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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립시다 (벧후 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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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립시다 (벧후 3:1~18)

  
   지난 주일 ‘잠시와 영원’이라는 제목으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바울과 동시대를 살면서 주의 복음을 전한 사도 베드로의 편지에서 환난과 핍박 중에 신앙생활 하던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신앙 자세가 어떠해야 할까 상고합시다.

   바울은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이 날로 새롭다’ 하면서 잠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쉬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함으로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자고 합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잠시 눈에 보이다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라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런 그것을 바라보며 오늘을 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베드로후서 마지막 장에서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워졌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날’ 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합니다.  그날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요, 성경이 약속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날입니다.

   그날은 주 안에 있던 자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의 날이지만 주를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살던 자들에게는 심판과 형벌의 날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만을 위하여 살던 자들에게는 그들이 그렇게 사랑하고 흠모하며 부러워하고 자랑스러워하던 것들이 불탈 때 함께 불태움을 받는 탄식과 후회의 날입니다.   그러나 주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세상에서 버림 받고 조롱당하며 환난과 핍박 중에 살던 성도들에게는 그 눈에서 눈물이 거두어지며 수고가 그치고 쉼을 얻는 환희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예고하셨던 마지막 때 되어질 일들에 대한 가르침이고 그 말씀을 따라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한 목소리로 전한 ‘주의 날’ ‘하나님의 날’에 대한 선언입니다.

   베드로는 이 마지막 날에 대한 옛 선지자들의 예언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기억하라 하였습니다.   마지막 때가 이르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더욱 악을 행할 것이고 또 조롱하기를 ‘다시 온다고 하던 예수는 어디 있는가?  우리 조상들은 다 죽었고 세상은 만물이 시작하던 때와 다름이 없이 여전히 그대로다’ 하면서 성경이 예고하는 ‘그날’을 우스개거리로 만들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예배 시간에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고백하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분’으로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그의 탄생과 십자가 죽으심,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은 기독교 신앙원리의 근본 기초와 고백입니다.   이 고백의 내용 중 어느 한 부분을 약화시킨다던가 생략하거나 또는 부인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언과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 가운데 이제 마지막으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남겨진 중요한 하나의 약속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입니다.   

  그가 다시 오시는 날이 곧 ‘하나님의 날’ 이요, 세상의 마지막 날이며 온 우주 만물에 대한 심판의 날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입니다.   이 날에 대한 소망과 기다림이 지금 불완전하고 여전히 죄가 그 세력을 더 확장해 가는 이 땅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이고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삶의 자세를 조롱하고 무시하며 오히려 더 반대 방향으로 자신의 욕심을 따라 이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이 예고한 것처럼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성향이며 무디어지고 어두워진 양심에서 나오는 무지한 삶의 방식입니다.   성경은 그날이 곧 다가와왔음을 경고하고 있고 오늘날 이 땅에서 일어나는 자연과 인간 사회의 수많은 현상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깨어 준비하라고 비상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때에 대하여 무디어진 마음은 노아의 홍수 때에 사람들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지금 먹고 마시며 지금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것들에 도취하여 있습니다.   곧 다가올 그날에 대한 두려움도 기대감도 없이 그저 오늘을 내 것으로 즐기며 마지막 날을 경고하는 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하며 살아갑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기록할 때 그날에 대한 어떤 사람들이 조롱하던 것처럼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은 그보다 더욱 무디어졌습니다.  다시 온다던 예수는 아직 오지 않고 하늘은 여전히 다름이 없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하늘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예수의 재림은 지연되고 있던가 아니면 원래 없었던 일이라고 머리에서 지워버리려 합니다.   그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삶을 광신도들의 어리석음이라고 조롱하며 이상한 종말론자들의 집단으로 무시해버리는 때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무디어진 데는 두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키려 반항하는 사탄은 할 수 있으면 믿는 자라도 미혹하여 넘어뜨리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적당한 상대를 만나면 즉시 찾아와 쉴 틈 없이 공세를 펼칩니다.   사도들이 말세를 선포하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세상에는 수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세상 종말을 외쳐왔고 그 긴박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 종말에 대한 경고와 재림주의 오심에 대한 선포는 복음주의 교회들 보다는 오히려 사이비 교주들과 이단 종파가 그 독점권을 가진 양 당당하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해석하여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는 교인들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1998년 10월28일에 세상 종말이 온다고 하여 한 때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구원파 이장림과 같은 부류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20 세기 말과 뉴밀레니엄, 새로운 천 년을 앞두고 헛방으로 날린 세상 종말에 대한 거짓 예언들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정말 종말이 다가와도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교회나 사람들은 다 사이비 종파나 광신자들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날에 대한 긴박감을 떨어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마지막 때에 더욱 죄 가운데 살게 함으로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사탄의 계략을 놀랍게도 잘 맞아 들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심심풀이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 쌓이고 쌓여 정말 늑대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더 이상 소년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세상 종말과 하나님의 날에 대한 경고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양치기 소년의 외침처럼 무의미하게 들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성경의 예언이 이젠 더 이상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잠시 한 순간도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이 땅을 향해 코를 박고 꿀꿀대며 정신 없이 땅을 파고 있습니다.   

    세상 마지막의 일에 대하여 주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던 사도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계22:10,11)   결국 주님이 오시는 그날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지금껏 자기가 살아오던 방식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지만 열심히 귀를 막고 자기 살던 방식을 고집하며 기어코 멸망의 길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탄이 원하는 바요, 말세에 유행할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또 한 가지,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이 무산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그날의 도래가 너무 오래 지체되고 있어 어쩌면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과 자포자기에서 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던 그 동일한 말씀으로 잠시 보존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을 심판하실 그날까지 잠시 보존하고 계신 것입니다”   노아의 때 세상에 가득한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참고 기다리셨던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을 택하여 하나님 백성을 만들어가실 계획을 시작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 땅에서 400여 년간 살면서 땅의 모래알처럼 번성하기를 기다리셨던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죄가 차고 넘쳤을 때 가나안의 죄를 심판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후손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때에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무르익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세상에 가득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게 하셨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계획과 정하신 때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4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을 실행할 때가 무르익었다는 말입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여건이 무르익었을 그때에 이 세상 인간의 역사 속으로 보내주셨습니다. 노아의 때처럼, 출애굽의 때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때가 무르익었던 시대 상황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주전 330년에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세계를 재패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한 땅 구석구석까지 그리스 문화를 보급시켜 헬레니즘의 꽃을 피웠습니다.  헬레니즘의 핵심은 헬라어였습니다.  오늘날 영어가 세계 어느 곳에서든 공용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헬라어는 그 시대의 공용어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헬라어가 보급되었고 이 언어를 통해 유대인들이 가는 곳곳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이후 강력한 로마제국이 등장하여 전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을 때 로마로부터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간 군사목적의 도로는 하나님의 복음이 신속히 전달되는 복음의 운송로가 되었습니다.  

    유난히 고난과 시련이 많은 유대민족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던 메시야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다림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이후 각처로 흩어진 유대인들에 의해 타민족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세워 회당을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를 세웠으며 유대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민족에게 알리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한편, 로마가 세계를 통치하고 장기간의 평화시대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동시에 도덕적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무료한 평화와 풍요로움은 사람들을 도덕적 타락으로 몰아갔고 그 결과 사회질서가 문란해지고 로마제국을 내부로부터 무너지게 했습니다. 영적 고갈을 느끼게 했으며, 궁중시인들마저 그 시대의 위기감을 노래할 만큼 로마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다림을 갖게 했습니다.  

  인간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시대의 상황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때가 찼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 때 약속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감추어져 준비되었던 메시야의 오심이 2천년 전 유대 땅에 비로소 실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께서 시행하신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정확한 주의 날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처음 오실 때 무르익은 세상의 여건이었습니다.”(임영수 목사님의 ‘때가 차매’ 설교문 인용)  

    중세기에 와서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의 연대를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로 구분하였습니다.  그 역사의 중심에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한 나사렛 예수가 계십니다.  성경의 약속대로 원하신 그 때에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은 또 다시 원하시고 정하신 그 때에 아들을 보내실 것입니다.   다시 오시리라는 약속 역시 사람의 시간 계산과는 다른 하나님의 시간 속에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시간이 무르익을 그때까지 죄로 가득한 이 땅을 보존하여 두고 계실 뿐입니다.   이 숨겨진 때를 알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기다림을 지루하게 여기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며 아예 무시하기도 합니다.  

    왜 이처럼 하나님의 날, 주의 재림의 날이 지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오늘 성경에서 베드로가 한 말을 주목합시다.   ‘주의 약속은 더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다만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며 그 날이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봅시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 때가 언제까지 무제한 지연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세상의 마지막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날에 주가 임하실지 알 수 없으니 깨어 있으라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시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사도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날에 대하여 ‘도적 같이 임할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말이 없으니 이는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 너희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자신하고 있을 그때에 잉태한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이 찾아옴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날이 임할 것을 알고 예비하며 기다려야 할까요?    주의 말씀대로 우리는 늘 깨어 그날이 오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베드로는 12절에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니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우리의 윤리적인 일상 삶은 물론이고 영적인 삶에서 늘 정결하여 긴장하고 사는 것이 어두움과 밤의 일에 속하지 않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두운 일과 잠시 있다 썩어질 것들에 정신을 팔다가 그 날이 가까워졌음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어두움에서 잠들어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원파 이장림이라는 사람이 그러했던 것처럼 거짓 이단들과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 감추어진 그 날과 때를 계산하다가 낭패를 당하곤 합니다.   몇 년 몇 월 몇 일 심지어 몇 시까지 예측하여 발표함으로 사람들을 긴장하고 두려움에 빠지게 하여 진실을 바로 알지 못하도록 미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공포감을 조성하여 그 날을 알고 있는 자기들에게 와서 그날을 준비하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모두 거짓 그리스도 일뿐입니다.  

    그 날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겉으로 보면 이들만큼 그날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거짓과 무지함이 가득한 사탄의 또 하나의 장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평소에 주님 맞을 준비를 하지 않다가 때가 되면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평소에는 내 하고픈 대로 맘껏 누리고 살다가 종말이라고 정한 시간에 맞춰 회개하고 주일성수하고 기도, 성경읽기, 헌금, 봉사와 전도를 많이 하면 그 공력이 쌓여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나온 헛된 계산일 뿐입니다.   

  본문 16절-18절을 보면, 무지한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이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것을 미리 알았으니 무법한 사람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굳센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 가운데 잘 자라가기를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어두움과 밤의 사람이 아니라 낮의 사람이므로 깨어 있는 자에게는 그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종말을 바라보며 오늘을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 신학적인 용어로 종말론적인 삶을 산다고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에는 개인 종말과 우주적 종말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개인 종말은 내 생명이 마치는 그 날입니다.  그리고 우주적 종말은 말 그대로 온 우주의 종말입니다.   이 두 때의 임함은 아무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획 안에 진행되고 있을 뿐입니다.   잠을 자다 부름을 받을지 아니면 길을 가다 부름을 받을지 일찍 부름을 받을지 노년에 부름을 받을지 언제 부름을 받을 지 알 수 없는 내 개인의 종말이 우리 각자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이 나를 위해 정하여진 하나님의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 삶을 시작하는 데도 이러한 하나님의 시간이 작용을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공평하게 하루 24시간 혹은 7,80년의 시간이 주어지지만 그 세월 중에 개인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역사를 이루는 기회는 각자 다릅니다.  어떤 이는 인생 초반에 주님을 만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중반에 그리고 어떤 이는 평생을 방황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영접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 날이 있으므로 그의 인생이 비로소 의미가 있게 되었고 그날이 있음으로 인하여 지나온 과거가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인간의 물리적 시간 속에 개입하여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회, 하나님의 시간 역사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시간 개념을 가리켜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했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하나님은 수 천 년을 하루처럼 기다리셨다가 정하신 그 때에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오래 참으시고 계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시간,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고 있으라는 말에 귀를 기울입시다.     밧모섬에서 환상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속히 오신다는 말씀은 곧 오시겠다는 급박성을 말하심입니다.   그리고 정한 때가 되면 어김이 없이 지체됨이 없이 분명히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나 그 날은 곧 이루어질 약속이며 분명히 이루어질 사건입니다.  그날을 사모하며 기다리며 오늘 나에게 주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이루어가는 재림신앙으로 살아갑시다.   주의 빛 가운데 깨어 준비하는 성도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홀연히 임하는 심판과 멸망의 두려운 날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이 시작되는 예정된 기쁨의 날입니다.   주와 함께 하며 주 안에서 승리하는 날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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