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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빛을 비추는 교회 (마 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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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비추는 교회 (마 5:14~16)

 
  얼마 전 해외 토픽 기사를 보면서 놀랐던 일이 있습니다. 일본 수상이 TV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광고를 하는 것입니다. “제발 미국 차를 타 주십시오. 미국 농산물을 사서 드십시오” 다른 사람도 아닌 일본 총리가 일본 국민들을 대상으로 국민의 혈세를 들여서 광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어떤 일본인도 시비를 걸지 않더란 말입니다. “매국노라느니, 미국의 앞잡이라느니, 국민의 혈세로 쓸데없는 광고를 하고 있다느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상황이 다릅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미국산 소고기를 안심하고 먹게 해 드릴테니 믿어달라고 호소를 합니다. 국민들이 믿지 못하고 촛불을 들고 재협상을 하라고 난리입니다. 대통령 물러가라고 야단입니다. 

  도대체 무슨 차이입니까? 한 마디로 소통의 문제입니다. 신뢰의 문제입니다. 일본 국민들은 수상이 저렇게 하는 것은 미국을 위한 것 같지만 결국은 일본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이 왜 그렇게 선뜻 협상을 해 주었는지 그 뜻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속마음을 믿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소통의 문제, 신뢰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소통이 안 되면 신뢰가 깨집니다. 신뢰가 깨지면 서로 적대적이 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대립하고 각을 세우고 서로 싸웁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형편이 이와 같습니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소통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대립하고 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봉사를 압도적으로 많이 하고 있습니다. 노인복지, 장애인 복지, 아동 복지, 정신 지체자 복지 등 우리나라 사회복지 분야를 9개 분야를 종합해서 통계 조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종교분야를 보면 기독교가 64.4%, 천주교가 28.2%, 불교가 4.9%, 원불교가 2.1% 등입니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살피고 섬기는 일은 종교가 하는 일들 가운데 기독교가 약 2/3 정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입니다. 기독교에 비해 절반도 못 미치는 천주교에 비해서 이미지가 훨씬 부정적입니다. 기독교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미미한 불교보다도 부정적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마 5:1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등잔불로 방 조명을 했습니다. 접시 모양의 그릇에 기름을 붓고 심지를 담가서 등잔불을 만들었습니다. 성냥이 없던 시절이라 불은 늘 켜두었습니다. 사람이 방안에 있을 때는 등잔을 등경이라 부르는 나무로 만든 등잔대 위에 올려놓아 방 전체를 환하게 비추게 했습니다. 사람이 출타할 때는 안전을 생각해서 바닥에 흙으로 만든 말 아래 놓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방은 무척이나 어둡게 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등잔불을 등경 위에 두지 않고 말 아래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빛을 사회 전체에 비추지 않고 교회 안에만 비추게 하고 있는 점입니다. 사회와 높은 담을 쌓고 자기들끼리만 그 안에서 빛을 쪼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주변 사회가 어둡고, 그 사회가 교회를 비판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등잔불을 등경 위에 높이 두어야 합니다. 그 불빛으로 온 세상을 밝혀야 합니다. 그 빛의 혜택을 온 누리가 누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세상과 깊은 소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52주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골짜기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빛으로 이 지역을 비추고, 우리 사회를 비추고, 나아가 온 세상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더욱 빛을 비추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빛이 우리 교회 내부에만 비추는 것이 아니고 주변 사회를 위해 더 나아가 온 세상을 위해 비추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비춰야 할 빛은 어떤 빛일까요? 


생명의 빛 

  한번은 여행 도중 해바라기 밭을 지난 일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큰 해바라기 밭을 본 일이 없습니다. 족히 수천 평은 더 돼 보였습니다. 제 키 만한 해바라기들이 그 밭이 가득 서 있었습니다. 마치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장관인 것은 그 많은 해바라기들이 하나도 예외 없이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군대서 제식훈련하듯 모두 같은 자세로 같은 방향을 보고 서 있는 것입니다. 

   해바라기들이 왜 저렇게 서있을까요? 빛을 쪼이기 위해서입니다. 빛을 받아야 생명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과 전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계절성 우울증이 있다고 합니다.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다가오면 몸이 나른하고 밥을 많이 먹고 잠만 자고 싶은 현상이 생깁니다.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하고 쓸쓸한 심정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에 따라 심해지면 대인관계를 기피하고 집에 틀어박혀 자살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 원인을 분석해 보면 뇌 속에 화학물질의 불균형 때문입니다. 세라토닌이란 물질이 현격하게 줄어들고, 멜라토닌이란 호르몬 분비가 충분치 않습니다. 이것이 우울증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빛을 많이 쪼이면 다시 세라토닌이 늘어나고 멜라토닌 호르몬 분비가 충분해 져서 우울증이 호전됩니다. 그래서 이런 환자들에게는 빛 치료를 권합니다. 

   그렇습니다. 빛이 있어야 사람의 정신도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빛이 사람의 정신적 생명을 살립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생명 곧 영생도 빛을 쪼여야 합니다. 하나님 떠난 심령들은 영적인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염려 근심 속에 한숨 쉬며 살고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며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영적 생명의 빛이 필요합니다. 

   요 1: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리고 8:12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세상에 생명의 빛이 임하여 이 빛을 받는 자는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이 빛을 받으면 영적 생명이 시작됩니다. 그 영이 살아나고 그 영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죄의 짐을 털어버리고 참된 평안을 누리며 풍성한 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하여 이 생명의 빛을 비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이 세상에 생명의 빛이 가득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생명의 빛을 전하는 일에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이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진리의 빛 

   창 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천지 창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의 상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만들어지기 직전 이 우주는 깊은 어둠 속에 잠겨있었습니다. 그 깊은 어둠이 지배하는 곳에 혼돈과 공허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혼돈이란 히브리어로 ‘토우’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 질서가 잡히지 않은 상태, 어떤 형태를 이루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뒤죽박죽된 상태를 말합니다. 

  지난 5월 미국 캘리포니아 대법원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했습니다. 이를 틈타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겸 코미디언인 매거릿 조란 사람이 동성결혼 사업에 뛰어들어답니다. 우선 샌프란시스코 시로부터 결혼 주례 허가를 받았고 이미 두 커플의 결혼 주례를 섰답니다. 케이블 TV ‘더 조 쇼’를 진행하면서 동성결혼 사업을 활발하게 펼쳐갈 생각이랍니다. 동성연애도 모자라 그것을 합법적 결혼으로 인정하고 또 적극적으로 그 사업을 펼치겠다니요. 그야말로 세상은 요지경 속입니다. 

   바로 이것이 혼돈입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이 뒤죽박죽 섞여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기뻐하실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한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허란 히브리어로 ‘보후’란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텅 빈 상태를 말합니다. 아직 의미있고 가치있는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현대사회를 꼬집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정신병자가 밤에 몰래 백화점에 들어갔답니다. 밤새도록 장난을 했답니다. 가격표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 붙인 것입니다. 만 원 짜리에는 100만원이라고 붙여놓고, 100만 원 짜리에는 10만원이라고 붙여놓고... 그래서 가격표가 뒤죽박죽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음 날 아침에 백화점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는데 사람들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그 가격표대로 물건을 샀고, 점원들도 그 가격표대로 물건을 팔았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무엇이 귀하고 또 무엇이 천한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되어있습니다. 유흥비를 구하겠다고 유부녀를 납치해 돈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그 딸마저 불러내서 살해합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잠깐의 쾌락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 것입니다. 

   창 1:3-4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께서 이 어둠으로 가득찬 세상에 빛을 만드셔서 어둠을 물리치셨다는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를 바로잡으셨다는 것입니다. 

   요 1:14를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니 그곳에 진리가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시면 그곳에 진리가 가득하게 됩니다. 그 진리로 참과 거짓이 나뉘고 선과 악이 분별이 되어 혼돈이 사라집니다. 그 진리로 올바른 가치관이 세워지고 공허가 사라집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이 진리의 빛을 세상에 비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드리워있는 어둠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춰서 이 세상의 혼돈과 공허를 바로잡고 이 땅의 어둠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옳은 것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빛 

   막 6:3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께서 주님을 찾아 나온 그 많은 사람들 하나하나를 보시며 목자 없는 양 같이 생각이 드셔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목자 없는 양이란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목민입니다. 양이나 소와 같은 가축을 기르며 삽니다. 이스라엘 땅은 물이 부족하고 또 뜯을 풀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을 몰고 마실 물을 찾아 먹일 풀을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다닙니다. 양들은 그 목자를 따라다니며 하루하루를 생존해 갑니다. 

   그런데 때로는 목자가 강도를 만나거나 병에 걸리거나 늙어 세상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 양들만 홀로 남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양들은 생명을 보존키가 어렵습니다. 양들은 멀리 내다보지 못해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양들은 아무런 방어수단이 없기 때문에 강도를 만난다든지 포식자를 만나면 속수무책입니다. 정말 목자 없는 양들은 불쌍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양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헬라어로 불쌍히 여기다는 말은 이런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창자가 끊어질 듯 아프다” 우리말로 “애간장이 끊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보실 때, 세리나 창기를 보실 때, 귀신들리고 병든 자를 보실 때, 믿음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실 때,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실 때 저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창자가 끊어질 듯 아파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저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빛을 비추어야 하겠습니다. 

   1997년 8월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세상 떠난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는 영국인들 뿐 아니라 많은 세계인들 가슴속에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사실 다이애나는 왕 세자비로서 품위를 손상시켰고, 왕 세자비로 외갓 남자와 염문을 퍼뜨려서 지탄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결혼한 지 15년 만에 이혼을 해서 어찌 보면 실패한 인생은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름답게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내민 따뜻한 사랑의 손길 때문입니다. 그는 에이즈나 나병환자와도 서슴치 않고 손을 맞잡았습니다. 지진아들을 친엄마처럼 포근하게 감싸 안았으며, 생활고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주었습니다. 때로는 두 어린 아들 왕자들을 데리고 병원과 무료급식소, 홈리스 피플 집단수용시설을 방문하며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또한 약 2,000만개의 지뢰가 묻혀있는 앙골라를 찾아가 직접 지뢰매설지역을 왕래하면서 지뢰의 반 인륜성과 위험성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다이애나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사랑의 빛으로 저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이래야 합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 그들을 찾아 따뜻한 손길을 펼쳐야 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사랑의 빛을 비춰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앞으로 이 세상을 향해 더욱 사랑의 빛을 비추어야 하겠습니다. 이러기 위해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따뜻한 사람의 손길을 펼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난 52년 전에 이곳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52년 동안 은혜로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여기 교회를 세우신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빛, 진리의 빛, 그리고 사랑의 빛을 비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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