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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어질 수 없는 관계 (고후 6: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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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질 수 없는 관계 (고후 6:14~18)

 
1. 관계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게 됩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형제자매와의 관계, 일가친척과의 관계, 또래 친구들과 관계, 선생님들과의 관계, 위 아랫사람 선후배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 동료 혹 동업자와의 관계 등과 거기서 조금 범위를 넓혀 민족 혹 국가와의 관계, 다른 나라나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의 관계 등, 정말 그물망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모든 관계들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나쁜 관계가 있는 가하면 좋은 관계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는 행복이나 기쁨을 주는가 하면, 반대로 슬픔과 좌절을 안겨주는 관계도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우리는 이러한 무수한 관계들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왔고, 또 앞으로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최근 저는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이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경험했습니다. 지난번 제가 신학 강의 차 중국 길림성 연길에 있는 한 조선족 교회로 갔었는데, 그 교회는 우리 조춘선 전도사님이 몇 년 간 전임 교역자로 섬긴 교회라는 것 때문에 저와의 관계가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아직도 조 전도사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조 전도사님이 교회 개척을 하면 어디든 따라 갈 것이라는 분이 계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교회와 그 교회 안에 있는 신학교가 저와도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1995년 부교역자 시절, 당시 담임 목사님이 중국의 한 지하 신학교로 강의를 다녀오셨습니다. 귀국하자마자, 난데없이 중국 선교사로 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하셨고, 1996년 초 교단 선교훈련원에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은 그 교회나 부목사인 제게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이었고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간 신학교가 그때 그 목사님이 강의하시고 선교사로 헌신한 바로 그 신학교였습니다. 거기 계신 분들 가운데는 10년도 훨씬 지난 그때의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그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 목사님처럼 나도 여기에서 발목 잡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참 세상이 좁다고 해야 하나요?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관계라는 것이 생각보다는 아주 가깝게 얽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관계’라는 것은 없다는 것,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으면 그것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 속에 살아가는데요, 그렇다면 그 한 사람이 이러한 관계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의 수는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250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동차 판매 기록으로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전설적인 자동차 판매왕 ‘조 지라드’에 의해 알려진 법칙입니다. 그는 직업이 세일즈맨이다 보니 고객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자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객들의 경조사에 참여하던 그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는데요. 그것은 한 사람의 경조사와 관련하여 모이는 사람들의 수가 대개 비슷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의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인생의 중요한 행사에 참여할 정도라면 그 사람과 어느 정도는 친숙한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의 수가 누구에게나 약 250명 정도가 된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그는 고객 한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그 사람의 주변에 있는 250명의 마음까지 함께 얻을 수 있다는 것, 반대로 고객 한 사람을 실망시키면 역시 250명에게도 나쁜 파급효과가 미친다는 것을 알고, 고객을 감동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 했고, 그 결과 전설적인 판매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이론대로라면 여러분의 경조사에 참석하는 사람의 수 역시 평균 250명은 될 것입니다. 즉 여러분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그래도 어느 정도는 친숙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약 250 명이라는 것이죠. 이와 관련하여 오늘 이 시간에 묻고자 하는 것은 그 250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 지금까지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가장 단단하게 평생을 이어갈 관계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며, 그리고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 지금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그리고 그 중에서 여러분과 가장 가깝고 친밀하고 영원토록 변치 않을 관계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 본문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계에 있는 분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과 성도의 특별한 관계 

1)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한 것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오늘 본문 부분은 성도들과 불신자들과의 사이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에 관한 것입니다. 

헬라 지역에 있는 도시로서, 가장 이방적이고 세속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고린도 교회와 그 성도들! 평생을 이방 도시에서 우상숭배와 관련하여 살아온 고린도의 크리스천들이 주님을 믿은 후 과거의 생활양식이나 문화나 사람들과의 관계들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바로 이 문제로 인하여 오늘 본문에서 아주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14~16a).”

여기서 14절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22장 10절, “서로 다른 종류의 두 마리의 짐승에게 한 멍에를 지우지 말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지 않는 자와는 아예 상종조차 말라는 것입니까? 그들과 담을 쌓고 지내라는 것입니까? 사업상으로라도 동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무인도로 가거나 교회를 무인도처럼 만들고 그 안에서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믿는 자들끼리만 인간관계를 맺고 살 수 있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도 오늘 본문은 “의와 불법이 함께 할 수 있느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사귈 수 있느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될 수 있느냐?”라고 아주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귄다’, ‘조화되다’, ‘상관하다’, ‘일치하다’ 등의 단어는 ‘동의, 일치, 조화, 한 몸’이라는 의미로서 어떤 분은 이것을 남녀 간의 깊은 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보고서 이 말씀을 남녀 간의 문제나 성도의 불신결혼을 금지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런 뜻도 있지요. 그러나 이 말씀은 성도가 불신자들과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래도 그들과 삶의 깊은 부분이나 영적인 부분에서까지 하나가 되어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즉 그냥 만나고 함께 일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그들과 내면으로나 영적으로 하나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고린도인들의 생활은 거의 100% 우상 신전에서 예배하는 것이 그 중심이었습니다. 집안의 대소사도 신전에서의 예배로부터, 마을이나 어떤 단체의 모임도 신전에서의 예배로부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거래도 신전에서의 예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니 고린도 교인들의 일상 역시 우상숭배와 거의 모든 것에서 맞물려 있었습니다. 심지어 시장에서 파는 육류 등 대부분의 상품도 우상 신전을 거쳐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고린도 성도들의 삶은 우상숭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성도가 이 세상의 죄악 가운데 거하는 것이나 불신자들과 어울려 구분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좀 더 구체화하여 16절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과 같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우상이 세워지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도 성전을 모독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가 불신자들과 깊이 관계하는 것이 바로 이런 성전모독죄와 같은 것으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 하반 절에서 결론적인 말씀을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레위기 26장 11,12절의 인용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구절이 출애굽기 6장 7절, 예레미야서 31장 33절, 에스겔서 11장 20절, 그리고 스가랴서 8장 8절에 나옵니다. 성도는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입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우선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또 주님과의 관계 때문에 세상의 모든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구별된 성도는 구별되지 못한 사람과 짝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런 차이와 구별을 말한 후 바울 사도는 7장 1절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여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는 말은 성화(聖化)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상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깨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는 명령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아직도 주님을 알기 전의 여러 관계들에 매여서 주님과의 관계에 소홀했고, 그러다보니 거룩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잘못 되고 어리석은 짓입니까? 주님과의 관계 대신에 세상의 헛된 관계에 매이다니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며, 그렇게 살면 잃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요!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모든 관계의 줄을 놓을지라도 결코 놓아서는 안 되는 관계가 주님과의 관계인데, 여러분들은 고린도 성도들처럼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가장 우선으로 여기고, 그 관계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2)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❶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뜨거운 사랑처럼!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우선으로 여기고 그 관계에 최선을 다 해야 하는 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 상당수는 옛날에 아주 달콤하고 그러면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연애편지나 시를 적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루던 밤,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말도 안 되는 유치한 시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 사람의 집 앞을 서성거리며 창가에 잠시 비친 모습만 보고도 행복해 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제 얘기만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상황과 비슷한 연애시가 성경에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구약의 아가서입니다. 아가서는 한 여인을 너무도 사랑했던 한 남자의 감성 넘치는 연애시입니다. 그 주인공은 솔로몬왕 입니다. 그는 술람미 지방의 한 여인을 너무도 사랑했습니다. 그가 사랑에 북받쳐서 지은 시가 아가서인데요. 그래서 아가서 곳곳에는 솔로몬의 아주 진한 사랑의 표현들이 많습니다.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1:10)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1:13~16).“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4:1~5).“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4:9~15).“ 

성도 여러분, 솔로몬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이제부터 관광이나 여행을 다니지 않겠소. 당신을 보았으니까!
이제부터는 애완동물을 키울 수 없어. 당신만큼 사랑스럽고 예쁘고 귀여운 것은 없으니까!
나는 더 이상 꽃을 볼 수 없어.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니까!
난 더 이상 향수를 뿌릴 수 없어. 당신의 향이 내게 묻었으니까!’ 

말하자면 아가서의 내용들이 이런 의미인데, 그 똑똑한 솔로몬이 사랑에 빠져 이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이 이 아가서를 볼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가서가 솔로몬의 연애시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사랑시를 통하여 의도하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가서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사랑 하시는 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듯 하나님께서 그 백성, 즉 성도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❷ 호세아의 지독한 사랑처럼!

그런데요, 여러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솔로몬의 술람미 여인을 향한 사랑 그 이상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호세아서입니다. 호세아는 주전 750년 경, 북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하던 때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호세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메시지는 상당히 독특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 자신의 삶, 그것도 그의 부부 관계가 하나의 메시지가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의 삶을 통해 그 백성, 너무나도 사랑하는 신부와 같은 이스라엘이 지금 어떠한 죄악으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있는지를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이셨습니다. 호세아의 아내는 '고멜'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호세아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으나 속된 말로 바람을 밥 먹듯 피우는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마다 호세아에게 명하여 집을 나가 몸을 팔고 있는 아내를 위해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집으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호세아는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호세아 선지자의 이 불행한 가정사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향한 그 간절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가 불의한 아내를 그 음란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듯, 우상 숭배로 당신이 보는 앞에서 음란함을 자행하던 그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계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셨지요? 이것을 알고 감동했던 유명한 설교자인 스펄젼 목사님은 오늘의 본문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나의 백성!”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저희 하나님” 얼마나 힘이 나는 계시입니까! “나의 백성”과 “저희 하나님!” 이 두 마디 속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속에는 특별하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늘도 하나님의 것이요, 하늘의 하늘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생들 가운데서 통치하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님이 택한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값 주고 사서 자기 것으로 삼으신 다음 이는 “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또 소유 의식이 들어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다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백성은 더욱 더 특별한 여호와의 소유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피로 값 주고 그들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몹시 갈망하시며 하나님께 가까이 오도록 이끄십니다. 하나님은 엄몰하는 많은 물로도 끌 수 없는 영원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때가 아무리 변해도 전혀 감소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눈으로 여러분도 그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고 계십니까? 하늘을 올려다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의 주 나의 하나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아름다운 관계 때문에 하나님은 저의 것입니다. 주께서 이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신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제게 나타나셨을 때 제가 주님과 함께 즐거이 누리게 된 그 거룩한 교제로 인해 주님은 저의 것입니다.” ‧‧‧ 


3. 하나님과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라!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면서부터 아주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 가운데 살아오신 여러분! 여러분이 속한 그 관계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가장 변하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관계는 누구와의 관계입니까?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이지요! 오늘 여러분은 이 사실을 무엇보다 분명히 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 본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했던 경고의 의미도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여전히 이 불신 세상과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에 매여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을 가장 특별한 관계로 여기신다는데, 여러분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도 이 주님과의 관계를 세상 그 어떤 관계보다 우선하고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주님을 가장 사랑하십시오! 주님과의 관계된 일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십시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질문,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대해 “예, 주님 제가 주님을 가장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처럼, 이런 고백과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을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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