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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편적 인간에 대한 이해 (눅 8: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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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인간에 대한 이해 (눅 8:26~39) 


저는 며칠 전에 어느 신문에서 ‘현대인은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위험, 실재하지 아니하는 위험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상황이 불안을 야기한다. 이런 현대사회의 특성을 위험사회라고 한다. 여기서 위험은 직접 감지되지 않는 위험, 그래서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이다. 과학의 시대, 합리의 시대일수록 불확실성은 사람들을 못 견디게 불안하게 만든다.’ 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공감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이유를 그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쇠고기를 태연하게 먹는 미국사람들이 이상한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라고 잘라 말합니다. 똑같은 쇠고기를 한국 사람들은 먹지도 않으면서도 불안해하고, 미국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대로라면 이틀에 한 번씩 먹고 있는데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한쪽에서는 불안해하는 것이 당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민감도가 미국인과 한국인이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광우병 쇠고기가 들어올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이 객관적 사실이라 해도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광우병에 걸릴 확률을 반반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분은 어떤 현상에 대한 객관적 사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인식차이는 크나큰 괴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 그 글은 모든 지도자들이 아주 귀 기울여서 들을만한 실제적인 말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이 사람은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모든 일에 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정치가 대상으로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즉 믿음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한다면 지도자들이 대상으로 할 것은 사실이 아니라 자기가 지도하고 있는,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사실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 글이 불안의식을 통한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면 오늘 성경의 본문은 가장 보편적이지 아니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귀신이야기입니다. 많은 귀신이 들어간 사람을 이야기 하므로 아주 특별한 경우를 두고 가장 일반적인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귀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어떤 일에 대해서 이것은 도대체 귀신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은 믿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과거에 내가 한 일이지만 도무지 내가 어떻게 그런 말, 그런 행동을 했는가, 스스로 믿어지지 아니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의 책임을 다른 데로 전가시키고 싶어 합니다. 귀신같은 존재가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철학자가 한 평생 신의 존재를 믿지 않다가 마지막 단계에 가서 차라리 신이라고 있으면 좋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심정을 알겠습니까? 그는 지금까지 신이 있지 않다고 믿었고 철저히 그것을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유명한 인생을 살고 마지막에 와보니 신이 없고서는 이해하기 든 일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런 신이 있어서 나도 의지했으면 좋겠는데 믿기지 않으니까 이런 소리를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무지 귀신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다는 일에 대해서 각각 자기대로 생각하고, 자기대로 믿고, 자기대로 받아들입니다. 자기 지식대로, 자기 신앙대로, 자기 경험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희한한 일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라고 표현하고, 귀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당연하게 그것은 귀신이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 나름대로 원칙을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교훈인 성경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정도로 받아들이고 믿으면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 이상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논리적이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일지라도 또는 상당히 학에 조애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이하로 생각하는 것도 바르지 못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 정도만 믿고 그 정도로 말하는 것이 가장 바른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에 귀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본문 사건을 통해서 기독교 신자들이 다시 한 번 확인할 것은 만약에 성경이 말씀하시는 문자 그대로 귀신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 귀신들은 예수님을 귀신같이 알아본다는 사실을 생각해야합니다. 또 귀신들은 마음속에 예수를 모시고 있는 사람들도 기가 막히게 알아봅니다. 하나 더 이야기한다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 속에 예수를 아직 모시지 못한 사람들도 귀신들은 기가 막히게 압니다. 믿는 척 해도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아무리 무서운 귀신일지라도 예수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하고 벌벌 떤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귀신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쇠사슬로 묶어도 다 푼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주일 동안 밥 한 끼도 먹지 않은 사람이 장정 남자 둘을 금방 물리칩니다. 그 앞에서는 힘을 하나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귀신도 예수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 28절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아무리 난리를 부려도 예수께는 절대 복종하고 또 31절과 32절에서도 나를 무저갱에 보내지 말고 차라리 돼지떼가 있는 곳에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예수께는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그 앞에서는 벌고 떨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혹시 귀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또는 귀신이 아닌 세상의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단 내 속에 예수가 있는가 없는가 이것만 확인하면 됩니다. 조금 더 넓게 말씀드리면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나 어려움 앞에서 당당할 수 있고, 질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들의 문제에 있어서도 큰 소리 치십시오.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지켜주시고 챙겨주시고 인도해주시고 잘 키워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당할 때 귀신이 있다면 귀신들도 도망갑니다. 내 속에 예수가 계신가, 안 계신가 확인하고 혹시 계시지 않으면 영접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정신병자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 그는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우리는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을 귀신들렸다고 생각하든지 혹은 정신 착란이라고 생각하든지 혹은 다른 것일지라도 뭉뚱그려 정신병이라고 이야기하십시다. 정신병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오늘 두 가지만 예를 들어봅니다. 어떤 사람이 정신병 걸리는 일들이 생겨날까요? 하나는 자기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큰 충격을 받았을 때입니다. 이 사람의 경우는 옛날에 많은 군인들에게 아주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비참하게 학살되는 장면을 목격했다든지 특별히 자기의 사랑하는 부모나 형제가 군인들에게 유린이나 큰 변을 당했을 때 이런 정신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마찬가지 내용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들에게 큰 충격적인 일을 당했을 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한다는 것을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사랑한다면 돈 때문에 병이 잘 걸립니다. 왜냐하면 돈을 사랑한다는 말은 다른 한편으로는 돈을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을 잘 챙겨야하지만 너무 많은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그것은 두려워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많은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우리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자식을 너무 사랑하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사랑하되 너무 사랑할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며느리가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완전히 귀신들린 사람의 증상을 보였는데 돌아가신 시어머니 소리를 그대로 내니 누가 보아도 귀신들렸다고 말합니다. 사실 영적으로 충격을 받아서 정신병에 걸렸을 때에도 치료할 때는 세상적인 방법을 많이 씁니다. 치료하다 보면 이 사람이 영적인 질환인지 혹은 다른 정신적인 질환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가 참 많은데 전기충격이나 약을 먹는 등 여러 방법을 사용하여 치료합니다. 이렇게 해서 치료가 다 된 경우 어떻게 해서 이런 병에 걸렸는지 추적해보았더니 위에서 말하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 며느리의 경우, 사실 이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그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입니다. 잘 모셔놓고도 잘못 모셨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잘 모시지 못하고도 잘 모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며느리도 다른 사람들은 그럭저럭 잘 모셨다고 생각했지만 본인은 너무 잘못 모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조금만 더 살아계셨더라면 내가 더 잘 모셨을 텐데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혹시 내가 못 모셨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귀신이 되어서 나를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파트 현관문을 통해 ‘휭’ 하고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듣고, 그 순간 며느리는 시어머니 귀신이 자기에게 들어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완전히 귀신놀음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시어머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정신병을 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참으로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했을 때 우리 주님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말도 되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 주님은 그 사람이 하는 말 그대로 받아들여주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그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심지어 잘못 알고 있는 것까지도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아프다고 하면 아프냐고 물으시고 슬퍼하면 얼마나 슬프십니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의 자식들이 다 죽자 친구들이 와서 칠일 칠야를 같이 슬퍼할 때 욥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그들이 하는 말 때문에 욥은 오히려 상처를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서럽다고 하였을 때 같이 울어주셨고, 두려워할 때는 꼭 안아주셨습니다. 그런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었습니다. 

여러분, 의사들 중에 어떤 사람이 명의이며, 어떤 사람이 돌팔이일까요? 노인들이 특별한 병이 없음에도 병이 있는 것 같아서 병원에 갔을 때 아무 것도 없는데 왜 그러냐고 말하는 의사를 돌팔이라고 합니다. 위로해주며 심지어는 플라시보 효과로 달콤한 약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명의입니다. 어차피 다 엉터리이지만 명점쟁이와 엉터리를 어떻게 나누는지 아십니까? 명점쟁이는 고민을 이야기하면 신나게 잘 들어주고 같이 이야기하는 점쟁이입니다. 이렇게 하고 한 시간쯤 이야기하고 나면 주머니가 잘 열립니다. 점을 잘치는가 그렇지 않는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훈계하고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하면 복채를 받지 못합니다. 객관적인 사실에 있어서 아무리 아니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이 그렇게 여기면 그대로 받아주고 나도 그렇게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의 마음을 엽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해가 쉽지 않는 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귀신들이 주님께 우리를 제발 바닥이 없는 무저갱이 아니라 돼지떼들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당시는 생활이 힘들 때였음에도 돼지 2천 마리를 물에 빠져서 죽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물론 귀신들이 요청했다는 것은 정신병 걸린 사람의 입으로 이야기했으므로 만약 귀신의 존재를 그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 속에 있는 귀신들이 그 사람의 입을 열어서 그렇게 말하도록 했다고 믿을 수 있고, 반대로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은 그 사람은 자기 속에 많은 수의 군대가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군대를 돼지떼에게로 쫓아내주시기를 요청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속에 틀림없이 귀신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 속에 있는 귀신은 쫓겨날 때 나 말고 다른 대상에게 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인정해야합니다. 귀신이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인정해야하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돼지떼에게 보내달라고 한 것은 자기 속에 귀신 수가 많으므로 자기처럼 한 사람에게 귀신떼가 다 들어가면 얼마나 힘이 들것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동물일지라도 얼마나 힘들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돼지떼에게 보내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귀신들이 돼지떼들에게 나누어서 가게 되면 나만큼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심정을 이해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우리도 주님처럼 사람들을 그대로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주자는 것입니다. 촛불을 들고 가는 사람들은 그들 모습 그대로,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들 모습 그대로 받아주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믿는 사람들은 기도해야합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잘 보아야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인식입니다. 우리가 닮아가야 할 사람은 주님입니다. 주님은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돼지떼들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만약 귀신이 아니라고 할 경우라면 우리 주님께서는 돼지떼들을 그냥 희생시킨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 이 사람이 나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치료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한 사람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정말로 귀신이 있었더라도 혹 아니라고 할지라도 낫도록 하신 방법을 쓰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에 대해서 2천 년 전의 이 시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모습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병들어 아주 비참한 삶을 살아가나는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큰일을 하신 예수님께 거라사인의 땅 근 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37절.)라고 말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 위대한 일을 하신 예수님께 가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당장 나에게 떨어진 이해관계를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나가 저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던 사람,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완전히 건져줄 것 같으면 축복도 얼마나 많이 줄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가 나가야할 부분입니다. 

떠나달라고 하여 우리 주님은 떠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억지로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요청하면 오십니다. 그러나 거부하시면 우리 주님께서는 떠나십니다. 주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환영하고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내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에 강권적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생 최고의 복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를 받았다는 사실,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못지않게 오는 어마어마한 은혜와 은사가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제 다시 우리가 대답할 순서입니다. 만약 우리 예수께서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 문 앞에서 두드리고 계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왕 예수를 받아들였든지 혹은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든지 간에 예수께서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린다면 여러분들의 마음 문을 여시고 환영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거절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여러분들이 선택하실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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