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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다 (창 22:1~14)


[에드워드 M. 할로웰(Edward M. Hallowell)]이라는 미국의 주의력결핍장애 전문 정신과 의사가<창조적 단절(Creative Break)>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현대인은<과잉정보>와<디지털 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는 분명 치료해야 할 질병의 수준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현대인들의 정신은 손에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감에 휩싸이고, 게임이나 인터넷 등 사이버 공간에 중독돼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주의력과 집중력을 도둑맞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 증상을 몇 가지로 지적합니다. 

첫째는 기다리지 못하고 너무 서두르는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특히 속도를 중시하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현대인들은 점점 더 조급해지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고 연구해 볼 시간조차도 기다리지를 못해서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되는데 너무 빨리 판단해 버리고 너무 빨리 말해 버립니다. 모든 생활 자체가 속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둘째는 과잉정보로 인해서 가치관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오늘 날 우리는 보는 것, 듣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이것도 생각하고 저것도 생각하고 복잡합니다. 그런데 이 과잉정보를 조절하지 못하고 삽니다. 보고 듣는 것은 많은데 적절히 사용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런 증상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는데 하나는<정보중독증>이라고 했습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당장 알지 못하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의 메일을 수시로 확인하고 주가변동이나 최신뉴스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특히 TV나 영상매체에 빨려들게 되면 목적 없이 리모컨을 계속 돌리거나 클릭을 멈추지 못하여 모니터를 떠나면 불안해지는 일명<스크린 서킹(Screen sucking)>증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무엇이든 알아야 불안하지 않다는 정보중독은 과잉정보를 부르고 뇌는 과부하에 걸려 실수를 연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보에 대한 현대인의 또 하나의 증상은<멀티태스킹 형 주의력결핍증>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다른 일을 찾으려고 하는 증상입니다. 공 두개로 테니스 경기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려는 욕심에 어느 것도 효율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바쁘기만 할 뿐 성과 없는 하루를 보내는 삶을 말합니다. 너무 많은 정보는 가지고 있는데 가진 정보만큼 처리하려하다 보니 다중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숙명에서 발생하는 질병입니다. 

보고 들은 것을 다 하려고하니 어느 것 하나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할로웰]은 창조적인 생각은 단절된 공간에서 떠오른다고 합니다. 세계갑부의 수위를 다투는 투자의 귀재[워렌 버핏]은 컴퓨터도 없는 책상 앞에 앉아서 수천만 달러의 투자 결정을 내린다고 합니다. [빌 게이츠]역시 외딴 별장에서 일주일씩 외부와 단절된 시간(Think Weekend)을 보내며 MS의 미래 전략을 짠다고 합니다. 사활이 걸린 일을 판단할 때는 오직 그 한 가지에 집중하기 위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무슨 말이냐 하면 이처럼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위해서 불필요한 정보는 끊을 수 있는 집중력을 가지는 것이 바로<창조적 단절>이라는 말입니다. 

현대인들이 주의력과 집중력을 잃어버린 세 번째 원인은 온갖 잡동사니처럼 쌓인 걱정과 두려움이 일상화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사서 할 때 이 속담을 인용합니다만 또 한 가지의 해석을 해보자면 이건 어떻겠습니까? "해버릇하면 버릇된다."는 말입니다. 걱정을 사서 하다보니까 걱정하는 것이 평생의 운명처럼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매사가 걱정입니다. 이건이래서 걱정 저건 저래서 걱정입니다. 걱정하느라고 집중을 못하고 주의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과 갈등과 걱정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한 순간에 내려놓아야 한다면 도대체 무엇부터 내려놓아야 할지 분간이 안갑니다. 이건 소중해서 못 내려놓고, 저건 불안해서 못 내려놓고 사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왜냐하면 내려놓는다는 것은 버린다는 것이거든요. 포기한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니 어디 쉽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결정적인 고민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 온 아브라함입니다만 그 대부분의 문제는 외부로부터 왔고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도와주시고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당하는 문제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다름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고 흔들렸던 적이 있습니다. 언제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기다림에 흔들렸습니다. 믿음은 기다림이요, 기다림은 믿음이거든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는 했는데 25년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하나님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하는 마음으로 아브라함이 이 기다림 속에서 좀 휘청거렸지 않습니까? 실수를 좀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환경에 흔들렸습니다. 땅을 주신다고 했지만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으로 피난을 가버리는 휘청거리는 믿음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여러분, 때로는 환경이 우리 믿음을 흔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러한 실수를 보면서'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좋았을 걸...흔들리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흔들리지 말아야 됩니다.

어쨌거나 이런 과정을 거쳐서 얻은 아들인데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다른 아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달랑 하나뿐인 아들인데 죽여서 바치라니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어도 이것만은 못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보세요. 중요한 순종이 나옵니다. 모리아 산에 왔을 때 하인들을 산에 올라오지 못하게 합니다. 힘이 좋아서 이삭을 묶었다 하더라도 하인들이 양손을 잡아 버리거나 말리면 아들을 바치고 싶어도 못 바치기 때문에 방해가 될 수 있는 것들은 미리 다 제거하고 올라가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생각해보면 참 대단한 아브라함입니다. 자 하지만 여기까지 오기까지 어떠했겠습니까? 처음에는 마음을 굳게 먹고 출발했지만 사흘 길을 걸어갈 때 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100살에 얻은 아들, 그것도 25년 만에 얻은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러 가고 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아마 차라리 이삭이 눈치라도 차리고 밤중에 자기 모르게 멀리 도망이라도 가버렸으면 제물로 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되니까 좋겠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아마 자기가 죽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키엘 케고르]는 이 장면을 두고"3일 동안 걸어가면서 아브라함은 먼저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시간이었고, 자신을 십자가에 먼저 못 박아야 했던 걸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만큼 고통의 길이요, 한숨의 길이요, 아픔의 길이요, 눈물의 길이었습니다. 자식이 죽었다는 말만 들어도 슬플 텐데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한다니 이 보다 더한 아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감히 상상이나 갑니까?

<애견사망증후군>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신종 정신질환의 한 종류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집에서 기르던 애완견이 죽으면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합니다. 애견 장례식장도 있습니다. 염도 하고 옷도 입혀서 화장을 합니다. 사람 장례식과 똑같이 합니다. 중국에서는 작년 한 교수가 애견의 장례식 비용으로 약 1,250만원을 들여서 호화 장례식을 치른 적도 있습니다. 그래놓고도 허전해서 못살겠다고 자살까지 한다니 자식처럼 여기고 함께 먹고 자고 살았다는 점을 중요시하는 동물애호가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너무하다 싶습니다. 

일본 도쿄대 농학부 교수인[하야시]박사는"동물을 수단으로 보고 생명을 우습게 보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동물이 가진 본성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 주인의 마음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래도 동물은 동물이요, 인간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동물에게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서 인간위의 동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하여간 집에 기르던 동물이 죽어도 이리 슬퍼하거늘 하물며 자식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이삭은 말로 할 수 없는 소중한 자식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아브라함은 이토록 자기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 더 없이 소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려놓으라 하실 때에 주저 없이 내려놓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인생에 아들이삭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자식의 심장을 향해 칼을 내리꽂을 때 아마 눈물이 제단 위에 누운 이삭의 몸 위로 떨어졌을 것이고 어쩌면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관계가 이 한 방울의 뜨거운 눈물로 끝나는 인사였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욕심과 영화와 소망을 다 포기하고 칼을 높이 들고 이삭의 심장으로 내리 꽂을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그의 손을 붙잡습니다."사랑하는 아브라함아! 네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네가 나를 이렇게 신뢰하는구나. 이제는 내가 너에게 복을 주마. 아니다 너뿐만 아니라 네 후손들에게까지 복을 주겠다. 행하는 일마다 형통케 하고 내가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겠다."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아브라함에게<여호와 이레>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의 더 놀라운 은혜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의 더 큰 선물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말 되는 것만 가려가면서 순종하면 순종이 아닙니다. 말 안 되는 것을 순종해야 진정한 순종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기 원하신다면 내려놓을 것을 먼저 내려놓으십시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무리 답답한 일이 있어도 얼마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의 음성을 크게 듣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에게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반드시 내려놓아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요,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안고 있는 한 하나님은 더 큰 선물을 준비하시고도 주시지 못하고 계신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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