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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부(吩咐) 응답 (마 28:16~20) -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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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부(吩咐) 응답 (마 28:16~20)


제가, 연세 드신 어른들로부터 종종 직간접적으로 듣는 말씀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찬양인도하실 때,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려운 것보다 부르기 쉬운 찬송가나 복음송을 불렀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이 즐겨 부르는 복음송, 쬐끔 거짓말치면 거의 박자 못 맞춥니다. 가사 따라서 못 부릅니다. 그러나 저는 틀리면서도 그 노래 같이 부릅니다. 왜, 부르는지는 아십니까? 제가, 젊은이들과 청년들의 목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전통음악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교회 목사들, 연령대가 저를 포함해서 40대가 절반 30대가 절반입니다. 우리 목사들 중에 누가 제일 나이 많을까요? 예, 당연히 제가 제일 나이 많습니다. 제가 부목사님들보다 서너 살은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목사들 중에서 누가 제일 생각이 젊을까요? 착각은 자유라지만, 우리 목사들 중에서 생각이 제일 젊은 목사가 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제가 우리 목사들 중에서 생각이 제일 좁고, 늙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교회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우리 목사님들보다 생각의 폭이 넓습니다. 목사님들보다 한 가지 더 뛰어난 것이 있습니다. 제가 부목사님들보다는 균형감각이 쬐끔 더 뛰어납니다. 

어느교회를 막론하고 宣敎를 이야기할 때, 늘 나오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교회 안에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國內에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外國까지 가서 일할 이유가 무엇이냐? 내 코가 석 자나 빠졌는데 무슨 힘으로 남까지 도울 수 있느냐”는 겁니다. 다 一理가 있는 말씀입니다. 

작년에 우리교회는, 65주년을 기념하면서 65주년기념 예목교회를 개척, 설립했습니다. 15억이나 되는 예산이 들었습니다. 적잖은 돈입니다. 15억 예산 은행에 적립해 놓았던 돈으로 기념교회를 개척, 설립한 것 아닙니다. 65주년기념 예목교회 개척, 설립하면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인 저에게도 “내 코가 석잔데” 하는 마음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사실, 그 마음 제일 많이 가졌던 사람이 우리교회에서 누구였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라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죄송합디만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지신 그 마음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내 코가 석잔데”하는 마음 제일 많이 가진 사람이 바로 교회를 담임하는 저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바보 목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제가 바보가 아닙니다. 저는, 내 코가 석잔 줄 뻔히 다 알면서도 또 다른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균형과 스케일의 문제입니다. 야구 감독을 보십시오. 세계적인 에이스급 투수를 보십시오. 감독과 투수의 경기를 보고 읽는 눈은 다릅니다.  투수는, 자기가 선발 등판하는 경기에서 어떠하든지 승리투수가 되고 싶어하지요. 할 수만 있다면, 상대타자를 스트라이크로 잡아서 삼진 아웃시켜 돌려세우고 싶어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더 좋은 일이 어딨겠습니까? 그러나 감독은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독은, 아무리 에이스 투수라 할지라도 상대타자에게 안타 맞을 것도 예상합니다. 홈런 맞을 각오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패할 각오까지도 합니다. 그러면서 팀을 이끌어 갑니다. 

한 번의 패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시즌을 생각하지요. 한 해를 생각합니다. 팀의 進路와 存廢를 생각하면서, 팀을 이끌어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번의 패배에, 한 방 맞은 홈런 때문에 결코 좌절挫折하지 않습니다. 그게 감독과 투수의 차이점입니다. 

작년 이맘때이지요(7월 19일). 우리나라의 23명의 선교봉사단원들이 아프간에서 피랍되었습니다. 두 명의 희생자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그 일로, 선교단원을 파송했던 교회는 물론, 가족들, 한국교회까지 참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 때, 안티크리스챤들이 한국개신교를 배타적이다 독선적이다 하면서 얼마나 질타했는지 모릅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욕한 바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 사건이 아니었을지라도 그런 입장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 일로, 한국교회의 선교는 많은 반성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공감대가 이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 속에서도,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선교意志입니다. 선교헌신獻身입니다. 왜냐하면, 선교는 교회의 존재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오늘말씀 보십시오.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吩咐)입니다. 吩咐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당부’와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선교학에서는, 선교를 교회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큰 使命을 부여하고 가셨습니다. 대위임령大委任令이라고 하지요. 본문 19, 20말씀입니다. “그러므로(결론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 19-20).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는, 全部 動詞命令形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본에는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인 토요다(렉서스)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는, 자동차 회사가 토요다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혼다라는 유명한 자동차 회사도 있습니다. 토요다에 비하면 혼다는 그 규모가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작습니다. 그렇지만, 세계적인 토요다 자동차가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자동차가 혼다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혼다라는 기업이(오토바이& 첨단로봇산업 등) 가지고 있는 꿈이, 토요다보다 더 크기 때문이랍니다. 혼다의 스케일이 토요다보다 더 크다는 이야깁니다. 혼다가  품고 있는 꿈 때문에 토요다가 경쟁 상대가 되지도 않는 혼다를 무서워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품고 계시는 뜻은 世界的이고 宇宙的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은 ‘아브람’입니다. 그 뜻이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시며 명하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새 이름에,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비전을 담으셨던 거지요.  

그의 아내 ‘사래’의 이름도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2, 1; 17, 15-16). 

아브라함과 사라는, 열국의 아버지와 열국의 어머니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십니까? 열국의 아버지가 되고, 열국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부터 주신 분부(하나님의 명령)였습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계승되어야 하는 분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불행하게도 그들은 하나님의 분부에 응답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正反對로 행합니다. 그들은 열국을 품는 자가 아니라, 열국을 포기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 아닌 나라와 백성들을 異邦人이라 하면서, 심하게 구별하고 차별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만 고집하는 이상한 나라와 민족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민사상입니다(우리만 선택받았다). 성민주의입니다(구심력만 키웠습니다). 

求心力이 있으면 遠心力도 있어야 균형을 이루면서, 방향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요. 원심력을 잃어버리고 구심력만 남으면, 그냥 자기 안에서 맴돌다가 스스로 충돌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스라엘, 유대종교의 패망은 선민주의, 성민주의, 구심력만 作動하면서 일어난 결과입니다. 

짐 콜린스(Jim Collins)가 쓴, 좋은 기업을 넘어서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전엔, 기업의 최대경영목표는 최대한의 기업이윤추구였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게 기업경영을 하다간 망합니다. 기업이윤창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지요, 좋은 기업이 되는 것이고, 나아가 위대한 기업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기업의 對 社會的인 봉사와 責任意識에서 가능합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89%가 “값이 비싸도 사회공헌을 잘 하는 기업의 제품을 구입하겠다”는 답을 했습니다. 또 98.7%의 응답자들이 “기업은 나눔 경영으로 더 큰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부가가치가 더 높다). 사회공헌 활동에 참여하는 기업을, 국민들이 존경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미 수준을 요구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거지요(6월 19일 국민일보). 

교회는 이보다 더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교회만 살찌우고 배부른 교회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습니다. 도리어 선교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할 수만 있다면 절제하고, 좀 불편하게 사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교회가 되도록 목회하겠습니다. 말은 쉽지만, 그런 교회가 되려면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적잖은 고생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한 번 곰곰이 되새겨보십시오. 지금, 예수님의 분부명령을 받은 제자들, 그들의 형편이 어떤 상황인지, 상황그림을 한 번 그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는 아직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제자들도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무슨 이야깁니까? 그만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身分이나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위험했다는 증거지요. 안정이 되지 않은 말할 것도 없고 굉장히 불안한 상황입니다. 

제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때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을 때입니다. 언제, 유대종교지도자들로부터 붙잡힐지, 죽임을 당할지,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예측불가능한 때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자기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배우고, 듣고, 익혔던 그 하나님 나라 복음 말씀을 감당하기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위기 상황입니다(죽음도 각오해야).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마지막 분부 곧 선교명령입니다. 

“너희는 가라 모든 민족을 제자 삼기 위해서,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恒常 함께 있으리라.”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1) 선교는, 狀況이 좋아지면 하고, 상황이 나쁘면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은 선교할 때가 아니라는 그런 말은 전혀 맞지 않는 말이라는 거지요.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하지요. 좀 형편이 나아지면 선교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바로 지금이 선교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의 내 삶의 자리, 형편이 선교해야만 하는 使命의 자리라는 겁니다. 

(2) 선교는,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일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는 말씀은, 主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라고 말하지 않습니까?(Missio Dei).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주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일이 곧 선교입니다.  

우리교회는, 어른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어느 권사님으로부터 개척한 지 1년 된 어느 교회, 일주년 감사예배 다녀오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교회는, 이제 개척한 지 1년 밖에 안 되었으니 교회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우리교회는, 정말로 투명하게 돈 잘 쓰는 교회입니다. 그러니, 누가 돈은 있는데 어디 쓸지 몰라서 고민하시는 분 계시면, 제발 우리교회에 헌금 좀 해 주시면, 유용하게 잘 쓰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답니다. 

제가 오늘 설교준비하면서, 한 가지 회개한 것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선교헌금도 드리나?(십일조와 감사헌금은 드리는데) 아이에게 물어보진 않았는데, 아빠가 눈치를 보면 왜, 모르겠습니까? 지금까지 사랑하는 아들에게, 선교헌금 드리는 믿음도 가르쳐 주지 못했구나, 선교헌금을 드려야 하는 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아빠로서 깜짝 놀랐습니다. 한 달에 용돈 3만원 씩 주는 데, 용돈을 올려주는 한이 있어도, 선교헌금드리는 믿음, 헌신,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교회도, 선교 좀 해보려고 하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참 궁색합니다. 교우들의 선교헌금의 열정이 더 뜨거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일반재정에서 선교비로 이월시켜 가면서 선교하는 형편입니다.  

제가 보름 전에, 예전에 원로 목사님 사시던 사택을 수리해서 이사왔습니다.  새벽기도 가려고 교회로 오다가 몇 번이나 교회 앞에서, 한 연로하신 권사님을 뵈었습니다. 그런 권사님은 그 시간에 교회로 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이른 새벽녘에 다른 방향으로 가시는 거였습니다. 여쭤보기가 죄송스러워 그저 인사만 드리고는(속으로, 일찍 기도하시고 어딜 가시나 보다 했는데, 아내를 통해서 들은 얘깁니다), 글쎄 그 권사님이, 그 새벽녘에 전철역까지 걸어가셔서 전철을 타고 멀리 안산까지 일하러 다니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번 돈으로, 십일조 드리고 헌금하신답니다(요즘 老益壯을 과시하는 분 多→권사님은 老益善을 과시하는 믿음의 어른이시다). 온 교우들이 한 분도 빠짐없이, 선교의 사명,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 명령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당회 때, 우리교회 선교사 파송건을 심의하려고 합니다. 이미, 인사위원회에서는 결정을 했습니다. 일 년 전부터, 준비해 온 일입니다. 금년도 예산에도 다 세워놓은 일입니다. 결정되면, 여러분께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교회가 행하는 선교가 많습니다. 떠벌리고 자랑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교회 선교 열심히 잘 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북방선교에 큰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빵이 없는 국가와 지역을 섬기는 일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선교는, 우리교회의 균형과 스케일을 키우는 교회본연의 사명입니다. 낭비가 아닙니다. 교회를 축복하는 통로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마땅한 의무, 吩咐). 여름철 국외 단기선교, 국내선교봉사, 모든 사역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 우리교회를 66년 동안 부흥발전하게 하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지난해, 65주년기념 예목교회를 개척, 설립하게 하심 감사합니다. 북방선교를 위해서, 공산권에도 교회 세우게 하심 감사합니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 되게 하심 감사합니다. 선교하러 곳곳으로 나아가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선교헌금 드려 선교하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간절히 비옵나이다. 우리교회가 萬民에게 福音을 傳播하라 명하신 주님의 吩咐에 應答하므로, 균형이 잡힌 교회, 교회의 지경을 점점 더 넓혀가는 복의 근원되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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