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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진 그릇이라 해도 (호 8: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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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그릇이라 해도 (호 8:7~14)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다. 곡식 줄기가 자라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여문다고 하여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거두어 먹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먹히고 말았다. 이제 그들은 세계 만민 속에서 깨어진 그릇처럼 쓸모없이 되었다. 외로이 떠돌아다니는 들나귀처럼, 앗시리아로 올라가서 도와 달라고 빌었다. 에브라임은 연인들에게 제 몸을 팔았다. 이스라엘이 세계 열방 사이에서 몸을 팔아서 도움을 구하였지만, 이제 내가 이스라엘을 한 곳에 모아서 심판하겠다. 외국 왕들과 통치자들의 억압에 짓눌려서 이스라엘이 야윌 것이다. 에브라임이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을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난 제단에서 더욱더 죄가 늘어난다. 수만 가지 율법을 써 주었으나,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여겼다. 희생제물을 좋아하여 짐승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지만, 그들이 참으로 좋아하는 것은 먹는 고기일 따름이다. 그러니 나 주가 어찌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겠느냐?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고, 그들의 허물을 벌하여서, 그들을 이집트로 다시 돌려보내겠다. 이스라엘이 궁궐들을 지었지만,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를 잊었다. 유다 백성이 견고한 성읍들을 많이 세웠으나, 내가 불을 지르겠다. 궁궐들과 성읍들이 모두 불에 탈 것이다.]

•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리는 격(?)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요즘 마음이 심란하십니까, 시원하십니까? 세상에 눈 감고 귀 막고 산다면 모르겠지만, 대개의 경우는 가슴에 뭐가 걸린 듯 답답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여름 산을 오르는 재미가 뭔지 아십니까? 습도가 높은 날은 마치 땀 속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는 것처럼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산에 오르는 까닭은 계곡이나 능선에서 만나는 시원한 바람 한 점 때문입니다. 그 맛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걸 표현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흔히 ‘그래, 이 맛이야’ 하고 말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뭔가 시원한 바람 한줄기 같은 말씀을 전하고 싶은데, 현실을 향한 눈은 피곤하기만 합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물가는 고유가 시대를 실감케 합니다. 정부는 아직 연 7%의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 세계 7대 경제 강국으로의 도약이라는, 소위 747정책을 접진 않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시큰둥합니다. 지금 상황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금강산 관광을 하던 50대 주부가 피격되는 일 때문에 남북관계는 더욱 얼어붙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급류를 건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혼란스러울수록 근본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까닭은 근본으로 돌이키는 길을 발견하기 위함입니다. 호세아가 살던 시대의 이스라엘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주전 8세기는 중근동의 정치적 지형이 급격이 변하던 시대입니다. 북방의 강자로 떠오른 앗시리아와 전통의 강자인 이집트가 경합을 벌이는 틈바구니에서 작은 나라들은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영토를 확장하려는 앗시리아의 야망이 커지면서 이스라엘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강대국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앗시리아에게 굴복하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집트의 힘을 빌어 자기를 지켜보려고 애썼습니다. 약소국의 비애입니다. 6자 회담의 틀 안에서 민족의 장래를 논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종교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상처 입은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정치 지도자들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해 애써야 하겠지요? 그런데 호세아의 예언은 준엄합니다. 우상에게 엎드리는 백성들의 죄를 엄하게 꾸짖고, 외세에 의존해 난국을 수습하려는 정치인들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를 일깨웁니다. 값싼 위안도 평화에 대한 거짓 약속도 없습니다.


• 땅이 너희를 삼킬 것

호세아는 세 가지의 농업적인 이미지를 통해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다.” “곡식 줄기가 자라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여문다고 하여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거두어 먹을 것이다.” 뒤의 두 이미지의 의미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둔다’는 말이 문제인데, 신명기 법전이 그 뜻을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밭에 많은 씨앗을 뿌려도, 메뚜기가 먹어 버려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당신들이 포도를 심고 가꾸어도, 벌레가 갉아먹어서 포도도 따지 못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못할 것이며, 당신들의 온 나라에 올리브 나무가 있어도, 그 열매가 떨어져서 당신들은 그 기름을 몸에 바를 수 없을 것입니다.”(신28:38-40)

씨를 뿌리지만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하는 농부들처럼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은 백성들은 ‘어리석음’이나 ‘무의미한 행동’의 씨를 심어 파국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호세아는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상 앞에 절하고, 외세에 의존해 얻을 열매는 파멸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광풍에 휘말릴 이스라엘의 처지를 “깨진 그릇”에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깨진 그릇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레위기는 깨진 그릇 신세가 되는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너희는 망하여, 다른 민족 사이에 흩어질 것이며, 원수들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다.”(레26:38)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는 말은 참 통렬합니다. 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게 봄은 오는가>를 아시지요? 시인은 봄 신명에 지펴 들판을 걷고, 바람 소리, 종다리 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보고, 삼단 같은 머리를 빗은 보리밭도 보고, 어깨춤을 추는 도랑물 소리도 듣고,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인의 마음은 돌연 현실의 어둔 그늘에 뒤덮입니다.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긴” 시대라는 자각 때문입니다. 땅을 빼앗긴 자는 봄조차 빼앗깁니다. 바로 이것이 “깨진 그릇”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야긴 왕을 바라보며 “이 사람 고니야는 깨져서 버려진 항아리인가? 아무도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는 질그릇인가? 어찌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는 낯선 땅으로 가족과 함께 쫓겨나서, 멀리 끌려가게 되었는가?”(렘22:28)라고 탄식합니다. 


• 이집트 길을 걷는 이들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호세아는 종교의 타락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지방마다 성소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북부의 열 지파를 묶어 새 나라를 세운 여로보암은 많은 지방 성소들을 세움으로써 국민들의 분출하는 종교적 욕망을 채워주려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을 중시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지방 성소의 존재 자체가 불법이었겠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의 성소를 아주 소중히 여겼습니다. 문제는 그 성소가 성소 구실을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삶을 성찰하고, 통회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곳이어야 할 성소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 본래의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채 폭식과 폭음의 현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성소에 와서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 제사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시51:17)이라고 하셨습니다. 남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찢긴 마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입니다. 예수님은 제단에 제물을 바치려다가 누군가가 내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가서 그와 더불어 화해한 후에 돌아와 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4). 참회와 용서와 화해가 전제되지 않은 희생제물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그것은 제의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예배에 잘 참석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 마음의 심지가 꼿꼿하지 않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예배란 내 마음과 내 뜻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채우는 과정입니다. 토마스 머턴은 우리 마음은 번쩍이는 것만 보면 물어와 제 둥지를 채우는 까마귀를 닮았다 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채우고 있는 잡동사니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염려, 원망, 이런 저런 판단, 자기 연민, 불신, 부정적 생각, 두려움과 염려, 해야 할 일들과 바라는 일들……우리 마음에는 여백이 거의 없습니다. 감정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균형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예배란 우리 속에 있는 혼돈을 질서로 바꾸어주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행위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야 할 합당한 예배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롬12:1)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꾸만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걷는 이들이 지도를 꺼내들고 방향을 가늠하는 것처럼,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에 길을 조회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욕망을 거스르는 길을 가리킵니다. 장엄한 종교 의례가 수행되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경청되지 않고 있습니다. 비극입니다. 그런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호세아는 하나님의 탄식을 전합니다.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고, 그들의 허물을 벌하여서, 그들을 이집트로 다시 돌려보내겠다.”(13)

화려한 궁궐을 짓고 요새화된 성읍을 지어보아도 소용없습니다. 자기들의 창조주를 잊는 이들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자유의 순례자가 아니라, 이집트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욕망의 쳇바퀴를 돌리느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자기 혁명의 길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살이에 우리는 지쳤습니다. 부드럽고 숫된 표정의 사람들을 만나보기 어렵습니다. 이제 우리 삶을 새로운 기초 위에 세워야 할 때입니다. ‘깨진 그릇’ 같은 우리라 해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깨진 그릇임을 인정하느냐입니다. 

며칠 전에 연대 세브란스병원 원장인 박창일 박사님과 잠시 환담을 나눴습니다. 그는 재활의학과 전문의였습니다. 그는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자기에게는 큰 복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중도에 장애를 입은 이들을 돌보고, 또 그들이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우면서, 그는 삶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것인지를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장애를 입기 전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달란트가 재활과정을 통해 드러나면서 신명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다고 합니다. 아주 천진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고, 운동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열어가는 이들은 그야말로 삶의 신비를 드러내는 표징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처입고, 고통을 겪고, 온갖 시련이 닥쳐와 우리 마음이 쉬지 못할 때, 그래서 절망의 어둠이 우리를 뒤덮을 때야말로 영적 성장의 기회입니다. 믿음 안에서 수용된 고통은 우리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들입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깨진 그릇 같은 우리 마음에 아름다움의 씨를 심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기 혁명의 시작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깨진 그릇’ 신세입니다. 정치, 경제, 언론, 문화, 교육, 종교 등 모든 국면에서 일치된 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의 전 부문에 하늘의 뜻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기독교 성시화 운동을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권력의 오만을 경계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인권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자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정치와 사회 시스템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 분명히 보일 겁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듯이, 지도자들은 사회 계층상 낮은 자리에 처한 이들의 자리에 설 때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자리에 설 때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세계 몇 위의 경제대국이라고 자랑만 하지 말고, 가난한 나라를 돕는 일에 인색하지 않은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나라를 든든히 세우는 비결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부자유와 얽매임의 이집트를 향한 길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기준음에 맞추어 악기를 조율하는 연주자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음 삼아 우리 삶을 자꾸 조율해 나가야 합니다. 설교의 서두에 시원한 소식을 듣지 못해 답답하다고 말했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나는 세상을 보며 탄식하시는 주님의 한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잠언에 나오는 말씀도 듣고 있습니다.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잠25:13) 이 무더운 여름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곧 주님께 바치는 시원한 냉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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