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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이 되는 교회 (살전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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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이 되는 교회 (살전 1:2~10)


미국의 세인트루이스를 여행 중이던 한 변호사가 주일 아침에 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에게 다가가서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경찰관은 친절하게 한 교회를 소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찾아 가는 도중에 몇 개의 교회가 더 있음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변호사는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 경찰관에게 다가가서 가까운 교회가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그 교회를 소개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경찰관이 하는 말이 이 지역에 어느 교회가 참 교회인지 좋은 교회인지 제가 직접 가보지 못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일 아침마다 교통정리를 하면서 보니 
그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의 표정이 가장 밝고 기뻐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를 자신 있게 소개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드리고 은혜 받아 나가시며 환하게 웃기만 해도 전도가 됩니다. 서로 밝게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전도인 것입니다. 웃는 얼굴이 그 교회를 소문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성도님들 모두 은혜 받고 밝은 모습으로 웃으며 돌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초대 교회에도 소문난 좋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8절에 보면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아름다운 소문을 듣고 감격해서 너무 기뻐 말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여러분! 얼마나 멋집니까? 
우리 교회도 이러한 아름다운 소문이 가득한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 지역에 아름다운 소문이 가득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교회이길 소원합니다. 교회의 부흥은 좋은 소문이 나는 것입니다.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본을 보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7절에 보니까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본이 되는 교회가 되니까 좋은 소문이 난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좋은 목회자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는 가까운 곳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까지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제 2차전도 여행 중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첫째는 빌립보 교회이고, 다음이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지역에 오래 있지 못하고 베뢰아로 도망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학자의 의견에 의하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역에 머무른 기간이 짧게는 3주, 길게는 6개월을 머물렀다고 합니다. 길게 잡아 봤자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바울이 목회한 것은 6개월 밖에 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는 지금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난 후 1년 반이 지났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개척된 후 1년 반 동안 담임목사도 없이 교회가 운영 되었고, 고작 개척한지 2년 밖에 되지 않는 개척교회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개척한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교회가 그 지역의 오래된 교회보다 신앙의 본이 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 하신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1년, 5년, 10년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대다수는 5년에서 10년은 되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의 본이 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며,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에는 정말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 같아요 하며 나와 함께 예배드리길 기뻐하십니까? 신앙의 본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좋은 믿음의 본이 되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신앙의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6절에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바로 바울의 모습을 닮기 위해 애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닮기 위해 애썼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모델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주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삶이 아름다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모델로 삼고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모델은 누구입니까? 신앙의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의 모델은 누구였을까요? 바울의 신앙의 모델은 먼저 스데반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집사였던 스데반을 처형하는 그 자리에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스데반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이었지만, 성령이 충만한 모습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영광의 광채가 있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며 돌을 던지는 그들을 향해 원망하지도 않고, 저주의 말도 퍼붓지 않고, 오히려 돌을 던지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외치는 스데반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스데반의 모습은 바울의 기억속에 오래 오래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지만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에베소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며 감옥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주님을 닮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최종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지금 이 모습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라 주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최종 모델도 주님이어야 함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꾸 낙심하거나, 실족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모델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시면 자기를 인도한 사람이 신앙의 모델이 됩니다. 조금 지나다 보면 그분과 부딪힐 수도 있고, 마음이 상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모델을 바꾸세요. 목장의 목자나 교회의 목사님으로 업그레이드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의 신앙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인도한 분의 신앙을 넘어 담임 목사님 수준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때론 목사님도 실수하는 것이 보이고, 부족한 것이 보이면 성경의 인물에서 모델을 발견하십시오. 요셉이나, 바울이나 요한이나 이분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을 모델로 삼으십시오. 스펄젼이나, 무디나 칼빈과 같은 분들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절대로 안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릴 적에 성경을 읽다가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요셉을 그리며, 요셉을 묵상하며 지내다보니 제 신앙이 날마다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다닐 때는 김진홍 목사님이 너무 좋아 나는 김진홍 카바 목사가 될꺼야 하며, 그분의 설교 테입은 거의 다 구입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쓴 책은 무조건 사서 읽었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정신은 제 안에 살아 있습니다. 지금은 또 다른 모델을 세우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의 좋은 점만 골라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성경을 보는 눈은 이동원 목사님, 설교의 스타일은 김삼환 목사님, 기독교 정신은 김동호 목사님. 

여러분! 웃음이 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제가 이분들을 생각하며, 날마다 저의 삶을 채찍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 신앙이 병들지 않고 날마다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오신 모든 성도님들이 저와 같이 허왕되 보이지만, 위대한 꿈을 꿀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신앙의 좋은 모델이 있어야 본이 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모습이 있었기에, 본이 되며 아름다운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는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아름다웠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하고 교인들과 성경공부도 하며 그들과 오래있고 싶었지만 박해 때문에 더 있고 싶어도 있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바울의 마음에는 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 때문에 핍박 받았던 야손은 잘 있는지, 부자집 부인이었지만 말씀을 순전하게 받았던 그 자매는 잘 있는지, 병이 들었었다가 고침 받았던 그 성도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등등 바울의 마음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 하나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할 때 마다 이들을 빼놓지 않고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담임 목사님께서 미국에 계시지만 우리 성도 하나하나를 생각하며 기도하실 것입니다. 설마 나도 기억하실라고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희 목사님은 다 기억하십니다. 부목사에게 맡겨 놓았는데 잘하겠지. 성도들도 잘 따라 줄거야 하며 저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목사님께서 글을 남기셨습니다. 뎃글 달아주세요. 그러면 힘이 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담임목사님과 성도의 관계가 아름다워야 그 교회는 좋은 소문이 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말씀도 들려지게 되고, 우리의 영이 살게 됩니다. 목사님과 관계가 좋지 않으면 교회 오는 것이 즐겁지 않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예배 시간이 은혜가 되지 않아요. 그러면 내가 영적으로 침체되고, 나중에는 마귀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아름다워야 교회는 부흥되고, 전도도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교회 자랑, 목사님 자랑이 전도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성도의 관계가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혹시 목사님과 좋지 않은 관계에 있거나, 오해로 막힌 것이 있다면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서로 좋은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님과 성도가 서로 좋은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한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분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우리 목사님은 다른 어떤 교회 목사님보다 성도들을 더 사랑한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목사님은 성도들 중에 기도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부산찍고, 서울찍고 강원도까지 가실 분이십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때론 밤 늦게까지 기도하십니다. 성도님들 사업이 안 될 때는 가장 마음아파 하시며 기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거 알아 주셔야 합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목사님을 위해 기도해 드려야 합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목사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계시는 분입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분은 성숙한 사람이요. 목사님을 사랑하는 분입니다. 

성도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새벽에 잠시 10분 기도하고 가시지 마시고, 종이에 성도를 이름 적어 와서 하나하나 불러가며 기도 좀 하십시오. 그러면 한 시간이 아니라 세 시간을 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인 것입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할 때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의 임재가 있고, 말씀이 선포 될 때 구원 받는 사람이 생기며, 말씀이 선포될 때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잡고 환란과 핍박이 다가왔지만 이기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개척 당시부터 환란과 핍박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따라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당시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환란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핍박이 있고, 마을에서 쫓겨나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며, 그 예수님을 끝까지 부인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들은 고난 가운데서,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인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받는 것도 큰 역사이지만, 더 큰 믿음의 역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내가 손해 보거나, 고난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믿는 믿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만,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대신 목숨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지금도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이 끝까지 사모해야 할 그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손해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핍박을 감수하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왜 교회에 다니십니까? 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손해를 본다면 그래도 다시시겠습니까? 교회 다니기 때문에, 예수 믿기 때문에 친구들이 떠나고 내가 외톨이가 된다면 그래도 믿으실 수 있습니까? 교회 가야하기 때문에 내 자녀가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고, 내 수입이 줄어들지라도 과연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정말 주님이 내 인생의 우선순위가 되고 있으십니까? 믿음은 내 인생에서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임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장 25절 이하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 하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여러분! 이렇게 믿음으로 자신을 포기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는 이적과 아이를 낳을 수 없던 100세 된 아브라함에게 자녀가 생기는 이적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은 말씀을 듣는 자세에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2장 13절에 보면 바울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나에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하니까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 이적과 역사가 없는 것은 내가 말씀을 받되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받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이 나옵니다. 이 백부장에게는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하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자, 백부장이 예수님! 저희 집에도 종들이 있어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나이다. 예수님께서 저의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저에게 말씀만 하시옵소서 그러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여러분! 이 믿음이 소리를 들은예수님이 놀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바로 말씀을 받는 자세가 달랐던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씀 듣는 자세가 좋았기에 믿음이 역사가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같더니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더라. 성령이 충만하고, 말씀이 살아있고, 예배의 감격이 있더라. 어떤 사람은 병도 고침 받고,  어떤 사람은 사업도 어려움에 있었지만 믿음으로 결단했더니 성공하더라 하는 소문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세 번째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믿음도 있어야 하지만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교회 안에 들어오면 보이는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친절인 것입니다. 요즈음은 교회가 친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모여들고, 교회에 등록합니다. 교회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이 하는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 없이 기도하는 것, 사랑 없이 봉사하는 것, 사랑 없이 자신을 내어 주는 것, 사랑 없이 물질을 나누는 것, 사랑 없이 예배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온전한 믿음이 있는 분은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안에 사랑이 없고, 아직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덜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주셔서 내 대신 죽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 사랑을 입은 자들이 어찌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도 주님을 닮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릅니다. 사랑하면 내 것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내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어려운 사람과 함께 있어주며,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분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울 때 함께 울어주고, 웃을 때 함께 웃어주는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부활 신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이기며 나아갔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우리의 억울한 일을 갚아 주실 것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과 재림 신앙이 있었기에 환란에 넘어지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아름다운 신앙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결론 : 

데살로니가 교회는 오래되지 않은 교회였고, 큰 교회는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소문이 가득한 교회요 본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목사님과 성도가 아름다운 관계를 갖고,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이 가득하여 이 지역에서 본이 되는 교회요, 아름다운 소문이 가득한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오고 싶은 교회, 함께 하고 싶은 교회가 되어 일평생 몸담고 섬기길 원하는 교회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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