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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의 시대에 희망으로 오신 예수 (마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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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시대에 희망으로 오신 예수 (마 1:1~17)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고자 할 때 제일 먼저 부딪히는 책이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복음 1장을 펴면 족보를 읽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도 족보를 읽으셨지요? 족보를 읽으면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족보가 재미있습니까? 지루합니까? 네! 지루하지요.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처음 성경을 읽은 분들은 구약보다는 신약이 좀 쉬울 것 같아서 신약성경을 읽으려고 마태복음을 펴게 되는데, 좀 재미있고 근사한 얘기가 나오면 “아! 성경이 유익하고 재미있구나!”하고 빨려들어 갈 텐데 왜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왜 이런 족보가 나올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이것이 매우 자연스럽고 흥미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족보에 대해 대단히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보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1절부터 소개됩니다. 이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은 헬라어로 보면... ‘비블로스 게네세우스(Bi,bloj gene,sewj)’라는 말인데 몇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먼저는 예수그리스도의 족보. 두 번째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의 책. 셋째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새 창조의 기록. 이런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인 동시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새로운 창조를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마태복음 전체에서 다룰 중요한 요점을 우리에게 미리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유명한 사람의 족보가 종종 수록됩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에서부터 노아까지의 족보가 소개되는데, 이것은 창세기 6장에 노아를 소개하기 전에 아담에서 노아까지 연결되는 족보를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특성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런데 창세기 10장, 11장은 무엇이냐. 족보가 쓰여 있습니다. 바로 아담에서부터 셈까지. 그리고 셈부터 아브라함까지 족보의 이야기가 쭉 소개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누구에게 어떤 사람을 소개하려면 그 사람의 족보를 먼저 알려주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저 사람의 조상이 이런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실제 유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자서전을 기록하면서 서론에 자기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되려면 적어도 그 족보가 아론에서부터 자신까지 순결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배우자들도 적어도 거슬러 5대까지는 피가 섞여서는 안 되었습니다. 순수한 혈통 출신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했습니다. 유대인의 관심이 무엇이냐면 바로 순수한 혈통이었습니다. 순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유대인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마태복음을 본다면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이 족보는 그들에게 매우 흥미롭게 읽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책들이 성경에 4복음서가 있습니다. 4복음서가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제일먼저 나오는 책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신학적으로 연구해보면 마태복음은 주로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된 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읽을 때 족보가 앞에 나오면 이해가 잘 되는 것입니다. ‘아! 예수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이구나.’ 예수에 대한 족보가 나오면 그들은 이해가 잘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도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은 3장후반부에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로 이방인들(헬라인)을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저자의 의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한 강조점도 다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왕으로 소개합니다. 왕 되신 주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종 되신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종으로 섬김을 위해 오심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인자이신 예수님.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인 동시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심을 저자가 의도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런가하면 요한복음은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마태복음 1장 1절은 매우 중요한 구절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오늘 마태복음 기자가 마태복음 1장 1절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오랜 역사동안 기다렸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일 서두에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여러분!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삭을 주셨는데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야산에 가서 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도 인간이니 고민이 있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라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산 정상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삭을 붙들어 매놓고 칼을 들어서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칼을 거두어라. 네가 정말 네 아들 이삭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수양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창세기 22장 17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여기서 말하는 씨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가운데 오실 예수그리스도가 사탄의 죽음의 권세를, 대적의 문을 열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천하 만민이 그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복을 받고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그가 주시는 영적인 축복과 모든 외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네가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 한다.’고 요한3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약속된 씨로 이 땅에 오셨음을 마태복음 1장 1절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아름다운 인물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향해서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믿음이 참 훌륭했습니다. 그가 모든 이방의 적들을 다 평정하고 나라가 안정되었어요. 그 자신은 백향목 궁에 누워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텐트이고, 법궤가 그 안에 모시고 있는 것이 마음이 아파 나단 선지자에게 부탁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법궤를 위해서 성전을 구축하겠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께 여쭈어봤더니 하나님은 거절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너의 손은 피가 묻어있어 성전을 지을 수 없다. 네 마음은 내가 익히 알고 있으며 나도 기뻐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축복을 주시는데 사무엘하 7장 16절 이하에 말씀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 영원히 보장되고 네 위에 영원히 견고하리라.” 다시 말하면 네 후손 중에서 너의 나라와 왕위가 계속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북이스라엘에 비하면 남왕국 유다는 다윗의 직접적인 후손들이 통치했지만 결국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 왕위도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윗의 후손인 예수그리스도가 영원한 왕으로 오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위가 견고하다는 것은 이 땅에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왕이며 다윗의 후손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빌라도는 “네가 왕이냐.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여리고에서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다윗이 훌륭한 왕이었기 때문에 다윗과 같은 왕이 이 땅에 오시면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이여. 다윗의 아들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그 약속이 예수그리스를 통해 성취될 것을 마태복음 1장 1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리고 그를 예수님의 육신적인 조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여쭤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입니까? 불신앙의 사람입니까? 네,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아버지가 우상 만드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존재를 몰랐으나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을 불러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아브라함이 순종하고 나아갈 때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기 전에는 모두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모태신앙인 성도님들 계시지요? 저도 모태신앙이지만 성장해서야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에 믿음이 생긴 것이지 처음부터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누군가에 이끌려 교회에 억지로 나온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와서 처음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다보니 말씀이 내게 다가오기도 하고 은혜와 감동이 되어 한두 번 예배하게 되니 내 마음에 믿음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에 바로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그 축복이 여러분에게도 임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조상도 처음부터 믿음의 조상이 아니었고 불신자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올 때 그 마음에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온 지 얼마 안 되신 분들도 걱정 마십시오. 꾸준히 예배하게 되면 어느 날 내 맘속에 하나님께서 큰 감동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영접하게 되면 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바로 이 아브라함의 복이 여러분의 자손만대까지 이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은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오죽했으면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았을까요? 그리고 우리야를 전쟁 깊숙이 들여보내서 거기서 결국 적군에 의해 죽게 만듭니다. 그게 바로 다윗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허물은 보지 않으십니다. 그 허물을 덮어주시고 그의 의로운 면을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정말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다윗보다 존귀한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허물보다 큰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도 자기 부인을 두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실상은 내 부인이 아니라 누이라고 두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죄보다 큽니다. 그래서 허물을 덮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셔서 우리 죄가 씻어진 것은 알지만 ‘내 죄를 씻기에도 보혈이 부족할 텐데 이 많은 사람들의 죄를 어떻게 씻나?’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강수는 그것이 차고 차서 온 인류의 죄를 다 씻고도 남음이 있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왕 중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메시야로, 우리의 구원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음을 마태복음 1장 1절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족보를 가만히 살펴보면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족보는 생명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은 주로 “낳고.. 낳고”그렇습니다.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낳고 낳고..” 그런데 반대로 창세기 5장을 보면 노아의 족보가 있는데 “죽고... 죽고... 죽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범죄하여 축복을 다 빼앗기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죽을 존재가 되었고 그들이 태어나 죽는 것이 결과입니다. 결국 죽고.. 죽고... 이것이 죄의 결과, 심판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므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오시므로 “낳고.. 낳고.. 낳고”하는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이 생명의 역사가 많이 나타나길 축원합니다. 생명을 낳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 집사님 한 분은 결혼 후 아이가 없었는데 새벽기도 중에 마태복음 1장을 많이 묵상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태의 문을 열어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낳고 낳고 낳고...’ 생명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놀라운 생명의 번식, 생명의 부흥이 날마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으로 신앙의 조상이 끝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을 통해 많은 신앙의 인물들이, 생명의 역사가 여러분 가문에 나타나야 합니다. 

  또 이 족보를 보면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이 족보의 3절에 다말이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다말은 남편이 일찍 죽고 구약의 풍습에 따라 남편의 형제들과 동침을 하여 남편의 대를 이어가야 하는데 시동생이 거부하여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변장을 하고 시아버지와 동침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우리 남편의 후손을 이 땅에 번식시키겠다는 집념에서 동침을 한 것입니다. 가정의 종족 번식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런 여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유다에게서 베레스와 세라을 낳았다고 성경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5절, 6절을 보니 이방여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여기 라합이라는 여자가 나옵니다. 라합은 유명한 여리고이 기생입니다. 그런데 기생이 족보에 소개되었습니다. 이 기생 라합은 다윗의 증조모가 됩니다. 참 놀랍습니다. 또한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다윗의 조상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을 사람취급하지 않고 멸시하였습니다. 또한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아들을 낳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여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이라는 것은 모든 죄를 덮고도 남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빈부의 귀천, 차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공로 속에서 과거는 이미 용서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과거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 안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고,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도 복음 안에서는 하나가 됩니다.

  기독교 초창기에 유명한 양반교회가 있었는데 이곳에 예전으로 따지면 천민인 백정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그분을 존경하고 존중하게 되었고, 장로선거에서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장로는 모두 양반으로 백정출신의 장로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교회는 분열되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10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인종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식당, 교회도 같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킹 목사가 정의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먼 훗날에 백인의 자녀와 흑인의 자녀가 함께 학교를 다니고 함께 지내는 세상이 오기를 꿈꾸노라.” 결국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미국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오바마도 흑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빈부차이도 없고 사람의 차별이 없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는 누구나 동일합니다. 그 사람의 과거를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족보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기 까지 많은 역사의 질고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족보에는 42대가 기록되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14대요, 바벨론 포로이후 예수그리스도까지 14대. 모두 42대가 소개됩니다. 그런데 다윗까지는 그들의 번성의 시기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나라가 가장 부강했고 솔로몬 때부터 분열하고 갈등하고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분열의 역사입니다. 갈등의 역사입니다. 점점 쇠퇴합니다. 많은 강대국의 포로로 비참한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로 떠나와서 나라를 다시 재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역사에는 고난의 시기가 많았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오기 까지 유대 역사에도 고난과 아픔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 가정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이뤄지기 까지 우리는 많은 인내와 고난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시인 서정주의 시 가운데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역사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역사를 위해 많은 이들이 아픔과 고통을 감내할 때 위대한 역사가 탄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교회의 역사, 가정의 역사는 많은 눈물과 기도의 용사가 있기 때문에 오늘의 모습으로 설 수 있었습니다. 고난 없이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가장 절망적인 시기에 희망의 주로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구약 말라기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신구약 중간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는 예언자의 활동이 일체 없었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도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도 없습니다. 가장 캄캄한 암흑의 시대입니다. 묵시, 계시가 없고 절망의 시대, 어둠의 시대입니다. 이사야서 9장에 보면 스불론과 납달리 땅, 그 어둠의 땅에 생명의 빛이 비췬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어둠과 절망의 땅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희망과 생명의 땅으로 변화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어둠과 절망의 시대입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이 시대에 소망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민심이 찬반양론으로 나뉘어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물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어둠의 시대에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희망의 등불을 환히 비추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역사에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혼란의 때에 더욱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어둠의 때에 희망의 빛을 생명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시대에 인간들은 절망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에게 무슨 희망이 있나?’ 그들은 로마의 속국으로 노예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새로운 역사, 희망의 역사, 생명의 역사,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금 출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심령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실 때 우리의 삶이 바꿔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주인, 우리 심령의 주인, 우리 신앙의 주제이십니다. 예수 존귀한 이름. 우리가 늘 바라보고 묵상해야 할 이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를 모실 때, 그분을 내 인생의 왕으로 모실 때 우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절망의 인생이 희망의 인생으로, 암흑의 인생이 소망의 삶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청주의 어느 초등학교 3학년 교실입니다. 칠판에 ‘뿌리’라는 큰 글씨가 적혀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나와서 우리 몇 대손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사또를 지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교장을, 아버지는 큰 무역회사의 과장님입니다. 저는 우리 가족의 족보가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이렇게 아이들 몇 몇이 자기 족보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고아원에서 성장한 아이가 발표를 하려고 나와 선생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오늘 저 아이에게 치명적인 아픔을 주고 있구나. 저 아이가 무슨 발표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는 의젓하게 단상에 올라가 발표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아버지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자녀를 두고 계시는데 하나님은 그 많은 자녀가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기를 바라십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 발표 후 선생님은 이 아이를 끌어안고 “얘야, 너는 정말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훌륭하게 성장해야지. 나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단다.” 고 하며 아이를 안아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왕자요 공주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께 인사하십니다. “당신은 왕자입니다. 당신은 공주입니다.” 우리는 왕의 자녀들입니다. 왕의 자녀는 왕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그리스도처럼 선포하고 기도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여러분들, 왕의 자녀답게 담대하게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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