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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와 평강 (갈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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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평강 (갈 1:1~5)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축소판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갈라디아서는 나의 편지요 나의 아내이다."고 할 정도로 중요시했고 그래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신약의 교과서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만큼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더불어 구원 얻는 믿음에 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 지방의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조건으로서 율법의 준수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참된 복음 안에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구원을 얻느냐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역시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변함없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느냐고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언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지 않느냐고 하는 생각들이 우리 안에도 있고 또한 그것을 가르치는 잘못된 이단들이 그 당시도 그렇고 오늘날도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을 소개합니다.

바울을 향한 사람들의 공격 가운데 첫째는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냐 다시 말해서 너는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네 마음대로 떠들어대고 있느냐 그러니 그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먼저 자신의 정당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이 편지를 쓰는 자기가 사도라고 표현합니다. 사도라고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택하신 12제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께서 택하셨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에 가룟 유다 대신 새롭게 뽑은 또 한 사람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자기를 사도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데도 증인을 설 만큼 하나님 앞에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도망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체포영장을 발급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달라진 것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자기를 부르신 예수님을 만나면서부터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어느 순간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자기를 비추는 가운데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깜짝 놀라 그가 대답합니다.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 순간 그는 눈이 멀었습니다. 겨우 같이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금식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되돌아볼 때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들려진 음성대로 아나니아를 만나 그의 기도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시는 가운데 저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 그 깨달은 말씀을 즉각적으로 전하기를 시작합니다. 그랬기에 바울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도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럼 어떻게 사도가 된 것이냐 하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됐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사도로 세우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요 또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를 사도로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이요 또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당당함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다른 말로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사람이 자기를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유대인들이 “무슨 자격으로 바울, 네가 그렇게 떠드는 것이냐?”고 해도 당당할 수가 있는 것이요 보내심을 받았기에 보내신 분의 전하라는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라는 말은 대사라는 뜻도 됩니다. 대사란 한 나라를 대표해서 그 나라의 뜻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이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어 안수하여 보게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것을 바울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사도가 되었노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도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까? 누가 우리를 세상의 사도로 세우셨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자녀로 삼으셨고 또한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제사장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입을 다물면 안 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전하는 말이 내 뜻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입에 주시는 말씀대로 전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하기에 앞서서 “나로 하여금 저들에게 전할 수 있는 말씀을 주옵소서.”라고 언제든지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입에 담아 주시는 말씀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자격이 있다면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나를 불러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학식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무언가 공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특별히 남들보다 성품이 뛰어나서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 교회 안에서는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많은 성도들 가운데서 목회자들을 또한 택해서 세우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목회자들을 다른 말로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주님이 전하라고 하는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그 말씀을 따라 우리 모두는 또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요 순종하여 섬길 뿐입니다. 따라서 저나 우리 모두가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세우신 자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또한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에 나가 주님을 전하는 귀한 사도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을 위해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주의 백성들을 축복하는 일입니다. 제사장에게 주어진 권한이 바로 죄 지은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도록 간구하는 것이요 또한 그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백성들을 축복하는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뭐라고 축복합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과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은혜와 평강이야말로 우리가 받는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어 믿음으로 이끌어 주셨기에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힘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평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이 하나 되지 못하게 만드는 담과 같습니다. 한데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도록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의 죄와 허물만 보신다고 하면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라.”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한 일들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고개도 들 수 없을 정도인데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이미 네 죄를 다 용서했다. 그러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내 손 잡고 가자.”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아빠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하면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여전히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죄의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자녀, 저주의 자식이 아니라 의의 자녀, 은혜의 자녀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내가 바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이요 그래서 평강입니다. 그리고 평강은 잘못된 관계를 바로 잡는 것 곧 우리의 하나됨입니다. 그러나 이는 나만이 누리는 은혜요 평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누려야 될 은혜요 평강입니다. 

또한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역시 누려야 될 은혜요 평강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바울처럼 우리 가운데 이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위해서 날마다 축복하여야 할 것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강의 복으로 우리 안에 넘치도록 하여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날마다 서로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위해서 축복하는 성도들이요 또한 그 축복한 대로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먼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를 위해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위해 축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주위 사람들이 그런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그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하 저 사람이 저렇게 살 수 있는 것이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구나.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기에 저 사람이 하나님을 믿더니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나도 그 하나님을 믿어야 되겠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단지 입술로만 “하나님 영광 받으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강을 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이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서로 용서하며 사랑하는 그 모습을 볼 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기서부터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살아가는 모습도 달라야 합니다. 왜 우리라고 해서 실망될 일이 없겠습니까? 왜 우리라고 해서 속상한 일이 없겠습니까? 왜 우리라고 해서 화날 일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왜요? 감사는 위기를 기회로, 시련을 복으로 바꾸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합니다. 감사로 기도하면 어려운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아울러 감사는 습관이며 또한 선택입니다. 그러니까 감사가 습관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이는 또 다른 말로는 선택입니다. 물론 상황은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 되면 불평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바뀌어져서 복된 상황이 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감사하면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는 대신 감사를 선택하십시오. 감사를 선택할 때 인생은 역전됩니다. 매일매일 감사를 선택하십시오. 감사의 선택은 놀라운 기회로 이어지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우리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그러다가 아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고통 중에도 감사하고 찬양했더니 감옥이 열리고 빌립보 간수장의 온 집이 예수를 믿게 되고 오히려 저를 때렸던 관리가 바울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입장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아니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의 자녀가 될 수 있었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대속은 힘든 일이요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하나님 또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려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로마서 14장 8절을 통해 말씀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르게 살고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되면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로 보내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자 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하나 됨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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