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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선한 일군 (딤전 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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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한 일군 (딤전 4:6~16)


우리가 성도로서 교회에 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 보면, 교회에서 맡겨  주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보면, 웬만큼 신앙의 연륜이 쌓인 분들이라면, 대부분이 저마다 다 한 가지 이상씩의 일들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의 일을 맡아 수고하고 봉사하는 모습은 다 같지만, 그 내용이나,   나타나는 결과는, 저마다 다른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직분의 사람들이, 똑같은 교회의 일을 맡아 수고하는데, 그 일에 대한 열매나 평가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을 교회의 일을 맡아 수고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자세가   다 다르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래서 그 일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이 하십시다.  그런데 우리의 무엇을 보고, 하나님은 그 수고를 평가하시는가?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고 평가하신다는 거지요.  어떤 중심입니까?  “진정 그 일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며 수고하고 있느냐?  자신의 자랑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목적으로 수고하고 있느냐?” 
이것을 바라보시고, 평가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똑같이 교회의 일을 맡아 수고하고 헌신하는데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교회를 섬김에 있어, 우리의 행동의 양식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 그 뜻을   우리의 모든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하는 직분자들은, 자기 주장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그저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성된 종으로 일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충성된 종의 모습으로 봉사하고 헌신할 때에,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신앙으로 인정해 주시고, 그에 합당한 은혜와 능력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보면, 정말 열심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정말 저 사람은 교회를 위해 태어났다고 할 정도로, 교회의 일에 대단히 열심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한 열심, 이런 열심을 가진다는 것 대단히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열심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이 열심의 모양으로 인해, 자칫 우리 스스로도 속을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교회의 일을 하면서 늘 조심하며, 자신을 살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가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이 얼마나 열심인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과거에도 열심인 사람이었고, 현재에도 변함없이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타냈던 과거의 열심과 현재의 열심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의 과거의 열심은, 누구를 위한 열심이었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한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열심은, 결국 자기 열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과거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특심이라고 자부하던 그가, 기껏 한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하면서도, 그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케 하고,   분노케 하는 신앙의 모습, 바울만 이겠습니까?  실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러한 우를 얼마든지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자기 열심만 가지고 교회의 일을 하게 되면, 얼마든지 이러한 신앙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로, 그의 신앙이 어떻게 바뀝니까?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변화되어져서, 철저하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추며, 하나님 앞에 종의   모습으로 섬겼던 것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랑하며, 자신은 의인이라 주장하던 모습에서, 자신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와 같다고,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며, 자신은 의인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 중의 괴수라고 선언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된 모습으로, 바울은 자신이 소유한 그 열정을, 그 열심을,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나타내며, 충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의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 또한 여러 가지 맡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어떤 자세로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변화된 바울과 같은 모습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충성된 일군들이, 다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말씀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를 향한 사도 바울의 목회적인 권면의 글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선한 일군의 자격이 무엇인가를  오늘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가 추운 겨울날을 보내고, 이제 봄 기운이 완연한 가운데, 오늘 4월의 첫 주일을 맞이하면서, 본격적인 사역에 들어가야 되는데, 우리가 그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그래서 하나님께 기쁨으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충성한 하나님의 일군이 되기 위해서, 어떤 자격을 우리가 갖추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의 선한 일군, 충성된 일군이 되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될 자격,  여러 가지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 3가지를, 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군, 여러분, 어떤 자격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1. 성실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실성이 무엇입니까?   정성 성자에, 열매 실자, 그 뜻을 풀이하면, “정성스럽게 열매를 맺는 마음”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열매에 대한 귀중함을 알고, 또한 그 귀한 열매를 맺기 위해 정성을 다해 일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실한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일에 일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과 행실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의 이름을 대면, “아, 그 사람. 참 성실한 사람이지.  참 좋은 사람이야!” 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신앙 안에서 성실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말과 행실뿐만 아니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도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믿음이 좀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어필이 되고 있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이야기해도 시큰둥합니다.  반응이 냉랭합니다. 
오히려 역반응을 보이며, 당신이나 잘 믿으라고 큰 소리를 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런 반응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성도들의 믿음에 부합된, 정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기독교는 거룩한 종교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용납하지 않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라면, 하나님과 같은 거룩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아멘!!   세상에 하나님 닮은 거룩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거룩을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거룩은 세상과 다름이다.” 우리 성도들이 세상과 다른 모습을 나타낼 때에, 비로소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에게 영적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기독교인이란 타이틀만 다를 뿐이지, 다른 삶의 모습들은,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이 지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옷 로비 청문회 사건, 다 기억   하시지요?   전대미문의 사건이지 않습니까?   근대에 들어와서 기독교의   최대 위기가 아니었나 생각될 정도로, 세상에 악영향을 끼친 사건이었습니다. 

그 때 청문회 하면서 사건 당사자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그대로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 되었습니다.  그들이 한 참 자기가 옳다고 언쟁을 벌이는데,   그들이 사용한 말이 어떤 말들이었습니까?  
집사님, 권사님, 심지어는 사모님까지도 거론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광경을 지켜 본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안 그래도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비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왜 바울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오직” 이라고 하는 말을 써 가며,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본이 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상실하고서는, 결코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물론 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지 않습니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일에 대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열매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왜 하는 것입니까?   열매를 목적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맡은 일이, 단순히 일을 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의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 그 목적은, 더욱 더 분명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떤 목적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도, 오히려 믿음과 신앙의 걸림돌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일군이십니까?   성실한 하나님의 일군이십니까?  
하나님의 선한 일군이십니까?   말과 행실이 일치하고, 사랑과 믿음과 정절의 본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런 거룩한 모습을,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힘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21세기 현대에 들어서, 교회는 성실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9세기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회개할 것을 촉구했으나,   20세기나, 현재 21세기에서는,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객이 전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성실성을, 우리의 신앙  가운데 다시금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든 면에서 일치된 모습을 보여, 세상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신앙의 회복,  그리할 때에,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신뢰감도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에게 일을 맡기겠습니까?  믿을만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인지상정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장의 오너라면, 경영자라면, 부하 직원 중에 누구에게 일을 맡기겠습니까?  믿을만한 사람, 성실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을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성실한 하나님의 일군,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는, 이런 하나님의 선한 일군 다 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하나님의 선한 일군은, 영적인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군은 먼저는 성실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성실의   뜻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정성스럽게 열매를 맺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열매를, 어떻게 맺을 수 있겠습니까?   정성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정성만 가지고 되겠습니까?  열매를 맺는 일은, 정성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지요?   정성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씨앗을, 먼저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씨앗을 가꾸는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되어질 때에, 비로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영적인 생명력을 가진 하나님의 선한   일군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가운데 어떤 씨앗을 심어야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무엇을 심어야 하겠습니까?   영적인 씨앗을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으려고 하는 열매는 세상의 열매가 아닙니다.  육신적인 열매가 아닙니다.  어떤 열매입니까?  영적인 열매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복음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오늘 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향하여 해야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생명의 열매들을, 구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열매, 생명의 열매는 결코 인간적인 노력으로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영은 영으로 통하는 것이고, 생명은 생명으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영적인 열매를 거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생명력을 지닌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생명의 열매를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육으로 심는데 어찌 영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영으로 심을 때, 또한 영으로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회복해야 될, 우리가 우리의 심령 속에 다시금 심어야 될 영적인 부분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것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말씀과 기도라는 것입니다.  아멘!!  
이 두 가지가 항상 우리 가운데,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힘 있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바울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영적인 부분에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적인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함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이 회복되고, 그 말씀이 내 심령 속에 잘 심기워져, 세상에 그 말씀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성도, 무시로 기도함으로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고, 그 능력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들을 일으키며, 수많은 악한 영들을 복음의 능력으로 물리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성도, 이런 성도들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한 일군들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많은 교회가, 영적으로 무기력해져 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오늘 우리 남울산 교회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 나가야 하겠습니까?  우리 성천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말씀에, 또한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영적인 생명력을 소유하여, 죽어 가는 이 세상을 생명력이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주의 종들,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 하나님의 선한 일군은, 맡은 바 직분에 열정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맡겨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한 번 맡은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루려고 하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선한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바울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젊은 목회자 디모데를 향하여, 강력하게 권고한 내용입니다.  
전심전력하여, 무슨 뜻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어떤 역사가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16절 말씀을 봅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나로 말미암아, 나의 열정어린 그 사역을 통하여 나의 신앙이 바로 서게 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구원을 받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어떻습니까?   내가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열정을 가지고 충성을 다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나타나는 신앙의 성장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영적 능력은, 나타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맡은 직분에 충성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맡고 있는 직분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 직분에 충성하고 계십니까?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했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이 맡은 그 직분에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 여러분이 맡은 그 직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일은 내가 선택해서 맡은 일이 아니지요.  누가 맡겨주신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을 통하여 내가 세움을  입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친히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교회에 속한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나를 구별하여 직분자로 세워   주셨다는 것, 여러분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 직분 왜 내게 허락해 주셨겠습니까?  나로 하여금 힘들게 하기 위해 그 직분을 허락하신 것입니까? 아니지요?  혹 여러분 가운데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여러분 생각을 바꾸시길 바랍니다.   나에게 직분을 허락해 주신 것은, 고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에게 주신 그 직분을 통하여, 더 큰 축복 허락해 주시려고, 더 큰 은혜   허락해 주시려고, 나에게 남에게 주어지지 않은 그 직분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직분, 나에게 십자가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고통으로 향해 가는 문이 아니라, 축복으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하지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 무엇이 나옵니까?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넓디넓은 푸른 초장이 나오고, 그 곳에서 전에 맛보지 못한 풍성한 꼴을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힘들지만 묵묵히 따라가며 발걸음을 옮긴 양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직분 주심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직분 주심에 감사하면서, 주를 더욱 더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직분에 충성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선한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폴레옹을 아시지요?  그가 세계 정복에 성공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록 전쟁의 일이지만, 나폴레옹은 전쟁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신문 기자가 나폴레옹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나폴레옹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군복을 입고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3시간 이상은 자지 않고, 전쟁의 지휘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마지막 소원은 내 직분 충성되이 감당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의 마지막 소원은 복음을  전하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아멘하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행 20 : 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할렐루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도 바울과 같은, 이런 멋진 신앙고백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고백이 있는 성도가, 바로 하나님의 선한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군을 필요로 합니다.  
그저 열심만 있는 일군이 아니라, 오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리며, 그 뜻을 이루어 드리기를 소원하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선한 일군들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군들을 붙들고, 오늘도 함께 일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이런 일군들을 찾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일군이 갖추어야 될 자질, 곧 성실성과 영적인 생명력, 그리고 맡은 직분에 대한 열정이 있는 선한 일군 되어져서, 하나님 앞에 충성된 모습으로 날마다 살아가며, 우리 성천 교회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사역에 귀하게 세움을 입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때까지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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