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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믿음의 현주소 (행 27: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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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믿음의 현주소 (행 27:9~21)


성도 여러분,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도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이 시간 성령의 감동하심이 말씀을 전하는 부족한 종에게도 또 말씀을 받는 여러분의 심령에도 크게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중국고전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온다는 공자에 얽힌 일화입니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채(蔡)나라를 향하여 가고 있는데 식량이 모자라 일주일이 넘도록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겨우 푸성귀로나 연명하면서 간신히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기진맥진해서 공자가 낮잠을 자면서 쉬고 있었습니다. 

공자의 사랑하는 제자 안회(顔回)는 그런 스승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고 죄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동리로 들어가 약간의 쌀을 구해와서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스승님을 대접하려고 짓는 밥냄새가 공자의 잠을 깨웠습니다. 공자는 반가운 마음에 문을 빠끔히 열고 부엌을 내다보았습니다. 보니 안회가 솥뚜껑을 열고 그 속에 있는 밥을 한웅쿰 떠올리더니 제 입에 넣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는 순간 공자 선생님은 아주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말인가. 내가 아는 안회는 참 착하고 진실한 사람인데, 내가 수저를 들기까지는 절대로 식사를 시작도 아니하던 사람인데, 그렇게 스승에게, 어른에게 신실했던 사람인데 어찌 저가 먼저 저걸 먹을 수 있단말인가.’ 공자는 이렇게 서운해하면서 문을 닫았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안되겠군. 다시 법도를 가르쳐야겠다.’ 생각을 하고, 식사를 할 때 안회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조금 전 낮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는데 조상님을 만났거든. 그런데 조상님이 나보고 하는 말씀이 밥을 짓거든 맨 처음에 내게 주고 그 다음에 너희가 먹어라 하더구만.” 이랬단말입니다. 그러니까 안회가 하는 말이 “아 그러믄요.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데 방금 지은 이 밥은 조상님께 드릴 수 있을 만큼 깨끗한 밥이 아니거든요”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깨끗한 밥이 아니란 말이냐?” “안회가 대답하기를솥뚜껑을 열자마자 천장에서 거미가 한 마리 밥 위로 떨어졌단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제가 그 부분만 한웅큼 떠서 먼저 먹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나니 공자는 몹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렇듯 착한 제자를 내가 어찌 의심을 했단말인가. 그래 제자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예전에 나는 내 눈을 믿고 살아왔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내 눈도 믿을 수가 없구먼. 그동안 나는 내 지식을 믿고 살아았네. 그러나 내 지식도 이제는 믿을 수가 없구먼. 자네 생각에 나는 이제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겠는가?”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론」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대상이시다. 다 알려고 하지 마라. 믿어라.’하였습니다. 그는 계속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대상이시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할만하고 사랑할만하지 못하고 이렇고저렇고 비판하지 마라, 그저 그저 사랑하라, 하나님은 믿고 이웃은 그저 사랑하고, 그리고 만일에 인간을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랑의 대상이니까 그저 사랑하는 것이 좋겠다 - 그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오늘 이날까지 뭘 믿고 살아왔습니까?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우왕좌왕 한다고도 하고 휘청거린다고도 하고 세상이 다 끝나는 것 같은, 이렇게 질서가 무너지는 세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돈을 믿었습니까? 지식을 믿었습니까? 내 의지를 믿었습니까? 아니, 내 경험을 믿고 살았습니까? 또 인간들의 지지도를 믿었습니까? 아니면 정치를 믿었습니까? 도대체가 믿을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믿을만한 음식도 없습니다. 믿을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살았습니까? 또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성도 여러분, 지금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솔직히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아왔나. 뭘 믿고 살고 있나? 어째서 세상풍조에 따라 우리 자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방황하고 있나. 이제라도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이천 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한 배에 276명이나 탔다니 굉장합니다. 오늘날 2000명이 승선했다는 이야기보다 더 놀라운 얘기가 될 것입니다. 이천년 전 그때에 많은 화물을 싣고 276명이나 탈 만큼 큰 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배가 유다를 떠나서 로마로 가고 있습니다. 그 도중에 되어진 얘기입니다. 빨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몇날 몇달을 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는 중인데 미항이라고 하는 그레데 연안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문제는 여기서 생깁니다. 곧 겨울이 다가오고 계절풍이 불 때가 되었습니다. 이때쯤이면 계절풍이 오는 것입니다. 이게 예상되기 때문에 더 가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겨울을 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이 미항에서 겨울을 나고 로마로 가자, 내년 봄에 로마로 가자, 하는 얘기입니다. 어차피 내년 봄에야 로마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미항에서 그대로 겨울을 나느냐, 조금 더 가서 뵈닉스항에 가서 겨울을 나느냐,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미항이냐 뵈닉스냐 - 그런데 미항이라고 하는 항구는 아주 작은 항구요 시골이므로 우선 유흥가가 없습니다. 또 쉴만한 마땅한 곳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뵈닉스라는 곳에는 유곽도 있고 술집도 많아 한 겨울동안 흥청거리면서 지낼 수 있는 곳이더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미항이냐 뵈닉스냐를 놓고 지금 사람들이 저마다 주장을 내놓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여기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미항은 과동하기 불편하지마는 안전한 곳입니다. 그런가하면 뵈닉스까지 가는 것은 큰 모험입니다. 모험이지마는 일단 가기만 하면 거기에는 향락이 있고 편안함이 있단말입니다. 모험을 거치면 편안함이 있고 향락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쪽은 불편함 속에 안정이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합니까. 뵈닉스까지 가는 것은 큰 도박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뵈닉스까지 가자합니다. 이 대목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아무쪼록 뵈닉스까지 가서...” ‘아무쪼록’이라 합니다. 자신없는 일이거든요. 어차피 로마는 못가지만 ‘아무쪼록’ 뵈닉스까지만 가자, 그러면 한겨울 동안 좀 즐겁게 지낼 수 있다, 아무쪼록 가자 - 가는 길이 위험한 줄도 압니다. 모험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도박을 하자는 것입니다. 생명을 거는 도박을 하더라도 뵈닉스로 가자고 많은 사람이 주장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정은 누가 하느냐하면 백부장이 합니다. 군인입니다. 백부장이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말씀에는 11절에서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하였습니다. 선장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기술자입니다. 수십 년 배를 운전하고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지식과 경험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지식과 경험 그 사람이 ‘갑시다’ 하는 것입니다. 또 선주, 이 사람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이 배가 누구 것입니까. 그 안에 있는 모든 화물이 이 선주 소관입니다. 손해봐도 내가 보지, 가자 - 선주가 이렇게 나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 거기 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수적인 문제입니다. 민주주의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수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수가 말한다고 다 맞는 말입니까. 요새 성하게 유행하는 여론이라는 말, 뭐 여론조사다 뭐다 하는 것, 맘에 안듭니다. 여론조사 결과 뭐가 몇 프로, 뭐가 몇 프로다 합니다마는 그래, 여러 사람이 지지해주는 것은 다 옳은 것입니까. 또 그분들이 그만큼 생각하고 하는 말입니까. 여기에는 군중심리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자’ 합니다. 누굴 믿고? 무책임한 것입니다. 가자 하니 그럼 가자 그것뿐입니다. 결국은 백부장이 마지막으로 결정을 해야 되는데, 결단을 내릴 때 그 근거는 선장이 말하고 선주가 말하고 많은 사람이 그러자고 하니까 그러자는 것입니다. 자,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배도 위험하고 우리 목숨도 위험하고 때가 위험합니다.’ 이것은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계절풍이 부는 때이니 이때 떠나서는 안됩니다.’ 상식입니다. 기본적인 것입니다. 무슨 계시를 받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상식이 먼저입니다. 

상식이란 신학적 의미로 말하면 자연계시입니다. 인간에게 그만한 상식이 주어졌거든요. 이만한 지식이 먼저 주어진 것입니다. ‘이때쯤은 가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가지 맙시다. 안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275대 1입니다. 사도바울은 275에 대하여 1입니다. 사도 바울, 이 조그마한 사람이... 거기다가 그는 죄수입니다. 쇠고랑을 찬 죄수입니다. 그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그를 사람으로 치지도 않는데. 그런데 이 사람이 열심히 얘기합니다, 가면 안 된다고. 그러니까 ‘자네가 뭘 알어? 배를 운전 해봤나? 자네가 배를 아는가?’ 합니다. 말이 안 되는 일이거든요. 거기다가 죄수의 말을 들어줄 백부장이 어디 있습니까. 결국은 이렇게 되어서 사도 바울의 말은 묵살되고 배는 떠납니다. 떠나서 처음에는 남풍이 순하게 불므로 저들은 득의한 줄 알고 나아갔습니다. 바람을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못되어 광풍이 불어닥치는데, 성경에 보는대로 처음에는 애써보았지만 마지막에는 다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그레데 서남방에 있는 큰 모래톱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밀려갑니다. 소중한 짐을, 화물을 다 바다에 버렸습니다. 목숨만이라도 부지해야 하니까요. 이런 지경이, 죽을 지경이 되어서 이제 선주도 선원도 기술자도 백부장도 기진맥진입니다. 다 손들었습니다. 게다가 열나흘이나 굶었습니다. 죽을 것만 같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비로소 말합니다. ‘그러게 내가 말한대로 안 떠났으면 좋았지 않았나.’ 당신들, 내 말을 안 들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합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선장의 말을, 그 지식과 경험을 믿어야 했습니까? 선주가 그 배의 주인이긴 하지만 그가 내 목숨의 주인입니까? 무슨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까. 또한 수효에 연연하지 맙시다. 많은 사람이 그렇다 한다고 그런 것입니까. 많은 사람이 따라 간다고 옳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를 지셨어도 진리입니다. 여론에는 끌리지 말고 다수에 끌리는 미련함을 범하지 말 것입니다. 거기에는 공리주의라고 하는 기본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뭐라 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말해도 옳은 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따르니까, 많은 사람이 좋다 하니까 그 수의 폭력에 끌려갑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 다시 한 번 돌아가서 생각해봅시다. 확실히 저들은 한 사람, 죄수 바울의 말을 믿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거든요. 단 한 사람이지마는 그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저들은 들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믿을 것이 못되는 것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제라도 다시 수습해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삽니까? 무엇을 믿고 오늘까지 살아왔습니까? 이제 남은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 것입니까?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우리는 어차피 미래에 대해서는 불확실합니다. 미래는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믿어야 삽니다. 그럼 뭘 믿고 살 것입니까? 믿음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기 직전에 따르는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예수께서 모든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십니다. 이렇듯 흔들리고 혼잡한 것 같아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지배하십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설교를 오늘본문에 이어서 22절 말씀으로 “이제는 안심하라.”로 정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절).” 바울은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왜 입니까. 주님께서 주장하시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버리신 세상이 아닙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주장하시는 역사입니다. 지금 뭐 역사가 곤두박질하고 망가지는 것같아도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하나님의 주관하심이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믿음이 풍랑을 이겼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십니다. 항상 함께 계십니다. 오늘도 함께 계십니다. 작은 일에도 큰 일에도 함께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 믿음, 그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 믿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을 회복하기를 축원합니다. 이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주의 종을 통하여 주시는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장의 말에, 선주의 주장에 더욱 다수의 아우성에 끌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나 경우에도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계속되는 세상의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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