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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대를 향한 예수님의 탄식 (눅 7: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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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향한 예수님의 탄식 (눅 7:29~35)

 
예수님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어려운 시대에 사셨습니다.

우리는 촛불집회가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 마음으로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나라의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어떻게 참여해야할 것인가? 이것은 늘 우리에게 어렵게 부딪쳐오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셨던 당시 정치.경제.사회적인 파고가 심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우리는 되묻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양식을 정치적이라 말하기에는 그 분의 행동이 비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계시자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비를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비정치적이라고 하기에는 예수님은 너무나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고통 받고 좌절하는 사람들을 가슴으로 껴안으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땅 이스라엘은 거대한 로마제국의 지배에 놓여있던 작은 식민지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인 저항운동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민족의 독립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혁명적인 투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정치적 저항운동을 주도했던 열심당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손에 검과 창을 들고 무력으로라도 로마의 정치적인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시몬과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가 열심당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정치적인 말씀을 가급적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 로마 제국과의 정치적인 항쟁에 들어가도록 제자들을 선동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참여는 궁극적으로 정치와 역사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인간의 삶과 실존도 바꾸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분명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저항 운동을 하셨다면 이천년 전에 있던 정치적 투사나 저항가로 이름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하셨을까요? 예수님 당시 경제와 사회의 연약함은 극에 달했습니다. 빈익빈이 심해져서 가난이 더 커졌고 부익부가 확대되어 부자들의 세습이 더해졌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사이의 극단적인 계층의 대립이 나타났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모두에게 놀랍고 충격적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누가복음 6:20)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누가복음 6:24) 

그렇다고 예수님을 경제적인 혁명을 주도하셨던 분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비경제적이고 비사회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을 비경제, 비사회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당시 고통 받고 있던 민중들의 아픔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의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 부와 재물의 합당한 권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파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경제와 사회의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변모시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마음이 교만 자에게 화가 있다”는 말씀으로 변화시키면서 예수님의 인간관을 보여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역의 대상은 가난한 민중들이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과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 곧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시민임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바리새인들과 부자들도 있었습니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행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협의적인 정치운동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정치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협의적인 정치운동이 아니라 광의적인 정치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헤롯 왕이 더 이상 왕이 아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으나 참된 왕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만이 나라의 왕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두려워서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반란자들과 정치범들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 육체보다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영과 정신적인 세계가 물질과 경제보다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변화되는 가운데 정치적인 변화를 추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경제의 변화를 원하셨습니다. 문화 속에서 변화하는 인생을 살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는 정치가 어떤 정치인지, 하나님이 주인 되는 경제가 어떤 경제인지, 하나님이 주인 되는 문화가 어떤 문화인지를 알고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말씀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듣지 못하는 지도자들을 향해 탄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셨던 대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민중이고 또 하나는 민중을 종교적으로 인도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많은 민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기 원했습니다. 민중들은 요한이 왔을 때 회개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요한이 왔을 때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축하해 주셨습니다.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저 사람은 먹고 마시는 자야. 먹는 것을 좋아하는 자야. 술에 취한자야.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야. 그들과 한통속이야.”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보면서 탄식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듣는 귀가 없구나. 보는 눈이 없구나. 깨닫는 마음이 없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주장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깊게 들어있지 않구나.”
예수님은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 고정관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시대를 향해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몰라서 깨닫지 못할 때에는 그래도 가능성의 여지가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대학교수의 강의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용어가 다르고 개념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천상 세계는 계시의 언어이고, 영원한 생명을 가르쳐주는 언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려는 열망, 열린 마음이 있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면 비록 처음에는 못 깨달아도 세월이 지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성숙한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몰라서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라 듣기 싫어했습니다. 말씀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까지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 속으로 들어가 회개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도 비판했고 예수님도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려면 마음속에 정서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거부하면 반대 세력에 대해서 비난과 부정적인 언어만을 토해 낼뿐입니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으면 모두가 적입니다. 거기에는 함께 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정관념 속에 묶여 있는 지도자들, 기득권 속에서 변하지 않으려는 지도자들을 바라보시며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지도자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집단의 지도자 한 사람에게 거짓정보가 들어가면 그 집단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게 되면 공동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한 사람이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하면 공동체에 고통이 다가옵니다. 정치적인 집단도 그렇고 기업가나 노동자도 그렇습니다. 영적인 교회도 그렇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세움을 받느냐에 따라서 공동체의 역사가 달라집니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노동혁명을 주도했던 레닌이 있습니다. 그는 혁명이라는 깃발을 세우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노후에 쏟아놓은 쓰라린 자기변명의 고백이 있습니다. 피의 혁명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레닌이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 억압받는 민중이 해방되어야 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우리의 방법은 더 큰 억압과 악랄한 대량학살을 낳았을 뿐이다. 나는 헤아릴 수 없는 희생자의 피로 붉게 물든 바다에 빠져 허덕이는 악몽 같은 현실을 살고 있다. 과거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러시아를 구원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10명의 성 프란체스코였다.” 

나라와 사회가 변화되는 것은 미움의 혁명, 분노의 혁명이 아니라 성 프란체스코와 같이 하나님 앞에 서서 사람을 사랑해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전쟁과 갈등이 있는 곳에 화평을 심어놓을 사람 10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만약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러시아가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는 쓰라린 고백을 합니다. 

인기영합주의에 휩쓸려서 부화뇌동하는 정치적 집단이 이 사회와 민족을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왜곡된 정보를 흘려서 온통 부정주의로 몰고 가는 언론 집단이 사회를 변혁하고 개혁시킬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화평으로 이 땅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세워나가기를 열망하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본래의 일을 감당하는 책임감을 가집시다. 
 
여러 가지 위기와 어려움을 맞이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 노동자는 노동자로서, 기업가는 기업가로서, 종교인은 종교인으로서, 소망교회는 교회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다시 시작해야할 때입니다. 대통령과 위정자는 국민의 깊은 소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국민들이 무엇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고통 받는지 경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국민들은 지도자로 뽑은 대통령을 신뢰하면서 뒤따라가는 슬기로운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악과 부정, 부패와 타락의 위험이 곳곳에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사회주의적 사고를 사진 사람들에게도 있고 자본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하나님의 원칙이 있습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더 많이 공부한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누가복음 7:35)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 땅의 역사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사회의 모든 것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말씀을 가르쳐주시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합니다. 그것은 보수냐 진보냐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힘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왕이 되기를 열망하면서 삶의 자리로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옛 것은 잘라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새 것을 향해서 우리의 삶이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시다. “하나님이 왕이 되시도록 충성하겠습니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소망교회는 대형교회이기 때문에 책임이 더 큽니다. 
대통령을 파송한 교회이기 때문에 책임이 더 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대통령과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과 국민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며 사랑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민족의 역사를 다시 축복해주시고 새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이만큼의 축복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다시 믿음과 사랑으로 기도하면서 모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회가 먼저 기도하는 귀한 일을 시작하게 하옵소서.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우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역사를 펼쳐나가는 귀한 교회와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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