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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엡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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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엡 2:19) 


7월달부터 새벽기도회에서 고린도전서를 묵상하고 있다. 고린도전서는 성도들에게 교회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는 서신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서신의 서두에서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1)교회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의 모임
2)교회란?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
3)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신앙생활의 첫 단추를 잘 끼는 것과 같이 중요한 일이다. 고린도교회에 부어주신 풍성한 은사가 교회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 이유도 교회에 대한 무지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체성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성경은 신자,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여러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본문 엡 2:19의 말씀에 근거하여 ‘가족’이라는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를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부르고 있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권속’이란 말은 ‘가족’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가족을 세우시기 위한 놀라운 계획을 하셨다.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아니라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세우시려는 이유는 그 계획이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 되기 때문이다. 

혈육으로 이뤄진 가족은 죽음과 함께 이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가족은 영원한 가족이다. 우리는 모두 영원히 살도록 지어진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기 원하신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닮아 가게 된다. 
2)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3)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살 때를 준비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천국은 사랑으로 충만한 곳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 땅에 만드신 천국의 모형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가족을 이루며 사랑을 실천하는 현장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다른 성도들을 사랑하는 일을 배우기 원하신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천국을 경험케 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너무 많이 동떨어져 있다. 성도의 교제는 두 가지로 대분되는데 하나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또 하나는 지체들과의 교제이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린대로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배다. 예배는 영적 성장의 시발점이 된다.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성숙함의 증거로서 예배와 금식, 두 가지 요소를 언급했는데, 그들은 예배로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의 관계를 이뤄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적 성숙함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예배 생활의 실패에 근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중요한 교제 수단이다. 

또 하나의 교제는 속죄함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 간의 교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성도의 교제가 세상적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냥 일상에 나누는 대화” 또는 “서로 어울려서 함께 식사를 하는 것”정도로 생각한다. 

주일날 온 교우들이 예배로 모일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의 교제라는 것이 돌아갈 때 악수하고 안부 몇 마디 묻는 것이거나 아니면 식사하는 것이 전부다. 서로 안부를 묻고 식사하는 정도의 교제는 교회가 아닌 다른 모임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가 이 정도 수준의 교제만 이뤄진다면 가족으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한 달에 네 번 만나고 만날 때마다 악수하고 인사하는 정도로는 교제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가족들의 교제는 “사랑하는 것”이다. 다음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요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여러분! 교회는 육적관계를 넘어선 신령한 가족이다. 건물이 아니다. 어떤 기관도 아니다. 어느 조직이나 클럽도 아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한 몸을 이룬 가족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을 나누는 가족공동체이다. 보통의 관계가 아니다. 미국의 새들백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릭 워렌 목사는 성도의 교제에 대하여 네 가지 단계를 말하였다. 


1.지체의식(membership)

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지체의식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멤버십이라 말할 수 있다. 다시 본문 2:19을 함께 보자.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과 동시에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교제는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여러분이 태어날 때 자동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족, 즉 교회에 속해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저는 어느 교회에도 소속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교회에 소속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저는 축구 선수입니다. 그런데 저는 어떤 팀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아요.” 혼자 나가서 축구 경기를 할 수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라 할지라도 소속팀이 없으면 선수로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라는 가족이 없는 크리스천은 고아와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곳에서든지 지역 교회에 속하도록 만드셨다.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여기서 “지체”라는 단어가 영어성경에는 “members"라고 번역되어 있다. 조기축구회나 낚시동호회의 멤버쉽에서 따온 말이 아니다. 원래 기독교적인 용어다. .근본적으로, 그 의미는 그리스도 몸의 일부라는 말이다. 여러분의 손이 바로 여러분 몸의 일부이듯이, 그렇게 서로 매우 밀착되어 서로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어떤 모임의 일원이 된다거나, 똑같은 모자를 쓰고, 자켓을 입는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에서 속해있고, 서로 가족이 되었다는 선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이전에 살던 삶은 죽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에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교제의 첫 번째 단계이다.. . 


2.우정(friendship)

교제의 두 번째 단계는 약간 더 깊은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면, 바로, 나누는 것을 배우는 단계가 나온다. 릭 워렌 목사는 이 단계를 “우정의 단계(the friendship level)”, 곧 나누는 것을 배우는 단계라는 것이다. 초기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 교우들 간의 깊은 우애를 살펴볼 수 있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다 함께 있어’와 ‘통용하고’를 주목하기 바란다. 우선 우리는 서로 만나지 않고는 우정을 증진시킬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나누지 않고서는 우정을 키워나갈 수 없다. 자주 만나면 가까워지는 법이다. 

정말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가? 아주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는 사람들, 20년, 30년 동안 지내온 친구들 말이다. 만약 그런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좋은 친구를 가진 것은 그의 의지적 선택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우정을 키우기로 선택한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외롭다고 하고,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유는 우정을 위해서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성취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일하느라 너무 바쁘다. 그들은 우정에 시간을 할애하기 꺼려한다. 

그러나 우정을 위해서는 서로 만나고 어울려야 한다. 그것이 인생에 주된 것이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깊은 우정을 만들 수 없다. 진실한 우정은 공짜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우정을 위해서 노력하고 투자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행운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요 노력이다. 서로 나누는 것 없이 우정을 만들어 갈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정을 쌓기 위해 무엇을 나누어야 하는가? 

1)성경은 우리가 서로의 경험을 나누라고 말씀하고 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성경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라고 말씀한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혼자서 그렇게 많은 실수를 다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배우는 모든 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시험이나 실수들로부터 배우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배우다가 죽을 것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배우고 경험할 시간이 없다.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단시간에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하셨다. 어떤 사람도,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은 없다. 성경은 우리가 옳은 질문을 가지고 접근하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말씀한다.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두 합하면 엄청난 것이 된다. 우리는 서로의 경험을 나눔으로 인해 인생을 배우고 우정을 키워 나갈 수 있다.

2)성경은 우리의 가정을 나누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나눌 필요가 있다.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우리가 우리의 가정을 오픈하기 위해서 아주 근사한 집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씀이 말하는 바는, 믿음으로 가정을 오픈 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여러분의 가정을 오픈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우리는 왜 우리의 집을 서로에게 오픈 해야 할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군중 속에서 교제를 나누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장이나 작은 소그룹 모임에서 우리의 교제를 더욱 깊이 있게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많은 교인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교제는 할 수 없다. 함께 예배를 드릴 수는 있다. 함께 주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함께 배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교제도 나누기는 어렵다. 우리는 이 예배당에서 나갈 때, 가벼운 안부를 묻는 정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지 상대방을 더 깊이 있게 많이 알게 되어 나가지는 못한다. 

교제는 항상 목장이나 소그룹 안에서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가 서로서로 가정을 오픈 하라고 말씀하는 이유다. 그곳이 정말로 사람들을 잘 알 수 있는 장소이다. 기독교 역사 초기 300년 동안 교회 건물이 전혀 없었다. 모든 교회는 가정에서 만나서 이루어 졌다. 

그 당시가 바로 교회에 가장 빠른 부흥과 성장이 있던 시기다. 제가 “목장모임에 열심을 품고 참석하십시요”라고 잔소리같이 권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이 성경적인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 만나야 한다. 성도들의 가정은 문턱이 낮아야 한다. 

3)우리는 우리들의 문제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문제 속에서 산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숨기려고 한다. 기쁨을 나누면 그 기쁨은 두 배가 된다. 어려움을 나누면 그 어려움은 반이 된다. 성경은 “애통하는 자들의 눈물을 함께 닦아주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라.”고 말씀한다. 때로는 목장모임에서 그냥 펑펑 울 때도 있고, 괴로워 할 때도 있다. 왜 그런가? 문제를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잘 들어주는 귀를 가지라는 말이다. 

그 문제들을 고칠려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괴로워하는 사람 옆에 앉아서 이렇게 말하라..
- “으음, 그 기분 알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이해합니다.”, “그건 참 힘들지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감과 경청이다. 그리고 비밀을 지켜주어야 한다.

이처럼 목장이나 소그룹 모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깊은 우정을 나눌 수가 없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목장의 주된 목적은 서로서로 세워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는 습관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목장모임과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기 바란다. 


3.동역(partnership)

세 번째 단계는 “동역(partnership)”이다. 동역은 내가 나의 맡은 일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가족은 우리 각자가 분배 받아서 해야 할 여러 부분들이 필요하다. 

형제가 보통 5남매 이상되던 시절에는 코흘리게 막내 동생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역할과 임무가 있었다. 오늘날 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임원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11월 달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두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들로 인해 속이 상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모임은 동역의 단계에까지 오지 못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당에 와서 그냥 어디 앉아서 설교듣고 은혜만 받고 가기만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곳에서 섬기고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부르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에서 다양하게 살기 원하신다. 각자의 받은 은사와 재능에 따라 자신의 몫을 감당하는 것이다.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동역자”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동역 하는 동역자들이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각 지체는 바로 여러분과 나다. 우리는 하나님 몸의 각 부분이며,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에서도 캘커타라는 제일 가난한 곳에서 지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테레사 수녀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매일 죽음과 질병으로부터 어떻게 견디고 지내세요?”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목욕을 시키는 모든 사람들, 또 제가 붕대로 감아주는 사람들, 저는 그 사람들 모두에게서 예수님의 얼굴을 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이 예수님을 위한 일이니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교제의 더욱 깊은 단계로 가기 위해서 우리도 이렇게 한번 실행해보자. 우리가 속한 목장 식구들의 필요를 찾으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이렇게 서로의 필요를 찾으면서 실제로 행하며,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의 가족으로 관계가 더 깊어질 것이다. .


4.혈족의식(kinship)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가족의 교제에서 가장 깊은 단계를 말한다. “Kinship”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말하면 아주 가까운 혈족, 친척을 말한다. 누군가 사고를 당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가족을 말한다. 가장 가까이 있고, 여러분을 가장 잘 도와주고, 가장 친밀하게 대하고, 다른 어떤 중요한 일 보다 더 우선으로 여겨주고, 그런 사람을 바로 kin(친척)이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향해서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가족관계의 가장 깊은 단계는 “교우들을 정말 가족과 같이 사랑하기”이다. 온전히 우리의 형제 자매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1서 3:16 말씀은 요한복음 3:16만큼 중요하다. 이것이 교제의 가장 깊은 단계이다. 서로서로 희생하는 단계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 단계에 이를 수 있을까? 우선 위기에 쳐했을 때 그들의 편에 서서 도와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남의 일이라면서 발을 빼고 싶을 때, 우리만큼은 그 일을 손을 걷고 도와주는 것이다. 그들이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도와주는 것이다.

간증)실직한 가정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목장 식구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정말 은밀하게 도왔다. 십일조로 도와주었다.!

그 목장 식구들 모두 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한 동기는 목장 식구들 서로가 “가족”이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실험실이다. 어떤 분들은 사랑이 그다지 많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떻게 사랑할지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나누고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디서 그것을 배울 수 있을까? 바로 교회라는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목장모임에서 배울 수 있다. 목장모임에서 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목장의 지체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먹고, 함께 섬기는... 신명나는 목장, 신바람 나는 목장.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가 우정의 단계, 동역자 의식의 단계를 넘어서 혈족의식의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연초에 우리의 표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는 교회였다. 가다 보면 방향을 잃을 때도 있다. 어떻게 진척되어가고 있는가? 점검해 보고, 남은 하반기의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아름다운 교회를 위해 한 마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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