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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 (눅 6:1~11, 눅 1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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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 (눅 6:1~11, 눅 10:30~37)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떠한가?'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나?'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 없어야지' 그런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믿음이요, 마음입니다. 그것을 '코람 데오'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할까? 이것은 성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고, 예수님의 모습과 가르침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복음서를 읽다가 보면 예수님은 휴매니스트(humanist)이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중심의 말씀과 가르치심을 하셨지만, 그 중심에는 인간사랑이 가득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인간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 점에서 휴매니스트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신 행동이나 말씀은 모두 이렇게 인간사랑을 중심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인들이 신본주의라는 것을 가지고 엄격하고 숨막히는 규정들로 사람을 압박할 때, 예수님은 아주 따스한 눈길과 긍휼히 여기는 가슴으로 사람을 바라보시고,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자주 충돌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차가운 눈으로 법과 규칙에 눈을 돌릴 때, 예수님은 사람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법과 규칙보다 사람됨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밀 이삭 사건(1-5)
   
어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거칠게 항의하였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합니까?"
이것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부벼서 먹음으로서 안식일에 타작하는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항의에 대하여 예수님은 사무엘상 21장의 다윗의 피난길 사건을 예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을 피하여 도망치다가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가서 하나님의 전에 차려 놓는 진설떡을 얻어 부하들과 함께 먹은 사건입니다. 원래 이 떡은 제사장만 먹는 것이었으나 다윗의 병사들이 지쳐 굶주렸을 때에 그들에게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법규보다 사람의 생명을 우선으로 여겼던 구약의 말씀을 예로 든 것입니다.  
     
②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6-11)
   
두 번째 사건은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편 손이 마비가 된 사람을 보시고 공개적으로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거침이 없으셨습니다. 사람의 고통을 해결해 주시고,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해 주는 일에 망설임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연스런 행동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마가복음3:4)고 물으셨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이 한 사람을 그 고통에서 풀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씀하시며 그 사람의 마비된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규칙에 얽매여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못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안식일 규정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은 얼른 보면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리기 위한 계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을 위한 계명입니다. 사람을 평안케 하고, 사람을 복되게 하기 위한 사람을 위한 법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은 7일에 한번씩은 쉬어야 하고 특별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 영적인 풍성함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자기 집의 종들이나 일군들, 심지어 짐승들도 일주일에 한번씩을 쉬게 하라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요즈음 말로 말하면 '사회복지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을 통제하는 도구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처럼 자기들 생각대로 규칙을 붙이고 벌칙을 붙이고 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사람을 귀찮게 하고 꼼짝 못하게 얽어매는 법이 되고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잘못된 믿음을 바로 잡기 원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못살게 구는 도구이거나, 사람을 묶어 놓는 규정이 아니라 사람에게 평안을 주며, 생명을 주는,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날인 것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권위를 지켜주고, 습관적으로 지켜온 안식일의 습관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오직 '법'이요, '전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을 볼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습니다. 왜 법과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는 것이 그들의 시비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사람의 사람다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주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오직 이것이 예수님의 관심이요, 말씀의 촛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영혼구원이라는 것도, 사람의 본래 모습을 회복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그래서 왜곡되고, 비뚤어진 자아상을 갖게된 인간, 사랑을 잃어버리고 이기적이 된 인간을 치유하셔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본래의 사랑과 믿음의 삶을 회복케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이 점에서 성경을 잘 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법규, 규칙, 문자에 매달리고 관심을 집중하였지만,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랑에 관심을 집중하셨습니다.

완벽한 사람이나, 완전한 사람--실상은 이런 사람은 없지만 스스로 그렇게 되고자 하거나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사람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참 신앙의 향기를 맡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철저함이 자신의 자랑이 되고, 자신의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적인 신앙인이 됩니다. 자신의 완벽, 자신의 철저함, 자신의 공로, 이런 것들을 자랑하게 되고, 이런 완벽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차가운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항상 방어적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강요하고, 공격적이 됩니다. 가장 신앙적인 듯이 보이지만 가장 비 신앙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바리새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죽도록 얻어맞고 가진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나무 하나 없는 광야길입니다. 그곳에는 거의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강도를 만났으니 이제는 대책없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 때 그곳에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들 주관하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 시간에 급히 성전에 가고자 하여 그 길을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장은 갈등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주려고 하면 피투성이 그 몸을 만져야 하고, 그러면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피를 만진 사람은 성전에 들어 올 수 없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장은 법을 지키고자 그 죽어 가는 사람을 버려 두고 총총 성전을 향하여 달려 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제사 드리는 일을 돕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자신도 강도 만날까 두렵기도 하였거니와 지금 이 사람을 구해주다가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됨으로 그냥 못 본 척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이 사람은 당시에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 곧 나귀에서 내려서 치료해주고 자기의 나귀에 이 사람을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 밤을 같이 보내고 이튿날 돈을 주며 이 사람을 주인에게 부탁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예수님은 결론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법이 아니라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법은 사랑의 법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활은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 외에 모든 신앙의 행위는 거의 모두 사람을 향하여 하는 행위들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만 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했다면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교회만 봉사하면서 살겠다는 뜻입니까? 기도만 하면서 살겠다는 뜻입니까? 성경만 보면서 살겠다는 뜻입니까? 이 말의 참뜻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람을 위하여 살겠다'는 뜻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결심은 텅 빈 헛된 결심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겠다'고 결심했다면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많이 바치는 것입니까?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이 진실한 것이 되려면 그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인간은 분명 죄에 물든 존재이지만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어떤 그리스도인이고자 하십니까? 우리는 모두 믿음의 humanist가 되어야 합니다. 그냥 humanist가 아닙니다. 말씀이 중심이 된 humanist, 믿음의 humanist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 사랑을 잃어버린 하나님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사랑을 잃어버린 하나님 사랑은 겉으로는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오히려 비성경적인 바리새인의 모습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의 humanist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법이 아니라 사람이요, 규칙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규칙을 잘 알고, 법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에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문자로서가 아니라 인품으로 되는 것임을 말씀해주는 문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되는 것은 법이나 문자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인품으로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경하게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을 잘 아는 사람을 존경합니까? 교회법에 능통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이 풍성한 사람, 감사의 사람, 섬김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우리가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연륜이 쌓이고, 우리의 믿음의 깊이를 더할수록 우리에게서 풍성해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사람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믿음을 갖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날 때에 이 세상은 점점 밝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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