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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도우심 (롬 8: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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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도우심 (롬 8:26~30) 
 

성령의 강림(聖靈降臨)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10일째 되는 날이며, 예수님의 부활의 날로부터 50일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을 오순절(五旬節)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제한된 육체로서가 아니라 이제 영으로써 우리와 같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영으로 우리에게 오신 목적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입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빌리 그래함은 “그리스도인들의 90%가 영적으로 패배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성령의 도움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도와주시고 위로하고 안내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교회를 처음으로 출석하거나 예배에 오거나 또는 약한 믿음이지만 계속되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고전 12: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의 도움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1.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

어떤 성도는 기도를 잘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우리의 기도의 본질에 있어서 무엇을 달라고 물어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내용을 보면서 탄식하고 계실 정도로 기도의 목적과 방법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에서 바울 자신도 여기에 해당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기도에 있어서 어리석음과 허약함 그리고 마음의 산만함과 무능력 등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타락 이래 영혼까지 부패하고 손상당해 그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의 연약함이란 육체의 유한성 및 유약성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적 죄의 성향을 말합니다. 이러한 죄성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범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돕다’란 말은 ‘상대를 붙들어주다’의 뜻입니다. 

초보자 운전자가 옆에 있으면 옆에서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이 험하고 어려운 데에는 초보운전자 내리고 유능한 운전자가 운전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기서 우리를 위한 중보 기도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더욱더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녹여버리시는 것입니다. 

(롬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처럼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내적 조명과 중보의 기도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기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놀이터의 자동차와 자전거는 어린의 조작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력의 힘으로 움직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고발하고 우리를 유죄로 몰아가지만 예수님과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변호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죄 값을 치루었기 때문에, 또 그가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은혜를 누리 수 있는 것입니다. 

(요 14:17,18)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성령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는 지식적 경험과는 달리 초경험적이고도 직감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은 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나 아니면 삶의 체험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간에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이전에는 세상과 자신을 사랑하였으나 성령으로 거듭나고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께 헌신하는 성도의 변화된 태도를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부르심은 입은 자는 세상을 사랑하는 반대되는 말로서 세상의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복종하는 새생활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은 입은 자들은 결단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 이 말을 의역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사 결국에는 선한 결과가 빚어지게끔 역사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천지만물을 주장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심을 강조해 주는 표현입니다. 

요셉을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이르게끔 만든 동기가 되도록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나게 해 주십니다.(창 27장 - 41장) 

창 45장 5, 8절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와 전화위복(戰禍爲福)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에게 화가 바뀌어 도리어 복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는 요셉의 경우처럼 현세적인 유익을 위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영적이요 영원한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즉 모든 사사건건을 통하여 우리의 영적인 삶과 하늘의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유익을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광야생활을 통하여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영적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또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가나안 복지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인 그대로 연약한 가운데 있으나 성령께서 지켜 주셔서 마침내 죄악의 험한 파도를 헤치고서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자신의 체험과 모든 성도들의 체험에 비추어 보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성령은 개인의 인생살이를 허물어 버리고 그 위에 하나님을 향한 탄탄대로를 구축한다.” 
  

3. 구원에 이르도록 도우시는 성령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본 절은 성령께서 끝까지 성도를 보호하사 온전히 구원에 이르도록 역사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하여 아무런 걱정이나 의심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믿음에 확신을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에 대하여 믿고 의지할 뿐아니라 구원의 소망과 확신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불 때에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성품이 착하다고 하나님을 쉽게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성령의 도움을 입어야 합니다. 

(딤후 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궁극적 구원과 영광을 확신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약한 믿음 때문에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 가운데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인생길을 되돌아 보면서 어려울 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과 동행했던 발자욱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때에 성도를 안고 동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 토저 “보통 교인들이 성령에 대한 사고는 매우 희미하기 때문에 그들은 마치 성령이 존재치 않는 것처럼 살고 있다.” 

토마스 맨톤 “불은 물을 끼얹거나 연로를 대주지 않으면 꺼져 버린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불 위에 물을 끼얹는 것과 같이 죄에 묻혀 살거나, 난로에 연료를 넣지 않는 것처럼 은혜와 은사를 계속 계발하지 않으면 소멸되어 버린다.” 

  
결 론 

사람은 세 가지의 부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연인, 둘째는 이성 주도적인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셋째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진 성령의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누구에 의해서 주장되는가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을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더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생각, 행동, 생활, 계획 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승리의 삶을 뜻합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다 같이 따라 합시다. “주님 내 마음 문을 엽니다. 나를 도와 주세요” 

그러면 우리의 삶에는 어떠한 변화가 옵니까?

성령강림은 창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에 최초의 언급이 있으나 사도행전에서 시작된다. 성령의 사건은 모든 혼동과 공허를, 어두움과 흑암에서 광명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성령은 1) 기도의 공허함에서부터, 2) 모든 일의 두려움에서부터, 3) 신앙생활의 모든 의심에서부터 해방 받는 성령강림을 경험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하여 오신 성령님을 환영하고 마음에 모시고 그분이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와 생각 그리고 고집을 버리고 그분을 신뢰하며 의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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