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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를 세우는 긍정의 힘 (막 9: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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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세우는 긍정의 힘 (막 9:21~24) 


안경을 바꾸면서

지난 한 주간 몇 분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안경 바꾸셨네요. 잘 어울립니다.” 여러분 잘 모르셨지요?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내가 파마를 해도, 헤어스타일을 바꿔도 전혀 눈치를 못 채서 구박을 받을 정도로 무덤덤하지만 눈썰미가 꽤 있는 분들이라 그런지, 제게 유난히도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몇 분은 이미 눈치를 채셨더군요. 저도 거의 10년 정도 쓴 안경이기에 정도 들고 많이 익숙해졌지만 이번에 큰 맘 먹고 한 번 바꾸어 보았습니다. 안경이 낡아서 바꾸기도 했지만 특히 오늘이 제가 본 교회에 부임한 지 꼭 만 5주년 되는 주일이기도 해서 한 번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져보자 하는 뜻에서 바꾼 것입니다. 

듣자 하니 여자 분들은 뭔가 변화를 가져보자 할 때, 혹은 심경의 변화가 있을 때 머리 모양을 바꾼다고 하더군요. 맞습니까? 그런데 짧은 머리를 한 제가 헤어스타일을 바꿀 수는 없고 해서 안경이라도 바꾸어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안경 하나 바꿨는데 인상이 많이 달라 보인다고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안경 하나 바꾸거나 헤어스타일만 바꾸어도 사람 인상이 썩 달라지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렇게 외모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 즉 내면이 바뀌는 것 아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아니, 아무리 외모가 바뀌고 우리의 겉모습이 달라진다 해도 속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라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속사람이, 내면이, 특히 내 사고방식과 자세가 달라지는 것이겠지요. 저는 이번에 부임 5주년을 맞으면서 겉모습이 아니라 제 자세를, 저의 목회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어 보려고 생각합니다. 또 저 자신뿐 아니라 우리 교회 온 성도들이 다 자세와 사고방식을 바꾸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바꾸느냐? 무엇보다 부정적 사고방식이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난 안 돼” 하는 자세에서 “난 할 수 있어” 하는 자세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할 수 없어 억지로 하는” 자세에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기꺼이, 열심히 하는 자세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사고방식에서 “저 사람도 귀하고, 저 사람도 하나님이 쓰신다”는 사고방식으로 바뀌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에 나온 것처럼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사고방식에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는 사고방식으로 바뀌기를 원합니다. 저도 그렇게 바꾸어 가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살고, 목회가 살고, 성도가 살고, 교회가 살겠기에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바뀌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살고, 교회가 살겠기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설교제목처럼 “교회를 세우는 긍정의 힘”입니다.


이 시대의 투덜이들

아이들이 즐겨보던 만화 가운데 ‘개구장이 스머프’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보신 적이 있나요? 제 수준이 아동 수준이라 그런지 저도 즐겨보곤 했습니다. 파란 색 난장이 스머프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삽니다. ‘랄~랄라 랄랄라’(스머프 노래) 노래를 부르며 버섯으로 만든 나지막한 집에서 오순도순 모여 삽니다. 그런데 얼핏 보면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스머프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다 다르게 생겼습니다. 성격도 가지가지입니다. 나이 많은 어른인 ‘파파 스머프’도 있고, 안경 쓰고 뭐든지 잘 아는 ‘똘똘이 스머프’도 있습니다. 예쁜 여자 스머프인 ‘스머페트’도 있고, 스머프들을 괴롭히는 ‘가가멜’이라는 못된 마술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머프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 중에 하나가 바로 ‘투덜이 스머프’입니다. 이 ‘투덜이 스머프’는 이름처럼 늘 투덜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항상 “이거 싫어, 저거 싫어” 하면서 늘 불평불만뿐입니다. 온통 싫은 것투성이입니다.

이 만화는 사실 어린이 만화지만 아주 심오한 교훈을 담은 만화입니다. 1958년 벨기에의 작가 피에르 클리포드라는 사람이 처음 이 만화를 그려낸 후 지금까지 50년 동안이나 사랑을 받는 까닭이 이 파란색 난장이 스머프들이 이야기가 바로 이 사회와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기 때문입니다. 스머프 동네처럼 우리가 사는 사회도 겉보기엔 다 그저 그렇게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긴 것도 제각각이고 성격도 제각각입니다. 사람들 모두는 나름대로 성격을 가지고 자기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거기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역을 맡은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똑똑한 사람도 있고 게으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꼭 존재하는 사람들이 바로 ‘투덜이 스머프’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매사에 투덜대고 불평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불만이지만 특히 남들이 하는 일이란 일은 모두 마음에 안 들고 불만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문제점이나 부정적인 면만 꼬집어 내는 일에 익숙합니다. 이 일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일은 저래서 안 되고 모든 것이 안 되는 이유투성이요 마음에 안 드는 일만 넘칩니다. 한 마디로 ‘부정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삶의 자세는 하나의 습관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긍정적인 자세도 습관이고 부정적인 자세도 습관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늘 모든 일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잘 될 이유를 찾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안 될 이유만 습관적으로 찾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굳어집니다. 그래서 습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티븐 코비(Stephen Covey)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베스트셀러가 있는데 이 책에서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 본디 영어 제목으로는 ‘the Highly Effective People’ 즉 영향력이 큰 사람들에게는 모두 몇 가지의 공통적인 습관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일곱 가지 다 소개하지 않겠지만 일곱 가지를 보면 모두 적극적인 사고방식,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즉 아무리 똑똑한 똑똑이 스머프도, 아무리 예쁘고 잘난 스머페트도 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느 사회나, 어느 단체나 꼭 있는 투덜이 스머프들은 남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뿐더러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남들이 기껏 좀 열심히 잘 해보려고 하면 늘 부정적인 말과 비판으로 힘 빠지게 하곤 하는데 그렇게 살면 정작 가장 손해 보는 것은 남들이 아닌, 주변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투덜이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이런 부정적인 사람들, 투덜이 스머프들이 교회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습관은 교회에서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이 뭘 좀 해보려고 할 때 일단은 비판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일단은 “그런 걸 왜 해?” “잘 안 될 텐데”하는 말부터 하고 봅니다. 이런 분들이 늘 즐겨 쓰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건전한 비판이 필요하다. 교회에도 야당이 있어야 발전한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건전한 비판도 필요하고 야당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솔직히 저는 이 ‘야당’이라는 말이 몹시 마음에 안 듭니다. 우리나라 정치를 보세요. 야당이 야당답던가요? 야당다운 야당은 무조건 비판만 하지 않습니다. 정말 여당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때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건전하게 비판하는 것이 진짜 야당이 할 일입니다. 그런데 저 정권 잡은 사람들이 하는 일마다 너무 꼴 보기 싫어서 여당이 하는 일마다 무조건 반대하고 비판하는 소위 ‘발목잡기’ 식 야당노릇을 한다면 그건 잘못된 야당입니다. 정말 상대방이 내 정치적인 반대파라도 잘하는 일이면 박수 쳐주고 적극 협조하는 것이 바른 야당이 할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회자나 다른 성도가 하는 일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정말 잘못된 길이 아니라면, 순수하게 교회를 발전시키고 잘되게 하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면 내 생각은 좀 다르고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더라도 박수 쳐주고 적극 협조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것만 늘 옳고 남이 하는 것은 늘 부족하고 틀렸다는 식으로 고집하며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고 야당을 위한 야당을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꼭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요새 누구 목사님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있나? 누가 좀 삐딱하게 구나보네.” 하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런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분들 야단 치고 꼼짝 못하게 만들려고 이 귀한 설교시간을 쓰는 저라면 목회자 자격 없습니다. 누군가를 비판하려는 목적이면 그냥 불러 야단치고 말지 이 귀한 설교시간 낭비 안 합니다. 제가 이 귀한 시간에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성경이 우리의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경계하고 신앙생활도, 교회봉사도 모든 것을 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하도록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힘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님 자신이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의 자세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다시 한 번 본문 23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습니까?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가 변화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니 제자들이 야단법석입니다.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는데 그 아들은 더러운 귀신이 들려 아무 때나 거품을 물고 거꾸러지고 이를 갈고 끔찍한 몰골이 되곤 합니다. 게다가 귀신은 그 아이를 해치려고 발작을 일으켜 불에도 들어가게 하고 물에도 들어가게 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해치고 망하게 하는 것이 귀신의 주특기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무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아들을 고쳐달라고 데려온 것인데 예수님이 안 계신 사이 제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고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마침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고 그 아버지는 주님을 향해 이렇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예수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여기서 ‘우리’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집안에 중한 환자가 있거나 심한 장애를 가진 가족이 있으면 그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 전체가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릅니다. 이런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게 아플 것이며, 이런 배우자를 둔 분은 또 얼마나 큰 고통을 함께 받겠습니까? 그래서 이 아버지는 “이 아이를 불쌍히 여기사” 하지 않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청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예수님 같으면 “그래, 알았다. 내 네 믿음을 봐서라도 네 아들을 고쳐주마” 하셔야 할 텐데 주님은 무척 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환자 자신의 믿음뿐 아니라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처럼 다른 사람의 믿음을 보고도 환자를 고쳐주곤 하시는 분인데 이 경우는 좀 달랐습니다. 이 아버지의 자세를 믿음으로 안 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하실 수 있다면 좀 고쳐주세요”라는 말이 좀 믿음은 부족해 보여도 그래도 믿음은 믿음 아닙니까? 사실 우리도 기도하면서 이런 말 참 많이 씁니다. “하나님, 하실 수만 있다면, 주님이 원하신다면 이루어 주시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안 보셨습니다. “너처럼 ‘할 수 있거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할 수 있거든’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그런 불신앙이 어디 있느냐?” 하신 것입니다. 즉 이런 반신반의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긍정을 곧 믿음으로 보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은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안 돼” 하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은 물론이고, “이게 가능할까” 혹은 “이렇게 될 수만 있다면 참 좋겠는데” 하는 식의 희미한 자세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된다, 뭐든지 가능하다”라는 분명한 긍정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신앙의 세계에서는, 교회 안에서는 투덜이도, 부정이도, 불평불만이도 다 믿음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은 하실 수 있다”는 생각, 그러므로 “그 주님을 믿으면 나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만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긍정의 믿음을 가진 사람, 적극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진짜 그 일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긍정의 힘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긍정의 힘

저는 이 긍정의 힘이 믿는 자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긍정이 필요합니다. 툭하면 “우리나라는 왜 이 모양이야? 이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틀렸어” 하고 말하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바로 우리를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런 말 하는 분들은 다 우리나라 사람 아닙니까? 마치 나는 이 나라 사람 아닌 것처럼 그렇게 제3자가 되어 구경꾼처럼 비판을 합니다. 

지금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총체적 위기에 빠진 이 나라를 구할 힘은 이런 구경꾼이 아닌 제3자가 아닌 이 나라 이 민족의 고통을 곧 나의 고통으로 알고 함께 아파하며 눈물로 기도하며 “그래도 하나님은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하시니까 분명히 지켜주실 거야, 잘 될 거야” 하는 긍정의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왜 애들이 저 모양이야? 왜 집구석이 이 모양이야?”하면 그 애들이 그래 남의 애들이고 그 집구석이 남의 집구석입니까? 내 애들이요 내 집구석 아닙니까? 그러니까 내 자녀 내 집 내가 책임져야지 누가 책임집니까? 가정이 어렵고 위기가 닥쳐올 때 너도 나도 비난하고 서로를 탓하고 있으면 그것은 제 얼굴에 침 뱉기일 뿐 문제해결의 방법이 아닙니다. 내 집 위해 함께 아파하고 눈물로 기도할 사람은 나밖에 없습니다. 왜? 내 집이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힘들고 어렵지만, 애들은 저 모앙이고, 집안 꼴이 말이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도우시면 반드시 잘 될 것이라는 긍정의 믿음을 가져야만 내 자녀 잘되고 내 집안이 잘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런 긍정의 믿음은 특히 교회 공동체에 꼭 필요합니다. 이런 긍정의 믿음이야말로 교회를 세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흔들리고 무너지는 교회들을 보십시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물을 흐리듯 꼭 부정적인 소수의 투덜이가 교회 전체 분위기를 흐려놓습니다. 순수한 교회 사랑의 마음으로 뭘 좀 열심히 해보려는 사람들을 맥 빠지게 하고 나아가 교회 전체를 어지럽게 합니다. 

안 되는 집안의 공통적인 특징이 온 식구가 서로 탓하며 “이놈의 집안은 당신 때문에 안 돼” 하며 안 되는 이유만 찾는 것이듯, 안 되는 교회의 특징은 목회자가 장로 탓하고 성도 탓하는 교회, 성도가 목회자 탓하고 다른 성도 탓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저 사람 때문에 안 돼”하고 말입니다. 반대로 “나 때문입니다. 다 내 탓입니다. 내가 부족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모두가 이런 말을 하는 교회, “나는 부족하지만, 우리 교회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하실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는 교회가 잘되는 교회입니다. 정말 잘못된 길로 가는 것만 아니면 성도들은 목회자가 하는 일을 인정하고 도와주며 성도들끼리 서로 품고 이해하는 교회, 목회자는 내가 영광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가장 큰 희생을 각오하고 목회하는 교회, 서로 간에 정말 정직과 신뢰가 바탕이 된 교회가 잘되는 교회입니다. “이게 남의 교회냐? 교회의 부족함이 곧 나의 부족함이고 교회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지” 하는 마음으로 모든 성도와 목회자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우리는 잘 될 것이다”라고 믿는 교회가 잘 될 교회요 이것이 바로 교회를 세우는 긍정의 힘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5년 동안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목회했습니다. 정말 신나고 즐겁게 목회했고 교회도 나름대로 성장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해, 이만하면 됐어” 하고 제자리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더 변하고 더 발전해야 합니다. 개구리도 더 멀리 뛰려면 더 몸을 움츠려 에너지를 모아 단번에 분출해야 하듯 어느 교회나 한 단계 더 껑충 뛰어 도약하려면 큰 동력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 우리 교회에 필요한 그 힘이 뭐냐? 바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의 사고방식입니다. 이 시점에 부정적인 생각, 난 안 된다는, 우리는 안 된다는 사고는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불신앙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정말 가능성이 없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절인 24절에서도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신 말씀을 듣고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고백이 이 부르짖음이 곧 우리의 고백, 우리의 부르짖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과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은 할 수 있습니다. 나도 할 수 있고 내 자녀와 내 가정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기도 : 하나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나의 부정적인 눈, 나의 의심스러운 마음을 고치시고 주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그리고 이 믿음을 근거로 한 긍정의 힘으로 나를 만져주소서. 우리 교회를 만지소서. 내 가정과 이 나라 이 민족을 만지소서. 그리고 고쳐주소서. 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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