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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부흥을 사모하라 (시 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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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부흥을 사모하라 (시 42:1~8)


여러분, 나비효과란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동명제목으로 영화로도 만들어 진 적이 있는데요, 어느 한 지역의 대기에서 일어난 작은 움직임이,   몇 달 후 다른 지역의 기상상태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설입니다.  
캘리포니아 말리부 해변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팔락거려 일으킨 아주 작은 대기의 변화가, 몇 달 뒤에는 지구 반대편 말레이시아에서 계절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의 나비효과를,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조그만 나비 한 마리의 움직임에 의한 변화가 이 정도라면, 우리 성도들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적인 움직임 하나가, 세상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겠습니까?  

여러분의 말 한 마디, 여러분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능력을 확실히 발휘한다면,   그 때는 마치 핵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왜 좀더 신앙생활에 힘써야 하고, 왜 더 큰 영적인 능력을 사모해야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세상에서의 파급효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효과를,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 나타내기를 원하시는데, 그렇다면  누구를 통해 이런 효과를 세상에 나타내기를 원하시겠습니까?   
사랑의 교회 성도들입니까?  아니면 명성교회 성도들입니까?  아니면 여의도 순복음교회 성도들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우리 성천교회 성도들을 통해, 이런 효과를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사실 그런 대형교회 성도들에 비해, 우리 성천교회 성도들이 모자라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들보다 밥을 적게 먹습니까?  숨 쉬기를 적게 합니까?  
그렇다고 얼굴이 못생겼습니까?   뭐하나 빠지는 게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하나도 꿀릴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신앙에 별로 자신감이 없고, 괜히 그들보다 못하다고 느끼고 있는가?   
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아닌, 속에 감추어진 영적인 모습이, 그들과 여러분이 다른 차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성도들, 그들 가운데는 영적으로 분명 거듭난 가운데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또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그들의 영성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성을 자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적용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약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모습, 겉 사람이 아닌, 영적인 내면의 모습의 차이가, 결국  드러난 삶의 모습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면 그들만 사용하십니까?  그렇게 준비되어진 그들만 사용하면 될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정말 신앙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또 말씀하시지요?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이미 밭이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추수할 일꾼이 필요한데, 너무나도 일꾼이 적은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 교회마다 이런 일꾼이 일어서기를 바라고 계시는데, 어찌 우리 교회는 가만히 있고, 다른 교회 성도들만 이 일을 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성천교회 안에도, 다른 대형교회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꾼들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 일꾼들이 우리 가운데 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주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찾고 계시고, 오늘도 그런 성도들을 쓰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특별히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그 분과 동행하기 위해 기도로서 성령의 충만함을 이루고, 또 말씀을 배우는 지적인 훈련을 통해,   이런 주님의 부르심을 대비해 나가는 성도들, 이런 성도들을 주님은 우리 가운데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런 주님의 부르심의 요청에, 우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주여, 제가 가겠습니다.” 아멘!!  제가 아닌 제~가가 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주체는, 언제나 나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주님의 쓰임 받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 가운데 새로운 영적 부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무엇이든지 한 곳에 오래 고여 있으면 썩게 됩니다.  은혜나 성령도 마찬가집니다.  세상 속에서 사용되지 않고, 그저 내 속에만 고여 있으면, 결국 썩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전에 받은 은혜가 분명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에 체험했던   성령도, 분명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난 은혜요, 지난 성령인 것입니다.  새로운 은혜, 새로운 성령, 이것이 없는 가운데, 지나간 은혜와 성령, 그것이 아직도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 은혜와 성령은 이미 썩어 버렸을 것입니다.  

죽은 은혜, 죽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가지고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것 가지고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냄새 안 나면 다행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신앙을 날마다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향해, 날마다 죽노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삶은 무엇입니까?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날마다 진보하고 발전하는 신앙의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느 한 사람의 신앙적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적 침체에 빠진, 고라자손의 이야깁니다.  
이 고라자손은, 성전에서 찬양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날 찬양대나, 찬양 팀의 일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찬송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이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지를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그에 대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그의 신앙이 침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침체.. 그러니 입술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마음에 열려야, 그 분을 향한 우리의 입술도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닫혀있으니, 입술로 닫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로서의 신앙생활이, 편할 줄 알았는데, 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좀 편할 것 같고, 홀가분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무겁고, 불안한 감정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라 자손은, 육신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고, 그러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고, 이 두 중간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에 처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피곤한 것입니다.  인생이 힘이 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런 영적 상황에 빠져 있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저도 하나님에게 나아가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안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내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이런 영적 답답함을 가져본 적이 있으십니까? 

기도하고 싶은데 기도할 수 없고, 예배드리면서 말씀을 듣고 감동 받고 싶은데 그저 졸립기만 하고, 내 마음은 찬양하고 싶은데, 첫 소절 부르고 나면 목이 잠기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가진 적이 없습니까?  
분명 있었고, 또 지금도 이런 감정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면, 이런 갈등 속에서, 여러분이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저 없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육신의 소욕을 따를 것이냐?  성령의 소욕을 따를 것이냐?   이제 양단간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내가 이 시점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  여기에 따라, 이 결정에 따라 여러분의 삶이 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영성 있는 사람들은, 이런 선택의 귀로에 섰을 때, 주저 없이 사는 길, 성령의 소욕을 택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런 주저 없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잠 8 : 17절에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간절히 찾고 바라는 마음을, 우리는 갈망이라고 표현합니다.  갈망, 목마름과 같은 갈급함으로 소망하는 것이지요.   
누구를 이렇게 소망합니까?  신앙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 그 분을 우리는 갈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아멘!!!  

그런데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고라 자손에게, 이런 갈급한 신앙이 있었습니까?  아니,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평범한 신앙의 사람으로,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한, 뜨뜨미지근한 신앙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앙이 주님의 인정도 못 받고, 주님의 관심도 못 받고, 또 세상에서도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가운데, 늘 피곤하고, 늘 지쳐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피곤해 죽겠다.  짜증나 죽겠다.”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맨 날 이런 소리하고 다니니, 그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믿음이 좋다고 하는 너 고라 자손아,   네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까지 믿었던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 있느냐?  왜 너의 하나님은 너를 이렇게 절망하게 만들었느냐?” 
이런 소리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소리를 듣는 신앙이라면, 그 신앙이 과연 온전한 신앙이겠습니까?  점수로 치면, 빵점짜리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소리 들으며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가운데서는, 이런 소리 듣는 성도들이 없습니까?   
그런데 이런 소리 들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성도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의 신앙 양심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양심에 털이 나 있던지...  신앙이 고장 난 상태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고라 자손은, 이런 심령의 상태가 아니라, 그래도 깨어 있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이 이런 소리를 할 때, 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이 소리에 고라 자손은 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울었던지, 오늘 본문은,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보세요.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 때문에 울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주는 아픔 때문에 울어보고, 친구로부터 배신당해서 울어본 적은 있었지만, 하나님 때문에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인생이 너무 힘들어 서러워서 울어본 적은 있었지만, 하나님 때문에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 때문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함 때문에 감격해서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나 같은 죄인,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내 인격이 무시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함으로 인해, 속이 상해 울어본 적은 있지만, 오늘 본문의 고라 자손과 같이, 신앙을 떠나 살면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비아냥거림에 속이 상해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이 본문의 주인공인 고라 자손은, 이런 일 때문에, 자신이 아닌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너무 슬퍼서, 눈물바다를 이룰 정도로, 주야로 울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자신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나타나기를 소원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울음이, 이제 우리의 심령 가운데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편기자인 고라자손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울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는, 성일(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 도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이 고라 자손의 신앙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일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일, 주일을 지키는 신앙도, 이제는 과거의 신앙이었고, 지금의 신앙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 라고, 성일을 지킨 그 시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 옛날이여~  이렇게 과거만 추억하는 신앙,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쳐다보지도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아니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런 사람은 주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요 4 : 23절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누구를 찾으신다고 했습니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령과 진정은 고사하고, 예배 시간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교회 성도들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면서도 전혀 이런 신앙이 잘못되어진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출 31 : 14절에 보면,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 지며,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일성수에 대해 얼마나 강력하게 명령하고 계십니까?  
성일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죽일지라고 했습니다.  
생명이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어찌 보면, 참 살벌한 말씀입니다. .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성일인 주일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습니까? 
자기 맘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쉬운 표현으로 하면, 시간 되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이 주일이 어디 내 날입니까?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의 시간입니다. 아멘!!  그런데 왜 그 날을 마치 내 날인 것처럼, 내 시간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습니까?  벌써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출 31장의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벌써 죽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살아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과연 감사한 일입니까?  할렐루야!!  외쳐야 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고라 자손과 같이, 통회하며 자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주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를 죽이지 않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해서도 아니요, 우리가 불쌍해서 참으신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차마 죽이지 못해 살려두신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마음은,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이런 하나님의 실제 마음을 알고 있다면,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이 징계하지 않는 것을, 감히 감사하다는 말이 나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외치지 못할 것입니다.   
왜요?  그런 표현은 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라 자손이 왜 성일을 지키지 못했음에 울고 있습니까? 이제 서야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자기를 미워하시기에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나를  간절히 원하시고, 나를 하나님 가까이에 두고픈 열망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마음을 이제는 헤아리면서 통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여러분을, 이 예배 시간을 통해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여러분과 이 예배를 통해 영적으로 교제하기를 갈망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이처럼 만나기를  소원하는 갈망이 있습니까?   주님과 영적으로 교제하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있습니까?   이런 갈망, 이런 간절함이, 우리에게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신앙을, 우리는 속히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도, 결코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주일 성수는, 성도의 기본 중의 기본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기본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능력, 이 모든 것도, 신앙의 기본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기본은 반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성도의 기본인, 주일을 온전하게 지킴으로, 베드로와 같은 반석과 같은 신앙으로 인정받아, 그 신앙 위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세워지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둘째로 이 고라자손은, 친교의 기쁨을 잃은 것을 마음 아파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무리와 동행하는 기쁨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기쁨이 신앙생활에 큰 동력이 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을 상실함으로 인생에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고라 자손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고리타분한 교회를 떠나면, 좀더  익사이팅하고, 재밌고 즐거운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 친구들과의 만남을 더 소중히 했고, 또 세상의 문화를 즐기는 것을 더 귀하게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이 주는 기쁨은 잠간이었고, 그들 역시도 내 곁에 오래 머물러 있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또 다시 외롭고, 쓸쓸한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날에 신앙 안에서 만났던 믿음의 형제들과   자매들과의 교제를 기억하며,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란 무엇인가?  에클레시아, 성도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모임이라고 했다.   모임은 복수입니다.  단수, 개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개인적인 예배와 기도와 찬양만 있다면, 그것은 반쪽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라면, 사랑과 교제는 사람들을 향한,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는, 형제와 자매들을 향한 신앙의 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있는 곳에서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땀방울도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좋아하는 친구나 가족, 친지들에게는 수도 없이 전화하고, 선물을 뿌리고   또 뿌리면서도,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는, 대화도 별로 없고, 그들을 위한 희생이나 수고도 전혀 없다고 한다면, 어찌   그런 성도들을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신앙생활 한다면, 성도들 간에 신앙의 교제가 잘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가?  
왜이겠습니까?  서로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는, 영적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롬 8 : 28절에 말씀하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신앙생활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개인적으로는 너무 훌륭한 신앙인데도 불구하고, 왜 그 신앙 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까?  성도들과 합력하는 신앙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공동체라고 하는 신앙의식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저 자기 하나로 만족합니다.  하나의 불씨로 남아 있는데, 어찌 큰 불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심령 가운데, 영적 부흥이 일어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교제가, 우리의 신앙 가운데 다시금 회복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로 여러분에게 이런 신앙의 간절함이 없다면, 하나님께 대한 갈망, 성도의 교제에 대한 사모함이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부흥을 체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신앙이 부흥하기를 원하십니다.  
너무나도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여러분도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이런 영적 갈급함을 보여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매 주일 예배 시간을 이처럼 갈망하시고, 특별히 성도들과의 교제를 이처럼 갈망하면서, 다시 한번 여러분의 심령심령 마다 새로운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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