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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자유 (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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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 (갈 5:1~12)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갈라디아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했습니다(4:8). 각종 미신에 속박되어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율법에 종노릇했습니다. 율법에 충성하려고 교회를 핍박하면서 가시 채를 뒷발질 하는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행 26:14).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그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양심과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멍에로부터의 자유가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견고하게 서서 다시는 노예 신세의 멍에에 붙잡히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할례 받으려는 유혹 속에 있었습니다. 할례는 유대인으로 개종하기 위한 공적인 의식 절차였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복음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도 지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개종해야 한다고 유혹했던 것 같습니다. 할례 자체만 생각한다면 유대인의 독특한 풍습이고 간단한 포경수술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당시 할례가 함축하고 있는 신학적 의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게 되었음을 인정하는 매우 중대한 것이었습니다(3). 

“만일 할례를 받으면” 어떤 심각한 결과가 초래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3). 할례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인정하고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되게 합니다(4).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끊고 율법과 관계를 맺겠다는 의미이며, 이제 은혜에서 떨어져 나와 행위를 붙들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모두 헛것으로 만들려는 짓입니다.

율법의 행위는 사람을 유혹하는 독특한 매력을 가졌습니다. ‘나는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과 ‘나는 뭔가 했다’는 뿌듯함을 줍니다. 반면에 ‘오직 은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내가 할 수 없다’ ‘내가 한 것은 오직 죄뿐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매력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유행하는 베스트셀러 책들의 내용뿐만 아니라, 모든 인기 있는 인간의 종교들은 율법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인간은 무언가 할 수 있고, 무언가 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지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라고는 전혀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믿고 있는 불신자들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이 매우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 행위의 독특한 매력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에 굳게 서 있지 못합니다. 틈만 나면 다시금 율법적 행위의 종노릇에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혜만을 붙들려는 의식에 깨어있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우리가 해 놓은 것과 하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의지하려 합니다. 행위들을 뿌듯해하고 자랑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고 앞으로도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느 정도는 기쁘시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할 빚이라도 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행위가 실망스러우면 ‘그렇게 하지 못했고 할 수 없고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망조라고 절망합니다. 자기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한 순간에도 율법은 매력적으로 유혹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다른 사람을 의지고 그의 행위를 기대하게 합니다. 이것이 종의 멍에를 맨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서 계명 교회에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교인들의 성품이 보다 뛰어나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율법을 더 잘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까? 자랑할 수 있을 만큼 탁월한 어떤 존재가 있었기 때문입니까? 우리는 다만 비참한 죄인들일 뿐입니다. 우리의 성품도 죄악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동안 이 교회가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행위에 무슨 의로움이 있었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를 이끌어왔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서로에게 상처주고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더욱 확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이유도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행위로 충분히 얻어낼 수 없었던 은혜를 보충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나 선한 의도가 조금이나마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게 만들며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만듭니다. 뭔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강하게 주장할수록 드러나는 것은 죄인 된 모습이며 돌아오는 것은 상처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외에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사람이든 모임이든 프로그램이든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기대하고 의지할 수 있는 분도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5). 그들뿐만 아니라 성도라는 존재는 이미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드는 사람이며, 온전히 의로워질 것 또한 믿음으로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존재가 다시금 ‘율법을 좇아’ 의로워 지기를 소망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반역입니다. 다시금 행위를 신뢰한다면 은혜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믿음이 요동하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모습입니까? 성도는 그저 순수하고 소박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지면 족합니다. 프로그램이 화려해야만 혹은 프로그램이 좋기 때문에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 프로젝트나 무할례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6). 

성도가 믿음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때에는 매우 수동적이고 정적인 모습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믿고 가만있기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가 가진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매우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참으로 믿음을 가졌다면 그가 가진 믿음은 사랑이 그의 삶에 역사하게 합니다. 율법의 종노릇하는 사람은 매사에 율법에 비추어서 정죄하는 모습이 그의 삶에 드러날 것입니다. 율법 조목조목을 들추며 따지고 정죄할 것입니다. 율법의 종노릇하는 그도 피곤하고 타인도 피곤할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그의 삶에 사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할수록 더욱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기 때문에, 비록 잘못된 행위를 볼지라도 정죄하기 보다는 소망 중에 사랑을 담아 기도하며 섬길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성령을 체험한 초기 시절에는 이와 같이 믿음의 달음질을 잘 하였습니다. 출발을 은혜로 멋지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의 진리만 굳게 붙들지 못하도록 훼방을 받았습니다(7). 그러한 권면은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8). 달리 말하면 사단의 역사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9)는 말처럼 믿음에 아주 적은 율법이라도 첨가하면, 은혜에 아주 적은 행위라도 첨가하면 온 덩어리가 부패하게 됩니다. 

오늘날은 관용의 시대라서 가능하면 두 가지 상반된 견해들 중에서 좋은 점만 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가지를 전적으로 배척하면 관용적이지 못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우리 삶에서 적절한 방법일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 진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약간만이라도 행위와 율법을 주장하게 되면 복음 전체가 왜곡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손상되고 멍에 아래 있는 종이 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리스도의 유익은 몽땅 없어지게 되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모든 사람은 종의 멍에를 메고 살았습니다. 은혜보다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익숙하고 오래된 습관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에도 뭔가에 메여있으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율법적으로 강요하고 강제하면 편한 반면에 자유를 주면 불안해합니다. 빡빡한 프로그램이 있어서 한 해가 정신없이 돌아가도록 메어 놓으면 좋아하지만, 단순하게 말씀만 가르치고 자유를 주면 오히려 불안해하고 답답해합니다. 카리스마를 가지고 무섭게 강요하는 사람의 권위는 인정하고 순종하기를 잘하는 반면에,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며 섬기는 사람의 권위는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보여준 모습이지만, 이 시대 성도들의 모습에 비추어도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속박하는 종교가 아니라 자유케 하는 종교입니다. 각종 미신들과 징크스들 점과 해몽과 궁합 등등으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수많은 겉치레와 의식들에 묶여 있는 양심을 풀어서 자유롭게 합니다.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혹은 ‘반드시 저렇게 해야 한다’는 율법적인 마음에서 놓여나 자유인으로서 자발적이고 자원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종교입니다.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존해서 그분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합니다. 아무런 의식절차가 없어도 그분의 말씀만으로 즐거워하고, 그분 자체를 즐기면서 기쁨으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복음을 왜곡하여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죄를 향한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이 자유는 결코 사람을 방종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피를 흘리며 자유롭게 하셨으니 자유 안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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