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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 (딤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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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 (딤후 4:1~8)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이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주는, 마지막 교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바울로서는,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강조해서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유언과도 같은 중요한 교훈을 남기게 되지요.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 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여러분 오늘 말씀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렇게 연속적으로 표현되어 있기에, 목회자의 직무를 다함에 있어서,  때로는 근신해야 되고, 때로는 고난도 받아야 되고, 때로는 전도인의 일도 해야 되고, 또 그 외의, 여러 가지 일들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직무를 강조해서 설명하기 위해, 점차적인 강조 법으로, 연결해서   나타내고 있는 말씀이지, 따로 따로 구분되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는 “네 직무” 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 다시 말해, 전도하는 일이었다는 겁니다.  아멘!!  
바로 이 전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목회자는 근신해야 하며, 고난도 감수해야 하며, 또 여러 가지 봉사의 일도 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생각을 해 보지요.  오늘 바울이 말한 이 전도인의 직무를 감당하는 일이,  꼭 디모데와 같은 목회자에게만 국한 된 일이겠습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굉장히, 약은 사람들입니다.  
아주 교묘하게 성경의 진리를 피해가려고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 말씀이, 결코 목회자들을 향한 말씀만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마치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말씀인 것처럼 치부하면서, 자신은 이 말씀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 말씀은, 목회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바로 이 전도로 귀결되어져야 한다는 뜻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딤후 1 : 8 절 말씀을 보게 되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말씀의 뜻을 더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아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또 딤후 2 : 9절에도 보면,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말씀들을 우리가 살펴볼 때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 내게 맡겨진 성도의 의무를 다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전도인의  직무를 다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이 전도하는 일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경향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곧 전도하는 일이라고 하는 등식이, 성립되고 있질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전도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어려가지 분야로 나누게 되지요.  “나는 이 일을 할 테니, 당신은 저 일을 해라.”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나눕니다.  

나는 신앙이 연약하니까, 이 정도의 봉사만 하고, 당신은 신앙이 강하니까   더 많은 봉사를 해라.   매사가 이런 식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생각 속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함정입니까?   스스로를 게으르게 만드는,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매사가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자신의 신앙도   점차적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독소와 같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힘이 든 일은 어떻게 합니까?    서로가 미루게 되지요.  
자신의 신앙상태는, 아직 그 일을 감당할 만하지 못하다고, 자꾸만 남에게 미룹니다.  그래서 자신의 환경과 상황에 맞는 일들만, 골라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가장 힘이든 일,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 어떤 일입니까?  
복음을 전하며,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전도하는 일은, 정작 힘써야 할, 이 전도하는 일은, 자꾸만 뒤로 미룬 채, 아니 방치해 둔 채로, 다른 쉬운 봉사의 일들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전도에 대해 말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왜요?   힘든 줄 알기 때문에....   

여러분, 이것이 무슨 합력입니까?   이것은 담합인 것입니다.  
담합이 뭡니까?  생산자의 이득을 보존하고, 보장하기 위해, 업자들끼리 짜고   가격원칙을 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결국 누가 손해를 보게 됩니까?   
소비자지요.   일종의 속임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전도가 힘든 일이니까 서로 미루는 행위, 전도가 힘이 드니까 더 이상 전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마음, 목회자로 하여금 전도 외에 다른 봉사나 헌신을 말하게 하자는 압력, 이 모든 것이 다 담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담합을 통해, 우리는 이득을 볼 수 있겠지만, 내 개인의 안정된 신앙생활과, 부담 없는 신앙생활은 보장이 되어지겠지만, 우리를 일꾼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당하는 봉사나 헌신, 그 일들이 무슨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 이 일을 통해  무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겠습니까?   다 속임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왜 바울이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노니” 라고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디모데가 어떤 사람입니까?  
디모데는 바울이 인정할 정도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물려받은, 3대째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무엇이 옳고 그르다 하는 정도는, 디모데 역시도 능히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그가 교회의 지도자로 세움을 입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바울은 그에게, 이렇게 강하게, 엄히 명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신앙이 좋은 디모데라 할지라도, 아무리 그가 3대째 내려오는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자칫 자기중심의 신앙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바울이 이렇게 엄히 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행하려고 하는 신앙입니다.  내가 판단해서 옳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으려고 하는 신앙, 이러한 신앙이, 바로 자기중심적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를, 자기가 임의로 정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까?   하나님이 우선으로 하는 일들을 피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 계획한 거룩한 사역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자칫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신앙에 빠질 것을 염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게 되면, 디모데를 향한 염려의 마음보다는, 디모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디모데가 목회하는 교회 성도들에 대한  염려와 경계가, 더 많았던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 4절을 말씀을 보게 되면, 바울의 이러한 마음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변질된 신앙을 가지고,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를 혼란스럽게 할 때가 있다는 뜻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설교하면, 지금은 그 말씀이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다르게 설교할 것을 강요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교회의 영향력을 끼칠만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했고, 또 교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직분도 맡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이미 변질된 신앙이었기에, 디모데가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교훈하며 이끌어 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마땅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디모데를 거짓된 진리로 혼란을 주며, 결국에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인간 편의주의의 말씀, 인간 중심의 세속적인 말씀을 전하도록 만들어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부분들을 예견하였기에, 미리 염려하는 가운데 디모데에게   이와 같이 엄히 명하며,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었던 5절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러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 인간 중심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져 가는 것을, 오늘 우리들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이 부담스럽다고, 목회자에게 자기에게 은혜가 되는 말씀만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그러한 일체의 신앙의 모습들은, 적어도 우리 성천교회 안에서만큼은, 사라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요한 계시록의 사데교회를 향한 책망을, 오늘 우리들도 듣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가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인 것입니다.  
전도하지 않는 성도들의 신앙은, 실상은 죽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 자신의 신앙을, 한번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고 있습니까?  전도인의 직무는, 디모데와 같은 목회자만 해야 하는 일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벧전 2 : 9절 말씀을 보세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이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 것입니다.  아멘!!!   이 일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롬 10 : 14절 이하에 보면,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입이 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도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라고 한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동일하게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 이 수요 예배에 오신 여러분들은, 이러한 사실을 먼저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하지 못하는 데는, 꼭 이런 이기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전도가 귀한 줄도 알고, 또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성도들이 전도에 대한 당위성을 찾질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왜 전도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전도의 당위성에 대한 세 가지 이유를, 성경에는 분명히 나타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도는, 우리의 주님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 제시가, 바로 전도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 안 믿으십니까?   안 믿으시는 분위기내요.  

제가 그 증거를 댈까요?  요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베드로를 다시 만나시는 장면의 말씀이 나옵니다.   십자가사건 이후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베드로를 찾아가서 말씀하지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바로 이 질문을, 세 번씩이나 던지셨습니다.  왜입니까?   
그가 이미 사람을 낚는 전도자의 사명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주님 당신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기 때문임을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대답하지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은 아직도 변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세상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겠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이런 뜻이 담긴 고백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따라 합시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무엇입니까?  
그가 놓쳐 버린 전도의 사명을, 재차 부여해 주셨다는 겁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정말 세상 사람들보다 더 사랑한다면, 이제는 내가 명한 전도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거라.”  바로 이런 뜻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주변 이웃을 향해 열심히 전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무대뽀로 전도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베드로에게 하신 세 가지 명령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전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세 가가지가 뭐였습니까?  
다시 따라합시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  
먼저 먹이라는 것입니다.  전도 대상자의 마음을 먼저 흡족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듯이, 내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셨듯이,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모습으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내 양을 치라.”  교회로 인도해와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내 양을 먹이라.”   또 먹이라는 겁니다.   교회에서도 그들이 소외감을 가지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주고, 그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니까 이제는 관심도 없고, 선물도 없더라.”  이런 소리 안 나오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퍼 줘야 합니까?   꺽 소리 날 때까지.... 배가 불러서 그만 할 때가 먹이는 겁니다.   

그러나 이 일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 먹을 것 생각하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저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을 차마 아끼지  못하고, 주님 때문에 더 희생하고, 더 헌신하며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를 먼저 사랑하셨고, 또한 그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내가 사랑하기에,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바라보실 때, 전도하면서 이렇게 양을 먹이고, 또 먹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실 때,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무개야,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내가 다 갚아 주리라.  내가 더 풍성케 하리라.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충만히 받을지어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전도하는 여러분 되어서, 주님의 사랑을 더욱 더 충만하게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전도의 당위성, 그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의 영혼이,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아멘!!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누구든지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 불에 떨어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전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전도에 대한 시급성을, 잘 깨닫고 있질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도가 얼마나 시급한 일인가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유를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언제 어떻게 끝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날 때야 순서가 있지, 갈 때에 무슨 순서가 있습니까?  너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도다.  정말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살다가도, 내일 죽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목숨입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그 사람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지옥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는 사람이, 내 사랑하는 가족이고, 내 사랑하는 이웃이라면, 어떡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졸지에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시급성을 가지고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아무리 전도해도 잘 안 들어요.”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겔 2 : 7절에,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그렇다고 꼭 가족이나 이웃만을 대상으로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내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가 우리의 전도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서도 시급성을 가지고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선생님의 하나뿐인 생명에 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생명은 하나뿐이고, 또 언젠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선생님의 생명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지만, 세상 떠난 후에는 영원한 세계에 들어갑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지 찾아는 봐야 안 되겠습니까?  천국이 있는지 찾아는 봐야 안 되겠습니까?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전도하면 됩니까?  
“잠깐만요”  그때,  ‘영생 얻는 길’을, 사용하는 겁니다.   할렐루야!!!  

전 과기처 장관이었던, 정근모 장로님의 이야깁니다.  
5공 시절 대통령의 수석 비서관이었던, 김재익 박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정근모   장로님과는 고교 동창으로, 둘도 없는 친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버마에 대통령을 수행하고 외교 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그만  아웅산 폭파 테러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근모 장로님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서는, 가슴을 쳤다고 합니다.
친구를 잃었기 때문에 가슴을 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전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슴을 쳤다고 합니다. “하나님, 혹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그 친구는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통곡을 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어느 성도님은, 노숙자 한 분을 전도했는데, 그 분이 복음을 잘 받아 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바쁜 일이 생겨, 그 분 전도하는 일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노숙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 성도님의 마음을 송곳으로 찌르듯이 아프게 한 말이 있었는데, 그 노숙자가 가까이 있었던 슈퍼가 있었는데, 그 슈퍼 주인인 아줌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아줌마를 얼마나 기다렸지 몰라.  그 사람이 꼭 아줌마를 만나야 된다고 얘기했는데, 만나지도 못하고 그만 죽어 버렸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성도님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내가 좀더 시간을 내서 그 분을 만났더라면, 그에게 복음을 전했더라면, 그 영혼은 지옥가지 않았을 텐데, 그 분이 죽음을 앞두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얼마나 알기를 원했으면, 나를 그토록 기다렸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회개가 되고, 마음에 아팠던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순 악질은, 가족과 이웃이, 또 내  주변의 사람들이 지옥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입니까?  우리가 상상치 못할 고통이 있는 곳이 지옥 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무와 석탄과 석유를 다 쏟아 붓고 불을 붙인대도, 지옥에 있는 사람을 그 위에 옮겨 놓으면, 얼어 죽고 말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지옥불이 뜨겁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족들이 지옥 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으렵니까?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웃이,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렵니까? 
전도에 대한 시급성을 가지고, 지금부터라도 끊임없이 전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의 당위성, 그 세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 번째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귀한 축복의 상급을 받기 위해, 우리는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 12 : 3절 말씀을 보세요.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할렐루야!!   별과 같은 축복....  
여러분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축복은, 오직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축복을 주실까요?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에게, 이런 별과 같은 특별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여러 가지의 봉사의 일, 물론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일을 많이 한다 해도, 평점을 매겨본다면, 전도하는 일에는  크게 못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점수를 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   바로 전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막 3 : 35절에 보세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예수님이 가족들이 찾아왔습니다.  누가 밖에 예수님의 가족들이 찾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는 일,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바로 전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다시 말해, 주님과 같이 이 마을 저 마을 찾아다니며 전도하는 사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전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주님의 형제요, 주님의 자매요, 주님의 모친이라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주님의 가족이 된다는 말씀인데, 이게 여러분 보통 축복입니까? 그야말로, 료얄 페밀리가 되는 것입니다.   일반 성도들과 확실히 구분되어진, 주님의 권세를, 마치 내 권세처럼 쓸 수 있는, 주님의 소유를 마치 내 소유처럼 쓸 수 있는 축복의 권세를, 소유할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물질만 아니라, 건강도, 명예도, 권세도   다 주님의 것인 줄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도자에게 다 축복으로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전도한다고 금방 이런 축복의 권세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 맺기까지, 참고 전도하는 자에게 이런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 1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전도는 갇힌 자를 동정하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매여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도하는 일을 함에 있어, 많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산업을 빼앗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인내하는 가운데 담대함으로, 오히려 기쁨으로 감당하게 되면, 큰 상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받는 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정말 멋진 축복으로 우리 인생에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가 전도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갔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축복의 지경을 넓혀 주십니다.  내가 한 영혼,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구원하였듯이, 하나님은 우리 자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인생의 위기에서 구원해 주시고, 전도한 나 때문에, 그 후손들이 복을 받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이 누구에게 나타나게 됩니까?  
전도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런 귀한 축복을, 어느 일보다도, 전도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행하심으로  다 받아 누리시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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