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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 2단계의 결단 (고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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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단계의 결단 (고전 2:1~5)  

 
  목회자들 가운데 ‘설교 잘한다’라는 칭찬을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설교를 잘못하는 저도 누군가로부터 빈 말이라도 ‘설교를 참 잘한다’라는 칭찬을 들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어느 젊은 목사가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는 연세가 많으신 선배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 설교를 잘하고 싶은데 잘 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선배 목사님은 ‘자네 목회를 얼마나 했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10여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설교하기가 더 어려우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한 가지 물어봄세. 자네는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교인들로부터 설교를 잘한다는 평가를 듣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가?’ ‘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틀렸네. 어떻게 하면 저들을 구원할까,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은혜를 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말씀을 준비하고 증거해야 되지 설교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순간부터 이미 설교는 죽을쑤게 된다네.’ 라고 말했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설교를 하거나  무슨 봉사를 하거나 그곳에 자신의 공명심이 자리를 잡으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공명심을 내세우다가 선교에 실패한 뼈아픈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일로 인해 영적으로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바울이 아덴이라는 도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습니다. 아덴은 헬라의 수도로 철학이 꽃을 피웠던 곳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있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 곳에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이 모여 자신들의 사상을 논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수사학이 최고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수사학은 ‘말을 잘하는 법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말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구사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아덴의 광장에서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이 주제를 가지고 토론회가 벌어지고 변론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변론에서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상대방의 사상을 제압할 경우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칭찬을 받으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명성을 얻고 출세했습니다. 당시 이런 삶을 사는 철학자들을 가리켜서 ‘소피스트’라고 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말쟁이였고 언어에 매우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이런 문화에 익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또한 헬라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이 철학의 중심지인 아덴에 들어가서 누구보다도 복음을 잘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아덴의 철학자들 속에 큰 모순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임을 자처하는 그들이 한편으로는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최고의 지식인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닙니까? 최고 지성인이 점쟁이 앞에서 궁합을 보고 점을 친다는 상상만 해도 우스운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철학의 도시인 아덴은 사방이 우상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은 그 신상들 앞에서 절을 했습니다. 어떤 신상까지 있었느냐 하면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라는 간판이 붙여진 신상까지 있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라는 말은 사람의 이성과 지혜의 한계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만들고 이건 무슨 신, 저건 무슨 신이라고 있는 대로 이름을 다 갖다 붙였습니다. 그런데 생각되는 대로 신들의 이름을 붙여 가다가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혹시 이름이 빠진 신이 있어 그 신이 왜 내 이름은 빠뜨렸느냐고 해서 앙심을 품고 재앙을 내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할 수 있는 한 신들의 이름을 계속 붙여 나가다가 마지막에는 더 이상 지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만들어 놓은 것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미련하고 지혜롭지 못해서 당신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용서해 주십시요’라는 뜻입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라는 이름은 인간이 자랑하는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헬라 철학자들의 궤변의 결과물인 ‘이름을 알 수 없는 신’ 앞에 서서 너희들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라고 말하는 그 분이 누구인지를 내가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너희들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라고 한 그 신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전합니다.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지적하며 복음을 접목시키는 바울의 접근이 어떤 면에서 보면 매우 지혜로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접근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고 그 또한 궤변입니다. 다른 신들을 모두 인정하고 그 가운데 하나의 신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을 하나님으로 말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관도 아니고 바울이 지금까지 선포했던 복음의 내용과도 다른 것입니다. 

  접근 방법은 지혜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와 같은 방법을 선택함으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흐려지고 변질됐습니다. 결국 많은 신들 가운데 또 하나의 신으로 접근된 바울의 선교 방법은 대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수사학적인 접근은 합리적이고, 고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 영적인 힘은 없습니다. 이것이 인위적이고, 수사학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한계입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가운데서 이와 같은 교훈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 가운데 두 번의 매우 중요한 결단을 내립니다. 한번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결단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하며 좇았던 가치를 배설물 처럼 버리고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결단입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 가운데 이 결단을 가장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 가운데 최고의 선택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두 번째 결단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데 있어서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을 가지고 살겠다고 선포합니다. 세상에 타협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겠다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주가 되심을 증거할 때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접근하다가 전적으로 실패했습니다. 목적은 좋았지만 접근하는 수단과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경험만을 내세우며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법과 생각이 아덴에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자신했던 아덴의 선교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덴에서의 선교 사역에 실패하고 고린도 도시에 들어와 온갖 고생을 다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울이 다시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자로 일어서며 제 2 단계의 결단을 선포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방법만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선한 목적을 세운 것이 바울의 제 1 단계 결단이었다면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 또한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이루겠다고 선언한 것이 바로 제 2 단계 결단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선한 목적을 세웠다면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 또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가 돌아오자 그 법궤를 예루살렘 성막으로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윗은 제사장들과 함께 새 수레를 만들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셨습니다. 빼앗겼던 법궤를 다시 성막으로 옮긴다는 뜻은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결정이었습니다.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수레를 끄는 소가 뛰어 오르는 바람에 웃사라는 사람이 법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법궤를 잡았다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막으로 옮기는 선한 일을 하는 가운데 생각지도 못했던 충격적인 일을 당한 것입니다. 당황스러움과 슬픔에 빠진 다윗은 법궤를 옮겨 오는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돌아 보았습니다. 다윗는 법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법궤를 옮겨오는 선한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 불순종의 과정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법궤를 옮길 때는 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말고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옮기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당신을 섬길 때 편리함과 간편함 보다 성결한 마음과 정성을 중요하게 여기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제사장들은 성결함과 순종보다 편리함과 간편함을 선택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높은 지역에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사람이 법궤를 메고 올라간다는 것은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편리하고 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이 수레였습니다. 그래도 정성은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새 수레를 만들어 그 위에 법궤를 실었습니다.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세워 놓고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은 인간의 방법과 편리함을 내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불순종의 과정을 지적하시며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과정 또한 순종의 자리에 세우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성막으로 모시는 것이 거룩한 목적이지만 그 옮기는 과정이 거룩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 과정까지도 거룩하게 만드신 후에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는 과정을 보면 아주 편리 위주로 믿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며 신앙 생활합니다. 세상적인 지혜를 가지고 아주 처세술에 능한 모습으로 살아가며 신앙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으로 인해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위한 헌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결국 자신의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신앙 생활이 쓰면 뱉고 달면 삼킵니다. 어려우면 물러나고 쉬우면 앞서 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진한 신앙의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지혜와 처세술에 의지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어리석을 만큼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달던 쓰던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믿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맡겨진 일이 어렵든지, 쉽든지 묵묵히 헌신하며 섬겨 갑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들은 진한 신앙의 향기와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큰 일들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놀랍게 쓰임 받고, 축복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목적만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 또한 하나님 안에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 가운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바울이 내렸던 제 1 단계의 결단이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제 1 단계의 결단은 내렸지만 삶의 내용에 있어서 아직 제 2 단계의 결단을 내리지 못한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 성찬식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제 2 단계의 결단을 선언하는 바울을 본받아 우리도 삶의 과정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리는 제 2 단계의 결단을 내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도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도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세우고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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