는 것입니다. 유사 종교가들의 편견을 "역사" 혹은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가공하여 예수님의 메시야됨을 부정하기 위해서입니다. 개방된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성경이 이성에 바탕을 두고 합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그들만의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기록을 근본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성경 밖에서 가져온 것을 근본적으로 취급합니다. 과거의 사실을 어떻게 실재로 재구성할 수 있겠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서적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8백 년 전 것(12세기)입니다. 2천년 전이 아니고 8백년 전입니다. 그래도 그 내용을 조작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본도 권당 5개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반면 성경은 1900년 전 (AD 100년) 사본이 존재합니다. 사본 수도 5천여 개에 달하며 그들 간의 일치도도 99.9%를 넘습니다. 이런 사실은 보도하지 않은 채 과학과 이성이라는 무기로 일반인이 여기에 무지하다는 것을 너무나 쉽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윌리엄 램세이(William Ramsay) 경도 신약성경에 의문을 표하던 학자였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이 엉터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특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엉터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가서 고고학적 발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발굴해서 나오는 사료들은 놀랍게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내용이 너무나 정확하다는 것을 밝혀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굴지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도 수많은 오류를 남겼지만 누가는 어떠한 실수도 없이 너무나 정확한 기술을 하였던 것입니다. 램세이 경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는 크리스찬이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성경의 기원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창조적인 숨결의 산물인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21에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 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어떻게 마감하는가를 보십시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계 22:18)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19)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 22:21)“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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