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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노년은 용서하는 것이다 (마 6: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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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노년은 용서하는 것이다 (마 6:14~15)


‘인생칠십고래희’에 추회막급(追懷莫及)한 일이 있다면 무엇일가? 하고 생각해 본다. 구태여 ‘후회막급(後悔莫及)’이라하지 않고 ‘추회’라는 말로 한 것은 ‘후회막급’은 일이 잘못된 뒤에 아무리 뉘우쳐도 어찌할 수가 없음이라는 뜻이나 ‘추회막급’은 지나간 일을 몹시 후회함으로 향후 뉘우침의 가능성을 가리켜 하는 말임을 알게 한다.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데는 많은 순간의 선택이 따른다. 삶의 선택을 한 후에는 언제나 그 선택이 옳은 것인가를 걱정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달리 선택 할 것에 대한 염려로 후회를 하는 것이다. 최고의 선택이 있다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바로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茶山 정약용의 ‘도산사숙록(到山私淑錄’)을 보면 천하에 가르쳐서는 안 될 두 글자의 못된 말이 있다고 한다. ‘소일(消日)’이라는 말로 별로 할 일이 없이 세월을 보낸다는 말이다. 청년시기의 황금 같은 시간을 탕진하다가 오랜 시간을 소일(消日)로 허무하게 보낸 노년을 두고 매일을 아껴 뜻있게 살아가라는 말인 것이다. 촌음을 아껴 사람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일상의 소일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결코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행복한 삶, 후회 없는 삶, 이 모든 것은 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버나드 쇼의 말을 챙겨 본다. ‘모든 일을 용서 받는 청년기는 아무것도 스스로 용서치 않으며, 스스로 모든 일을 용서하는 노년기는 아무것도 용서 받지 못한다.’의 말을 챙긴다. 노인은 아무것도 용서 받을 수 없는 노년기를 향해 가고 있다. 노년기에 들어선 사람들은 스스로 모든 일을 용서하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후회 없는 삶을 선택하고 그 뜻을 실현해 가는 사람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노년의 시기에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것처럼 달관하고 너그럽게 자비로 우려고 하지만 그것조차 세상의 눈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주접스러운 마음을 가지면서 좋은 노년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최고의 선택은 무엇일가? 하고 생각해 본다. 

여기에 ‘용서의 사랑’을 권(勸)해 보려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단편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있다. 내용인즉 구두제조업자인 남자가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서 세상에 온 천사 ‘미하일’을 돌보는 사건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한 톨스토이가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담아 그의 신앙작품으로 쓴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에서 하나님의 벌을 받고 세 가지 질문의 해답을 찾으러 이 세상에 내려온 천사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은 사랑임을 알게 하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기위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제시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살고 있음을 알게 하고 앞날을 보는 미래 지향적인 지혜의 선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지적함을 알게 한다. 그것은 사람의 삶은 사랑의 삶이요 그 사랑의 극치는 용서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랑의 삶을 다한 노년기에는 반드시 노년은 모두를 용서하는 시기임을 알게 한다. 그럼으로 사람의 삶은 사랑으로 살고 노년기에서는 그 실천이 용서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노년이 되면 외모의 우리 모습은 형편이 없다. 이러한 모습은 노년을 자꾸만 초라하게 한다. 그럼으로 노년에 있어 사랑의 실제적인 행위인 용서하는 일은 노인으로 하여금 돋보이게 한다. 용서는 회개와 배려가 따른다. 

이러한 ‘용서’는 노년에 아주 값비싼 대가이며 귀한 시기임을 알게 한다. 그럼으로 지금까지 살았던 기억들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부족함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완고함이 있으되 타인의 처지를 시샘치 않으며 아무에게도 비굴하지 않아야 한다. 일상의 모든 것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늙으면서 얻는 것은 자유이다. 이것은 여유롭게 늙어가는 편안함의 아름다움이다. 그럼으로 긴장, 흥분, 집착이 사라지고 여유 있는 마음이 생긴다. 사람과의 갈등을 져버리면 모든 관계가 가볍고 진정으로 용서 할 수가 있게 된다. 타인을 용서하면 내가 진 짐이 가벼워진다. 

인간이 인간을 추하게 하는 것은 자기 갈등 때문이다. 서로의 소통을 가지면 자연히 그 사람은 아름답게 보이고 인간 또한 귀하게 보인다. 갈등의 해소는 소통이요 그것은 곧 회개를 갖는 사랑의 용서이다. 이렇게 노년은 용서하는 시기이다. 노년은 모두를 용서한다. 그래서 ‘좋은 노년은 용서하는 것이다.’ 그래야 노인의 만용은 둥글둥글해지고 사람을 보는 눈은 따스해 진다. 사랑은 용서할 줄 알아야 사랑 할 줄도 안다. 용서는 내면의 평화를 열어주는 열쇠이다. 먼저 용서하라!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용서받는 사람보다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말한다. ‘그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그때에 그대는 용서하는 행복을 알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남을 책망할 권리는 없음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말이 사랑과 용서의 삶을 알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유대교(Judaism)의 전통을 이어 받았으나 그 전통을 극복한 종교이다. 그 전통극복의 중요한 요지는 ‘사랑’에 대한 해석의 차이이다. 유대인들의 사랑은 이웃에 대한 국한된 사랑이었다. 그들 스스로는 선택받은 민족의 자존심만으로 이방인들을 야만시하고 멸시하며 멀리한다. 

그러나 그 같은 사랑의 개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웃의 한계를 넘어서서 보편적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강조함에 주목하게 한다. 여기에 준하여 기독교의 사랑의 윤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로 놓인 장벽인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그 장벽을 허물고 화해와 평화를 촉진한다. 인간들 사이에 있는 질투, 미움, 의심 등을 예수가 보여준 희생적 사랑, 용서의 사랑으로 용해시켜 평화의 사회를 만든다. 그것의 실천으로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라는 윤리를 배격하고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까지 대주며 십리를 가자고 하면 이 십리를 동행해 주는 절대 희생의 윤리임을 알게 한다. 

예수는 자기를 모함하여 죽이는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용서의 사랑을 보여준다. 기독교의 생활윤리에서 강조하는 것은 용서이다. 용서는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이며 끝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노년에 이르러 어른다움의 성숙한 사랑의 증거로서 그 노년은 사랑의 행위자로서의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기도문(마태 6;9-13)에서도 알게 된다. 이것은 인류의 영원한 공존윤리로서 용서의 윤리를 알게 한다. 예컨대 민주국가의 한 나라의 국가원수는 그만이 갖는 특권이 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케 하는 사면(赦免,pardon)이 있다. 

형의 선고에 대한 효과의 전부 또는 일부를 소멸시키거나 형의 선고를 받지 않은 자에 대하여 공소권을 소멸시키는 일로 우리헌법 79조에 사면법1; 3; 5조의 조항은 국가원수의 사랑의 배려로 용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용서가 민주국가의 행세를 가름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한 나라의 최고의 국가원수만이 갖는 권한일진데 사람으로서의 성숙한 노년은 이를 수용하여 이해함이 좋은 줄로 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갈등은 얼마나 큰 고통이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우리는 TV에서 ‘TV는 사랑을 싣고’ 라는 TV프로그램을 보게 된다.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의 그늘에서 살아 온 이들이 용서함으로 애한을 담은 슬픈 이야기들이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로 바꿔보는 것을 보는 것이다. 또한 설교의 블로그에 용서에 대한 글을 참조한다. 2007년 9월9일 설교제목인 “영화 ‘밀양’의 용서”에 그 촌평은 ‘이 영화 “밀양’은 기독교의 근본 가치인 ‘용서’를 영화의 주제로 삼고 문제를 제시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인간 삶의 실존을 이야기 한 것이다. 사회가 교회를 보는 시각에서 한국교회의 신앙인들의 왜곡된 신앙의 신학적 성찰을 요구하는 점과 신앙생활의 윤리적인 모순을 지적한 점은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한 용서를 신앙으로 알게 하는 것이다. 

인간적 삶의 모습과 부조리를 정직하게 인식하지 않고 회개 할 줄도 모르면서 쉽게 하나님의 섭리라는 틀 안에 꿰맞추려고 하는 교회를 ‘밀양’은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로 사랑, 용서, 화해, 관용, 덕, 용기, 죄의 고백, 책임 등은 신앙의 근본 가치들로서 사람의 사랑을 알게 하는 깨우침임을 알게 한다. 신앙의 믿음이 사랑을 배반한다면 이런 믿음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서식하고 사회와 역사의 밭에서만 자랄 수 있다. 여기에 사랑이 아무리 절실해도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랑이 혼자 하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자기 사랑이다. 자기 사랑은 이기주의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이다. 그 사랑은 자기 비움이요 그 사랑은 언제나 자기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곧 용서의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 자기 사랑에 머물면 용서하지 못함이며 용서하지 못하면 곧 ‘화’를 자처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화는 사람을 병들게 하고 심한 마음의 고통으로 간다. 그리하여 화병이 생기고 육신이 경직되고 마음이 불안하다. 화를 다스림에는 마음을 비우고 용서하는 마음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황혼을 맞는 노년의 아름다운 삶은 모두를 그리고 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아프리카 숲속 어떤 부족 원주민들에게는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용서주간’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 주간은 날씨가 좋은 날을 택해 실시하는 풍습이 있는데 그 부족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축제를 하고 친구나 이웃들에게 어떤 잘못이라도 있으면 용서해주기로 서약하는 한 ‘용서의 주간’이 있다고 한다. 그 주간은 오해든 사실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을 모두 털어 내고 다 용서해 주는 것이라 한다. 노년기에 처한 노인들에게 권하는 것은 노년을 맞는 이들은 얼굴도 서로 모른 채 부모님이 맺어준 대로 한 평생을 살아온 분들로 부부관계가 좋은 분 또는 ‘소 닭 보듯’ 좋지 않게 살아온 분 그리고 혼자 외로이 살아 온 분으로 여러 층이 시대적인 문화, 풍습의 문제를 안고 노년기를 맞는다. 

노년기에 해결 할 우리들의 마음의 과제는 용서와 관용이다. 이것이 해결 되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 한다. 여기에 ‘한’이 풀리지 않으면 행복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저 나라로 갈 때 하나님을 기쁘게 만날 수가 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말은 ‘용서와 사랑’의 삶을 넌지시 보여주는 것이다. 성서는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아 멘. 행복한 ‘좋은 노년은 용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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