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 잡초 잡초
  • 351
  • 0

첨부 1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데일 카네기라는 사람이 『근심이여 안녕』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근심, 곧 염려와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세계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50%는 염려와 근심 때문에 생긴 신경장애나 정신장애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좀 먹는 것도 이 염려입니다. 현실은 전혀 비관적이지 않는데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스쳐갑니다. 그래서 우리 온 에너지가 다 빠져 버리고 말며 더 이상 기도할 의욕도 나지 않고, 믿음도 없어집니다. ‘염려하다’라는 동사가 헬라 어로 ‘메림나오’인데 이 의미는 “마음이 나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 에너지가 나뉘어 그 힘이 현저히 약화되고 맙니다. 마치 수도관이 새어 물의 힘이 약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염려는 습관입니다. 그것도 아주 잘못된 습관이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악한 것입니다. 몽테뉴는, “나의 생애는 실제 발생하지 않은 아주 처참한 액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라 말을 합니다. 염려는 무엇입니까?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지 않고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미리부터 걱정하는 태도입니다. 염려는 우리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상입니다. 현실은 잘 굴러가는데 우리는 이 염려라는 허상 때문에 스스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몇 해 전 유행했던 베스트셀러 중에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주된 내용은 사람들은 사소한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무기력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예컨대, 어떤 계약을 해야 하는데 상대방이 나오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럴 경우 우리는 오만 가지 생각을 다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 “저 사람이 내 약점을 알아봤다” “내가 하는 일은 항상 그래” 등등 온갖 상상을 하고 의미 부여를 하다가 스스로 낙담하고 맙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정말 그 회사에 바쁜 일로 긴급소집이 있어 올 수 없었다고 하며 오히려 사과까지 하였습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염려하고 있었던 시간 내내 우리는 마치 사망의 늪에 빠져 있었던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우리 부패한 육성은 인생의 밝은 면을 보지 못하게 하고, 현실을 현실대로 받아드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예수님은 여러 번에 걸쳐서(25, 27, 28, 31, 34)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농사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으셨습니다. 유대 지도층들의 위협과 군중들이 주는 두려움 가운데 사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염려 없이 잘 사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 비결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 주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합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목숨은 먹고 마실 음식보다 더 소중합니다. 목숨은 입는 옷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귀중한 생명을 하찮은 먹거리나 옷 때문에 죽게 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26절에서 주님은 공중의 새를 보고 은혜를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새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 않지만 그들은 결코 굶어죽지 않습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어느 글을 보니 제비가 자기 새끼들을 기를 때 하루 200번 가까이 암컷과 수컷이 자기 둥지를 오가며 새끼들을 기른다고 합니다. 한 번 올 때마다 하루살이나 곤충 벌레들을 물고 오는데 대충 10마리씩만 잡아도 하루 2천 마리의 벌레들을 먹이는 샘입니다. 이런 식으로 새끼가 자라는 3주 동안 이면 무려 약 4만 마리의 벌레를 먹입니다. 이런 제비가 한 두 마리입니까? 전 지구상에 있는 조류만 해도 1천 억 마리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배고파 죽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공중의 새를 비유로 들며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합니다. 새는 통장에 잔고가 없어도 즐겁게 삽니다. 하물며 이것들보다 소중한 인간들을 굶주리게 하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한 해 약 3천만 명의 사람들이 심각한 기아의 위기를 겪고 있고 약 8억 5천만 명의 사람들이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잘못입니다. 전 세계 곡식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량보다 더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곳에서는 버리고 쌓아놓는데 다른 곳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습니다. 또 한 곳이 기근이 들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됩니다. 이는 동물들이 취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완악한 인간들은 국경선이나 여러 경계선을 그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합니다. 강국은 경제봉쇄를 하고 독재국가는 국민들의 죽음을 방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인간들의 죄, 특히 염려의 죄 때문입니다. 내 정권을 빼앗길가? 내 경제적 이득이 사라질가? 내 미래가 안전할가? 하는 염려 때문에 쌓아두고 막고 하다가 이렇게 위기를 자초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번에는 들에 핀 백합화에 비유합니다. 28절입니다. 들의 백합화는 자기가 자라기 위해 별 다른 수고도 않습니다. 옷을 만들기 위해 길쌈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들꽃들의 아름다움은 인간들 중 가장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는 솔로몬의 영화보다 더 찬란히 빛납니다. 사실 그래요. 들의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세상에 어떤 옷이 이 꽃보다 더 아름답습니까? 들의 백합화는 화장이나 성형수술을 하지 않습니다. 명품 옷을 입을 이유도 없습니다. 자기가 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들의 백합화의 비유를 들어 보이시며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여러분 이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그래요. 명품 옷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인격이고 마음입니다. 속이 아름답지 못하면 겉만 번질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작품입니다. 주님은 이런 명품인 우리를 위해 그에 걸맞는 의복을 입히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가 전혀 놀고 먹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일을 합니다. 제비는 하루에 수천 마리의 벌레를 잡아 새끼의 입에 넣어줍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옥수수 뿌리는 다 자라면 총 길이가 623km에 달합니다. 이는 하루에 무려 5km씩 자란 샘입니다. 이것들은 열심히 일하지만 염려하지는 않습니다. 염려는 인간만이 합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것이 어떤 때는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32절에서 주님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한 염려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서 의지할만한 존재가 없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니 내일 일이 염려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너희는 이방인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이 너희 아버지이시다고 말씀합니다. 산상수훈에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부자면 아들도 부자입니다. 아들을 굶기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믿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평안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여유도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이방인들은 평화가 없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 경계심이 가득합니다. 자기의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허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저는 어떤 때는 우리 조선 시대의 선비들의 모습이 존경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어떠리” 먹을 것이 부족해서 밥 대신 나물을 먹을지라도 여유를 부리고 있는 그 허세가 참 존경스럽습니다. 우리의 선비들은 먹을 것 때문에 염려하지는 않는 강한 정신과 철학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도 이렇게 믿음으로 살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개척 교회 하면서 하는 많은 염려들 중 하나도 먹고 입는 것에 대한 염려입니다. 지금 이 상태로 먹고 살 수나 있겠나? 월세나 감당하겠나 하는 염려가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2년 넘게 우리 교회를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평안해질 만도 한데 항상 마음이 무거운 것 보니 믿음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것 같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로 우리를 얽어매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질을 많이 소유할수록 염려 또한 더 많아집니다. 전에는 밥 한 끼 굶지 않고 살기만 하면 감사했는데 지금은 미래에 대한 걱정, 자녀 교육에 대한 걱정, 현재 자기 소유를 유지하기 위한 걱정들로 더 불안해졌습니다. 그것은 연차적으로 발간되는 행복지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영국 신경제 재단이 세계 178개국을 대상으로 2006년 행복지수를 발표했습니다. 이 행복지수는 삶의 만족도라는 주관적인 수치와 평균 수명, 생존에 필요한 면적과 에너지 소비량 등의 환경적인 여건이라는 객관적 수치 등을 고려해서 순위를 매긴 것입니다. 1등에 뉴질랜드 옆에 있는 작은 섬나라 바누아투가 뽑혔습니다. 우리나라는 102위였습니다. 영국은 108위, 캐나다는 111위, 프랑스는 129위, 미국은 150위, 러시아가 172위를 차지했습니다. 1위 바누아트는 문맹률 89%, 평균수명 69세,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에 불과한 나라였습니다. 선진국들은 대부분 100위권으로 밀렸습니다. 이는 행복은 소비 수준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히려 인간관계, 가치관 등이 더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국민소득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그만큼 염려와 근심지수도 높아져만 갑니다. 염려는 더 많은 물질을 쌓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풍요와 감사가 더 중요합니다.

독일 신비주의자 타울러의 이야기입니다. 타울러가 하루는 거지를 만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오늘도 좋은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거지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난 하루도 좋지 않은 날이 없어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자 타울러가 다른 식으로 축복합니다. “여보시오 그러면 행복하시기를!” 이번에도 거지는 또 이렇게 응수합니다. “난 불행해 본 적이 없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타울러는 놀라서 “무슨 뜻이죠?” 하고 물었습니다. “날이 좋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비가와도 감사하고, 먹을 것이 넉넉하면 감사하고 배곯아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나를 기쁘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불행하지 않을 때 불행하다고 말해야 합니까?” 하고 거지가 말했습니다. 타울러 그를 쳐다보며 “당신은 누구시오?”하고 물었습니다. 거지는 “나는 왕이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당신의 나라는 어디 있소?” 하고 묻자 거지는 “내 마음 속에 있소.”하고 대답하더랍니다. 하나님나라는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감사하면 천국이고 염려하면 지옥이 되고 맙니다. 

둘째,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염려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염려한다고 해서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27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키 크고 싶다고 해서 염려하고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키가 크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염려하면 오히려 더 키가 자라지 않습니다. 염려할 시간이 있으면 열심히 먹고 푹 자는 것이 키를 크게 하는 현실적인 비결입니다.

우리는 염려해도 소용없는 일은 빨리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 책에서 어니 J 젤린스키는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에 대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염려이다. 이것은 염려한다 해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22%는 사소한 사건들에 대한 염려이다. 이것들은 염려할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염려한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결국 나머지 4%만이 우리가 염려해도 되는 진짜 사건이고, 96%의 걱정거리는 쓸데없는 것이다 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일 중요한 행사가 있는데 비가 올 것인가 안 올 것인가에 대한 염려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성질이니까요? 차라리 그 순간에 비가 올 경우에 대한 대비책만 세워 놓으면 될 것입니다.

염려는 습관이고 쓸데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고(롬6:12) 말씀합니다. 반대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너희가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라”(롬5:17)고 말씀합니다. 염려하는 것은 사망이 왕 노릇 하는 것이고, 감사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생명이 왕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라인홀드 니버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기도문입니다. “하나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옵소서.” 마음속에 염려가 생기면 그것을 끌어안고 있기보다는 글로 기록해보면 도움이 됩니다. 글로 기록하면 자기 안에 있는 문제가 정리가 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면 되고,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으니 염려해도 소용없습니다. 글을 기록하고 딱 10분만 고민하십시오. 그래서 해답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여러분 능력 밖의 일입니다. 접어두십시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오늘 하루라는 시간뿐입니다. 주님은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직 않았습니다. 우리들에게 실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오늘이라는 시간뿐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오늘도 망쳐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의 속담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일의 불행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오늘의 생명도 모르는 몸이다. 만일 내일 살아 있지 못한다면 네 것이 아닌 남의 세상을 위해 염려하는 결과가 된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오늘이라는 하루 하루가 쌓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오늘을 잘 살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인생은 없습니다. “내일이여 멋대로 오라 나는 오늘을 잘 살았다.”이렇게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현재, 지금 이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만 멋지게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일에 대한 계획을 갖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는 것 하고 미래의 일을 염려한다는 것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계획은 희망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입니다. 그러나 염려에는 전혀 하나님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내일에 대한 계획은 세우되 염려하지는 마십시오. 다만 오늘에 충실하십시오.

셋째, 염려는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지는 순간 물러갑니다.

3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 우리 사회, 온 땅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제일 우선 순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말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생활에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충성할 때 주님은 이 모든 것, 곧 먹고 마시고 입는 등 우리의 생활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순간 사라집니다. 사실 염려는 한가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몸을 바쁘게 움직이면 염려할 시간이 없습니다.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행복한가 불행한가를 곰상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여가를 갖는 데서부터 근심이 시작된다. 그런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비참하게 되기 위한 비결이다. 손에 침을 바르고 바쁘게 돌아가자. 당신의 피는 뛸 것이며 마음은 시계처럼 정확히 전진하고 이러한 용솟음치는 적극적인 생명력이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근심을 몰아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염려는 사라지고 맙니다.

세상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염려가 많아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이 할수록 마음에서는 감사가 더 많아집니다. 인간의 마음은 더 숭고하고 고상한 것에 만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생활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한 수고가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십시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가 우선이 되고 있는지 점검해보십시오. 그 우선순위가 분명한 삶을 살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 대신 감사와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입니다. 반대로 믿음을 갖기 시작하는 순간 염려는 끝이 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너희가 하나님 일을 가장 우선으로 알고 행하면 너희에게 필요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은 내가 다 책임지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전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할 때 “제자훈련 기간만은 최우선 순위를 이 훈련에 두십시오. 만약 회사나 가정에 다른 일이 생긴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에 우선 순위를 두십시오.” 하고 부탁을 합니다. 정말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둔 사람은 그 훈련이 끝날 때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증거합니다. 

어떤 분은 승진을 위한 직장 연수기간이 있었지만 제자훈련 때문에 이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제자훈련이 마치는 순간 다시 연수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이런 간증이 많이 있을 때 우리는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염려하지 않고 담대히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염려 거리가 생기면 그것을 기도제목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염려는 없습니다. 다만 기도제목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