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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 속에 임하는 은혜 (요 4: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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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속에 임하는 은혜 (요 4:21~26)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라는 것을 소명의식(calling)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부르심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존재적 부름(call to be)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졌느냐(to have) 보다는 무엇이 되었느냐(to be)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생각, 말과 행동을 닮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빌2: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② 행위적 부름(call to do) 

그리스도인은 행위(삶)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5:16절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③ 소속의 부름(call to belong)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생명, 재능, 재물, 지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끊임없이 듣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생활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를 바르게 드릴까요? 
본문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은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하는 장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20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장소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역사적인 배경을 잠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오던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BC931년 솔로몬 사후 남북으로 분열됩니다. 

사마리아를 도읍지로 정한 북쪽을 북이스라엘 왕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북이스라엘왕국은 BC722년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멸망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제국은 영구통치를 위하여 혼혈정책을 썼습니다. 

따라서 북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은 피를 순수하게 보존하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통일 왕국의 남쪽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남유다왕국이라고 불렀습니다. 
남유다왕국도 BC586년에 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멸망되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남유다 백성들은 포로생활을 하면서 죽음으로 피의 순수성과 여호와신앙을 보존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제국에 멸망되고 유대인 포로귀환이 이뤄집니다. 
스룹바벨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수축할 때입니다. 
북쪽에 있던 사마리아인(옛날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에 참여하겠다고 제안합니다. 
스룹바벨을 비롯한 남유다 백성들은 북쪽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피를 더럽혔다는 것이지요.(스4:1-6) 

갈등은 시작되었고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해결책으로 BC 322년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운 것입니다. 

그 후 약 200년간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심산 성전이 같이 존속한 것입니다. 
그리심산 성전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힐카누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을 기도처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서있는 사마리아 여인은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1. 바른 예배를 드리자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이 설명하는 내용을 살펴봅시다. 

1) 예배는 누구에게 드리는 것입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예배드리는 장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소보다는 누구에게 예배드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누구에게 드려야 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참 예배자는 이 점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예배는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나’ 좋으라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좋으라고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 시에 드려지는 찬송, 기도, 헌금의 진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2) 예배는 누구를 통하여 드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허물 많고, 죄 된 인간이 절대 의로우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는 말씀은 유대인 중의 한 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엡3:12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보혈을 지나’라는 복음성가를 묵상해보십시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3) 예배는 누가 드리는 것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예배자는 ‘신령과 진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신령’이란 성령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 성령의 임재가 없다면 그 모임은 공회당 모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성령이 마음을 열게 합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합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합니다. 

‘진정’이란 진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고, 나의 주장과 고집은 죽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가치관을 깨뜨리겠다는 결단을 말합니다. 
참된 예배는 성령의 임재를 환영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사람이 드릴 수가 있습니다. 


2. 예배를 통하여 임하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안식을 얻게 됩니다. 
창2:3절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그런데 참된 안식(rest)은 단순히 하던 일을 중단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근심 걱정이 많은 상태에서 일을 안 한다고 안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경우 차라리 일하는 것이 속 편할지 모릅니다. 

안식하려면 회복(restoration)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식(rest)이란 단어는 회복(restoration)이란 단어에서 왔습니다. 
육체가 피곤에서 회복되어야 안식이 옵니다. 
마음이 걱정 근심에서 평안으로 회복되어야 안식이 옵니다. 
영혼이 죄로부터 해방되어야 안식이 옵니다. 
예배는 바로 우리에게 이런 회복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 속에 임하는 은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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