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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오직 한 가지 은혜 (롬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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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가지 은혜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미국에서 가장 인기리에 방영되는 일일드라마 중의 하나가 빌 코스비(Bill Cosby)가 출연하는 가정드라마입니다. 빌 코스비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흑인 가정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입니다. 빌 코스비는 극중에서 의사이고 그의 부인은 여자 변호사이며, 슬하에 대 여섯 명의 자녀들을 두고 있습니다. 부부간의 얽힌 얘기, 부모와 자식 간에 얽힌 얘기, 자녀들 간에 얽힌 얘기, 사춘기 자녀들의 이성교제 등, 가정의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어서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일일연속 드라마(Soap Opera)입니다.

빌 코스비는 자녀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특히 아들들이 자꾸 커가는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시간을 아들들과 보내기로 마음먹습니다. 축구도 같이 하고 게임도 같이 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함께 놀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공을 들였습니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 풋볼시합에 나가 결승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시합을 하기 전에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아들들이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처음 하는 말이 “하이 맘”(엄마 안녕하세요) 하면서 “엄마 고마워요. 꼭 이길게요” 등등 엄마에게만 많은 말을 하면서 아빠에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씁쓸했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아빠가 함께 풋볼을 하며 가르쳤기에 오늘의 훌륭한 선수가 되었는데도 엄마에게만 인사하고 아빠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들들에게 섭섭했을 것입니다.

이 광경을 두 가지 면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아버지는 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힘 있는 자이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축구는 아빠가 가르쳤지만 엄마의 돌봄으로 아이들이 자랐으니 아무래도 아빠보다는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마이크 앞에 섰을 때 엄마부터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어쨌든 이 장면에서 언뜻 떠오르는 생각은 사람에게 당연한 사람들, 즉 부모나 형제나 자녀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해야 한다는 기억력은 다른 기능에 비해 현저히 낮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특히 부모님은 당연히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양육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자녀들은 부모님이 잘 해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잘못한 것만 기억합니다. 

평생 부모님이 먹여 살렸는데도, 한때 부모님이 경제력을 잃어 잠시 다른 사람에게 밥을 얻어먹으면 부모님은 폄하하고 몇 번, 또는 몇 년 밥을 준 사람을 더 잘 기억하고 고맙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부모님이 철을 따라 옷을 입혀 주었는데도 거기에 대한 고마움은 별로 없고 친구 부모님이나 지인이 옷 한 벌 해주는 것은 평생 잊지 않고 고마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기본적인 것을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맑은 공기, 태양빛, 물과 나무, 온갖 자연을 주셨는데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 감사한 마음을 별로 갖지 않는 어리석음을 인간인 우리는 범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분들, 부모님이나 남편이나 아내, 나아가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은혜를 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들의 어리석음입니다 자녀는 부모님의 은혜에 망각의 세월을 사는 자들이요,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망각의 세월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며 섬겨줍니다. 스스로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남편의 위치를 높여 주려고 온갖 비위도 잘 맞춰줍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아내의 헌신적 사랑에 대해서는 쉽게 망각합니다. 당연한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술집이나 어느 서비스 영업장에서 다른 여자들이 상술적으로 미소를 보내며 조금만 친절을 보여줘도 가슴이 뛰고 머리가 빙빙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이번 제주도에서 초교파 목사님들이 모여 한 주간 동안 학회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서로 좌담하는 시간들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장로교 목사님의 얘기에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아는 분이 장가를 들어 재미있게 살다가 아내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니 주변에서 재혼을 권면하여 새장가를 갔답니다. 그런데 불행이도 얼마 안 되어 두 번째 부인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자복이 없다고 생각한 그분은 혼자 살려고 결심을 했는데도 주변의 성화에 못이겨 세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세 번째 부인은 매우 명랑하고 애교있는 여자였답니다. 몇 달 살더니 친구들에게 와서 “역시 장가는 세 번은 들어야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할 수 있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첫째와 둘째도 잘 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려서 그들의 사랑과 헌신을 쉽게 망각했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가 주보에 바자회 광고를 했답니다. “다음 주에는 여선교회 주최로 각 가정에서 필요 없는 물건들을 가져와 싸게 판매하는 행사를 가지려고 합니다. 잊지 마시고 남편들을 꼭 데려오시기를 바랍니다. 여선교회장.” 글쎄요. 남편들이 더 이상 가정에서 필요 없는 물건이라서 싸게 팔려는 의도인지 여선교회장의 저의가 의심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베풀어주는 사랑과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고마워하거나 감사하지 않을 때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습니다. 섭섭함이 이런 때에 만들어 집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의 농촌봉사활동은 자랑할만 합니다. 금년에도 충남 당진의 삼웅리에서 한 주간 동안 열심을 다해 봉사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흐뭇하고 그들이 대견스러웠습니다. 농부들의 일손만 돕는 것이 아니라 농촌교회에도 많은 도움을 주며 전도활동을 합니다. 나는 그들을 “농활대”라고 부르기 보다는 “농촌봉사선교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한 마을을 선택하면 꼭 3년씩 봉사선교활동을 합니다. 삼웅교회도 금년이 3년째인데 현장에 가보니 마을 사람들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그 교회에 냉난방기를 설치해 줬는데 금년은 일일찻집 등으로 모은 선교비 450만원을 지원하여 새 자동차를 사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자랑스런 청년들입니다.

언젠가 남쪽의 어떤 농촌교회에 3년을 여름마다 가서 봉사활동을 펼쳤습니다. 교회를 지을 땅을 사는데 800만원의 빚이 있다 해서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새 땅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없어서 80평의 논(평당6만원)을 사주어서 큰 도로에서 교회로 직접 들어가는 진입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교회는 새 땅에 교회를 짓고 잘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가 농촌교회로 잘 성장하는 과정이 교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크게 실렸습니다. 많은 얘기들이 실렸습니다. 그 큰 기사에서 우리교회 청년들 봉사활동은 단 한 줄도 없었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그 신문을 들고 제게 보여 주면서 “어쩌면 이럴 수가 있어요? 어느 독지가가 쌀 한가마 갖다 준 얘기는 감사하면서 3년이나 청년들이 땀 흘리며 봉사했는데 한 줄도 없으니 섭섭하네요.”하시는 모습을 보고 동감을 했습니다. 단 한 줄의 감사가 우리 청년들에게 큰 힘이 되고 격려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절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맥추감사절은 오래전인 출애굽시절부터 지켜오는 절기입니다. 모세오경에 보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이 절기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만든 절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절기라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출 34:22)

봄에 씨를 뿌려 처음 거둔 열매(초실)들을 성전제단에 올려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대개는 채소류와 밀, 귀리, 보리 등이 처음 거두는 열매들이었습니다. 보통 6월이나 7월 경에 드려진 절기입니다. 지금은 농경시대가 아니고 도시 문화권 속에 살고 있지만 맥추절은 1년의 절반, 즉 한해의 절반을 은혜 아래 살게 하심을 감사하는 예배의식입니다.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살맛나는 삶을 만들어가는 지름길이기도 하고 다시 살아갈 미래를 축복의 길로 열어가는 대문이기도 합니다. 감사만큼 삶을 여유 있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윌리암 로메인(William Romaine)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은 이 땅에서의 축복으로 천국의 맛을 경험할 수 있다”(Gratitude to God makes even a temporal blessing a taste of heaven)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게 마련입니다.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고, 자식들에게도 감사하게 되고, 형제들에게도 감사하게 되고, 교우들과 동료들에게도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는 우리의 생각을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 놓고 맙니다.

우리는 가끔 은혜에 대한 망각 속에 살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받아 놓고도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는 착각 속에서 살 때가 있습니다. 눅 15장의 탕자의 비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부모의 재산을 절반이나 탕진하고 병든 몸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아들을 껴안고 입 맞추며 새 옷을 갈아입히고 잔치를 베풀어줍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먹입니다. 그때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그 집 큰 아들이 몹시 분노를 느낍니다.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혼내주고 쫓아내야 하는데 거꾸로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맏아들은 이렇게 불평하며 분노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

아버지 말씀을 어긴 적이 없는데 내게 해준 일이 무엇이 있느냐는 항변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말투입니다. 그때 아버지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합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나의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 15:31)

“나의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My son, you are always with me).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지 감사의 조건으로 보지 않는데서 불행의 싹이 솟아나고 불만과 불신과 불평이 생겨납니다.

불효막심한 자일수록 부모님이 내게 해주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많은 것을 부모로부터 받았음에도(Even though they have received much from the parents)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불효자입니다. 비록 부모가 가난하여 자식을 풍족히 먹이지 못했다 할지라도, 남들처럼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시키지 못했다 해도, 생명자체를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부모는 누구나 자식을 위하는 마음이 세상과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분들입니다. 이것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한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여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창조주요,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세심한 섭리 하에 우리 생명이 창조되었고 이 세상에 보내졌습니다. 이 생명보다 더 큰 은혜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멸망과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던지 나를 살리시려고 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Christ died for me).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오직 이 한 가지 만으로라도(Only one thing Christ died for me) 우리는 평생을 엎디어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무시하고 삽니다.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면서도 우리의 가슴 속에 하나님 없이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술주정뱅이가 술에 잔뜩 취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비틀거리며 하는 말이 “나, 하나님 좀 만나려고 왔쑤다”하며 교회 문을 흔들어 댔습니다. 그때 교회 사찰집사가 뛰어와 술주정꾼을 끌어내며 야단을 칩니다. “여보, 교회는 술 먹고 와서 술주정하는 곳이 아니오. 교회는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곳이요.” 술주정꾼은 계속 소리를 칩니다. “그러니 이 양반아, 내가 그 하나님을 만나러 왔다지 않소?” 사찰은 더 큰 소리로 야단을 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분은 없다는데 왜 잔말이 많소!”

가끔 우리 마음속에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는지 가장 핵심적인 것을 잊고 감사예배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지난 반년 동안에도 많은 복을 받았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 가족이 건강하게 지낸 일도 감사합니다. 사업도 잘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잘 자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획했던 일들도 차질 없이 진척된 것도 감사합니다. 다 감사한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새해인 2008년의 전반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감사할 때에 하나님은 남은 후반기에 더 크고 풍성한 축복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감사가 있음을 잊지 맙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입니다. 내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죄인으로 있음에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우리가 평생토록 그분께 뜨거운 가슴으로 감사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Christ died for me). 아직 죄인이었는데도 하나님은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죽으시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나는 평생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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