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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고 깨닫는 사람 (마 13: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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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깨닫는 사람 (마 13:18~23)

 
우리 시대는 소통의 부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정치.경제.사회적인 어려움과 위기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사람들 사이의 소통의 부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말하고 듣는 것이 소통입니다. 그런데 소통이 쌍방향이 아닌 한 방향으로만 갈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소통은 사회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에서도 문제가 되곤 합니다. 가족 사이에도 때로는 한 침대를 쓰는 부부간에도 소통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 집에서 사는 부모와 자녀사이에도 소통이 어렵습니다. 자녀와 대화해 본적이 오래된 부모들도 많습니다.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세대 간의 격차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직장에 가면 상사와 부하 간의 소통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서 조차 목사와 장로 간에 갈등과 소통의 부재가 나타납니다. 나라에서도 대통령과 국민들 간에 소통이 잘 되지 않아 생기는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할까요? 말 한마디에 서로 오해하고 미워하며 분노하고 때로는 갈등과 다툼에 빠져듭니다. 그것은 서로 듣는 마음이 준비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말하는 것은 먼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들어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자기주장을 통한 소리만 높이 지르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름을 안 밝히고 뒤에 숨어서 소리 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터넷에 익명의 주장이 수없이 많이 등장합니다. 악플 속에는 욕설과 비난이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때로 일종의 스트레스를 푸는 현장처럼 보입니다. 또한 책임성 없는 허구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사람의 생각을 흔들고 있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쉬운듯하면서도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행위입니다. 듣는다는 말은 한자어로 들을 청(聽)자를 사용합니다. 이 한자어는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게 구성되어있습니다. 귀 이(耳)자 밑에 임금 왕(王)자가 씌어져 있습니다. 그 오른쪽 위에는 열 십(十)자가 씌어 있고 아래 눈 목(目)자가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한 일(一)자가 씌어져 있고 또 마음 심(心)자가 있습니다. 결국 들을 청(聽)자는 지도자인 임금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왕처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개의 눈을 가질 정도로 깊이 관찰하고 주목해서 보아야 그때부터 들린다는 뜻입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 안 되고 하나의 마음을 품어 집중력과 초점을 맞추어야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들을 청(聽)자는 우리에게 듣는 일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라 정성과 사랑을 기울어야 이룰 수 있는 행위라고 알려줍니다.

경청 없는 인간관계는 마음의 상처를 줍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듣기 원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생각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 들어주지 않는 사람에 대한 고통스러운 시를 쓴 것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면 
당신은 충고를 시작하지. 
나는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어.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당신은 말하지. 
당신은 내 마음을 짓뭉개지.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면 
나 대신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하지.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야. 

들어주세요!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뿐.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돼.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좋아. 
그저 내 얘기만 들어 주면 돼. 

집을 나간 가출 청소년에게 가출의 이유를 물어봅니다. “너 왜 집을 나갔니? 집이 괜찮은데 왜 나간거니?”그러면 가출 청소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한 가지의 말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집을 나갔어요.” 

듣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입니다. 

경청 없는 인관간계는 친밀해질 수 없습니다. 같은 집에 살아도 경청하지 않으면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상처가 생깁니다. 그래서 부부는 가장 상처를 쉽게 받는 관계입니다. 사랑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청하지 않는 관계 때문에 마음속에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경청이란 인간관계의 최대의 에너지가 필요한 일입니다. 말하는 것도 힘들지만 말을 듣는 것은 더욱 힘이 듭니다. 
설교를 듣고 있는데 해 놓지 못한 일이 머릿속에 지나갈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가졌던 근심과 걱정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갈 때 경청은 내 생각과 마음 전체를 쏟아 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태복음 13:9) 

이것은 귀가 있어도 못 듣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귀가 있어도 마음을 닫아놓으면 안 들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시대가 자폐증 환자처럼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세계에만 갇혀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문을 잠그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상관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시대를 예수님은 안타깝게 바라보셨습니다. 
부모님 중 자폐증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픕니다. 수없이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쳐도 어떤 응답도 없습니다. 자폐증이란 응답할 수 없는 것, 공감할 수 없는 것, 자기만 들여다보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있는 자폐아적인 특징을 보시면서 가르쳐 주십니다. 귀가 있다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듣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셨듯이 신앙은 들음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가지 밭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산술적으로 계산해보면 사분의 일인 25%만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것입니다. 나머지 75%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열매가 맺어 지지 않는 이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딱딱한 마음으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미 내 것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불안과 걱정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여유와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듣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4-5) 

하나님께서 신명기에서 신앙의 근본은 듣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들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신비합니다. 눈은 눈꺼풀이 있어서 보기 싫으면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입은 말하기 싫으면 다물면 침묵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는 언제나 열려 있어서 세상의 온갖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래서 영어에서  듣는다는 의미를 지니는 단어는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hearing’으로 청력이 있으면 모든 소리가 들려옵니다. 또 하나는 ‘listening’으로 생각하고 관심이 있어야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해력이 있고 가치관이 있어야 들립니다. 그럴 때 마음이 달라지고 결심하며 꿈도 꿉니다. 미래를 향해서 인생을 투자할 수 있는 용기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루를 시작하면서 아침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셨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마가복음 1:35) 

예수님은 경청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하나님의 뜻을 경청했습니다. 무엇을 행하고 말하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며 열린 마음으로 경청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하여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경청하는 마음으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경청하는 태도로 네 가지의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첫째, 길가에 뿌려진 씨앗과 같은 밭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길가란 오만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미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과 같습니다. 자기 교리가 전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건성으로 듣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버렸습니다. 

우리는 길가에 뿌려진 씨앗과 같은 사람을 성탄절 이야기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때 그를 맞이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자기 일에 분주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빈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다른 손님으로 가득 찬 방을 내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유가 있는 마구간으로 내쫒았습니다. 두세 명의 목자들만 예수님을 맞이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을 때 당시 바리새인들, 습관에 젖어있는 사람들, 자기 고집과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들, 지금까지 배운 노하우로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받아도 뱉어냈습니다. 열린 마음, 변화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본질 외에 비본질적인 것은 잘라 벌릴 수 있는 용기는 없는 사람들이 바로 길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 돌짝밭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씨앗을 받기는 받되 선택적인 경청을 합니다. 마음에 드는 것은 받아드리고 마음이 들진 않는 것은 뱉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복적인 신앙에만 붙잡혀 있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축복을 주시는 말씀은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라며 선택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자갈밭과 같습니다. 

뿌리가 내리는 것 같지만 깊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기가 다가올 때 뿌리부터 흔들립니다. 어쩌면 성품에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끈기 없는 사람, 인내 없는 사람, 참을성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을 기쁨으로 감당하지만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환경의 지배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가야 자갈밭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감정적인 차원에서만 신앙을 갖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영적인 체험을 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지성적인 말씀과 의지적인 인내가 필요합니다. 감정에 신앙의 전체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위험합니다. 감정을 넘어 지성과 의지가 총체적으로 합쳐진 신앙의 자리로 성숙해야 합니다. 

염려와 근심이 너무 많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 가시떨기 밭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염려와 근심도 많습니다. 하나님도 믿지만 세상의 힘도 믿습니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하나님도 믿다가 세상의 힘도 믿기 때문에 너무 걱정이 많습니다. 먹고 마실 걱정,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걱정, 어떤 집에 살까에 대한 걱정, 어떤 일이 발생할까에 대한 걱정, 모든 것이 걱정입니다. 무엇보다 재물의 유혹이 있다고 말합니다. 돈에 모든 삶이 다 걸려있는 것처럼 돈에 집착할 때 신앙의 열매가 맺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스러울 때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 나 혼자 걱정하지 않고 이것을 주님의 걱정으로 바꾸겠습니다.”라고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넘어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하나님, 지혜주세요. 용기주세요. 판단력을 주세요.” 이처럼 기도하면서 주님께 모든 걱정을 맡기는 것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백가지 근심걱정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해야 할 것은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가장 먼저해야할 소중한 일의 번호를 정해야 합니다. 첫째, 둘째만 정해서 그것부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 제 안에 걱정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할 것이 많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기도해도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첫 번째부터 시작하고 두 번째를 한 후에 시간이 남으면 세 번째까지 하십시오. 그러면 어느 새 모든 걱정과 근심이 해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야합니다. 예수 믿고 복잡해지면 안 됩니다. 예수 믿고 근심 걱정으로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복잡해지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단순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돈보다 돈을 주신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돈에 집착합니다. 그럴 때 돈도 잃고 하나님도 잃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도 얻고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돈도 얻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뒤바뀌면 안 됩니다. 

열린 마음으로 듣고 깨달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가 가져야할 것으로 네 번째 좋은 땅을 말씀해주십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동사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 듣는 것입니다. 열린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모든 배움의 시작, 성숙의 시작은 들음에서 시작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듣는 태도를 가져야 성숙합니다. 닫힌 마음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그 다음은 깨닫는 마음입니다. 머리에서부터 이해되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내 몸과 살과 피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삶 전체의 손과 발이 되어서 나가게 될 때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듣고 깨달으면서 공감하고 수용하고 관심을 갖고 사랑의 구속에 투여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으로 열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가 듣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듣게 하옵소서. 내가 부모님의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아내(남편)의 말을 듣게 하시고 자식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가장 소중한 것부터 해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삶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사회의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주실 것을 믿고 열린 마음, 듣는 믿음의 생활을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에게 먼저 듣는 마음을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먼저 듣게 하시고,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를 감당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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