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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이냐 아들이냐 (갈 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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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냐 아들이냐 (갈 4:1~31)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의 1882년 작품 [왕자와 거지]를 보면, 왕자는 거지소굴에서 거지차림을 하고 있으면서도 계속 왕자처럼 행세하려 합니다. 반면에 거지는 왕궁에서 왕자복장을 하고 있지만 거지처럼 행세합니다. ‘실제의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에 대한 인식은 그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성도의 삶 역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 막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벤허」 영화를 보면 로마 장군 에리오스가 벤허를 양자로 선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로마인 풍습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데요, 그들은 자녀가 성인이 되면 토가(toga)라는 옷을 입히고 잔치 중에 상속권을 가진 ‘내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했습니다. 친아들이든 양아들이든 상관없이 아들로 인정된 그 때부터 그는 상속인으로서의 모든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 노예로 팔렸던 벤허도 로마 장군의 상속자가 되었지요.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면 1-2절 말씀에 대한 이해가 한결 쉽습니다. 유업을 이을 사람은 모든 것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종과 다름이 없고, 아버지가 정해 놓은 때까지는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3)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중생한 성도도 일정한 때까지는 종처럼 지낸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중생한 사람은 율법의 종노릇을 다시는 하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렸을 때”라는 말은 구속사에서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시기를 말합니다. 그 때는 하나님 백성 전체가 유아기 상태에 있었습니다. 계시가 밝히 드러나지 않은 미숙한 기간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며 살았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의 종노릇했고, 이방인은 우상과 거짓 사상의 종노릇했습니다. 삶의 형태는 차이가 있지만 참 신앙을 알지 못한 미숙함은 같기 때문에, 율법 아래의 삶도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 있는 삶의 한 형태였습니다.

구속사의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4).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하시려는 이유였습니다(5). 이 때문에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 있던 갈라디아 성도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6). 혈통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나 유대 풍습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갈라디아 성도들은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 라는 사실입니다. 아들로 선언되었다면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더 이상 아들이 되기 위해 해야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 하나님의 백성 전체는 성인으로 인정 되었습니다. 신약 교회는 더 이상 유아시기에 있지 않고 성인된 상태에 있습니다. 개개인의 경건성을 보면 전혀 성인처럼 여겨질 수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성인으로 인정되었고 하나님의 양자로 선언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까닭이 구약 성도들의 제사나 기도보다 더 경건하고 더 거룩하고 더 헌신적이기 때문이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은혜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벤허가 장군의 양자가 되고서도 다시 노예처럼 행동하려고 했다면 얼마나 어리석어 보였을까요?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 이후에도 기어이 율법의 종노릇을 하려고 애썼습니다. 이미 성인된 상태에 있는 그들이 유아처럼 행동하려는 퇴행현상을 보이고 있으니, 바울은 몹시 답답했습니다.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8-11).

갈라디아 성도들은 복음을 버리려하지는 않았지만 복음에 잘못된 가르침을 추가하려 했습니다. 믿음에 율법을 추가하여 순수했던 믿음을 더럽혔습니다. 은혜에 행위를 더하여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큰 가치가 없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대신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절기들을 삼가 중요한 것처럼 지킴으로써, 마치 어떤 의식 절차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처럼 복음을 왜곡했습니다. 이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양자 삼아주셨지만 종으로 사는 게 더 좋아요’라고 반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복음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배반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수고가 모두 헛되게 되는 것 같아 두려워합니다. 약하고 빈약하여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에 무능하며 오히려 종노릇 밖에 못하게 하는 초등학문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가볍게 생각하고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주일을 기독교인의 안식일로 여기고 지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그분 안에서 성취된 안식을 누립니다. 하지만 그 날을 반드시 해야 할 율법 의식의 하나처럼 여기고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 율법 하에서는 나무를 하거나 요리만 해도 사형 당했지만, 주일 예배에 빠졌다고 사형시키지는 않지요. 다만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 자연스러운 반응으로서 주일을 구별하여 지킵니다. 성령께서는 소원을 주셔서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고 찬양하기 원하게 하시며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자신을 드리고자 힘쓰게 하십니다. 율법의 정신을 자기도 모르게 행하고 있지만, 결코 율법 아래 지배를 당하지 않습니다. 

주일마저도 ‘율법의 하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많은 행사일정과 모임을 만들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율법처럼 성도를 속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속박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노예가 아닌 아들로서 살아야 합니다. 다만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중요하지요.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교제하는 것을 기뻐하고,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아버지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는 일들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들다움의 자연스러운 표현인 까닭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믿음과 삶에 있어서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고 합니다(12). 바울은 우리로서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는 “육체의 약함” 때문에 갈라디아를 방문했다가 복음을 전했습니다(13). 그의 육체적 약함은 멸시받거나 침 뱉음 당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지만, 갈라디아인들 성도들은 마치 하나님의 천사나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습니다(14).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멸시함으로써 하나님의 복음도 멸시하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내용보다는 빼어난 경력이나 인지도, 화술이나 설득력, 재미와 감동, 혹은 설교의 길이에 따라 비판함으로써 말씀을 배척함으로 복을 걷어찹니다. 그러한 일들을 생각할 때, 갈라디아 성도들은 참으로 복이 있었습니다. 할 수만 있었다면 눈이라도 뽑아 주려 했던 그들의 태도가 계기가 되어 복음에서 눈뜨게 되었고 세상의 초등 학문에 더 이상 종노릇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갈라디아 교회는 은혜롭고도 아름답게 세워졌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복음의 원수가 되었을 때, 복음을 전한 자에 대해서도 태도가 돌변했습니다(16). 천사 같던 존재를 한 순간에 원수로 사도가 아닌 자로 여기게 된 것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이간질’에 대한 악감정 때문이 아니라, 이간질로 인해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을 떠나고 있기 때문에 당황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19-20). 바울은 여전히 그들을 “나의 자녀들”이라 부르지만, 마치 그들을 유산한 자처럼 여깁니다. 그리고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듯 처음부터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 바울은 율법에 기록된 사건을 비유로 하여 누가 참 하나님의 백성인지 말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계집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자유인 사라에게서 난 이삭입니다(22-23). 바울은 두 언약을 풍유적으로 대비하면서 ‘계집종’ 하갈과 ‘종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들이 살았던 지역이면서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시내산’과 바울 당시 ‘예루살렘’을 한 부류로 묶습니다. 그리고 ‘자유한 여자’ 사라와 ‘약속의 자녀’ 이삭과 ‘시온산’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또 다른 한 부류로 묶습니다(24-27). 결국 이스마엘은 내어 쫓기고 이삭이 유업을 얻습니다(30).  

이스마엘은 당시 사회풍습과 자연적인 출생법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반면에 이삭은 아브라함의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때에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아브라함의 참 아들과 ‘참 하나님의 백성’은 자연적 출생의 이스마엘과 혈통의 후손이 아니라 초자연적 출생의 이삭과 믿음 후손들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의 중심지도 바울 당시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 불리는 새 예루살렘, 곧 아브라함의 믿음을 좇는 교회 공동체라고 해석합니다. 

육체를 따라 태어났던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희롱했습니다. 바울은 핍박했다고 말합니다(29). 이처럼 어느 시대에나 언약의 자녀인 참 성도들, 달리 표현해서 참 하나님의 백성, 혹은 참 교회는 성도처럼 보이는 거짓 성도들에게 조롱당하고 유혹 받고 핍박을 받습니다. 하지만 결국 약속을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30).

성도는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마지못해 율법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자유롭게 살지만 율법을 성취하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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