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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하나님을 찬송하라 (창 14: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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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찬송하라 (창 14:18~20)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두 번의 감사절기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맥추 감사절이 그 하나고 또 다른 하나는 가을에 지키는 추수 감사절입니다. 둘 다 추수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절기입니다. 맥추 감사절은 여름에 지키고 추수 감사절은 가을에 지킵니다. 추수 감사절은 수확을 거의 마친 때 지키는 절기이고 맥추 감사절은 곡물의 첫 열매 특히 보리나 밀의 첫 추수를 하는 때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이스라엘 절기상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수확한 것을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그 동안에는 광야에서 농사 수확을 하지 못하고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를 먹고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당도하여 스스로 농사짓는 것으로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아무런 농사도 지을 수 없었다가 가나안 땅에 와서 농사를 지으며 처음 추수하는 것을 기념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맥추절은 바로 이 첫 열매를 수확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요, 스스로 농사하여 수확한 것을 먹게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수많은 열매를 거두는 신호탄과 같은 처음 열매를 감사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나중 열매들을 기약하는 첫 열매이니 얼마나 의미가 컸겠습니까? 그래서 맥추절을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오순절이 되었는데 그 의미는 곧 성령의 첫 강림 곧 신약 교회 시대의 개막식과 같은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맥추감사절은 한국교회의 매우 어려운 시절에 매우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맥추 감사절에는 여름 곡식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보리와 밀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이 매우 귀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1960년대에는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라 그런지 보릿고개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춘궁기라고도 했는데 5,6월 달에 전년도 가을수확 양식 바닥나고 보리가 미처 여물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보릿고개 때는 보리조차 먹을 수 없는 시기였습니다. 이 고개를 넘어가야 사는 것입니다. 이때는 먹을 것이 없으니 초근목피 즉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벗겨서 먹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소나무 껍질 벗겨서 먹었던 기억은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보릿고개를 넘기고 7월 맞이하면 보리가 누렇게 익어 보리타작을 합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보리쌀 듬뿍 넣어 밥을 지어 먹으면 비록 시커먼 보리밥이지만 얼마나 맛있고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의 맥추감사주일은 이런 감격 속에 맞이했던 절기였습니다. 

오늘날은 그 때에 비하면 너무나 풍성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선진 8개국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선진 8개국 확대정상회의에 초청을 받은 8개국에는 들어갈 만큼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구상에서 제일 잘 사는 16개의 나라 중에 한 나라는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제는 보리농사도 짓지 않고 보릿고개도 없는데 맥추감사절을 지켜야 하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을 좀 바꾸면 맥추감사절은 꼭 지켜야 할 절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어렵게 보릿고개를 넘기고 보리추수해서 꽁보리밥 실컷 먹었다고 맥추감사절을 지키며 감사를 했는데 지금은 보릿고개도 없이 1년 365일 언제나 풍성하게 먹고 살 수 있으니 그전 보다 더 감사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우리들은 ‘과거에는 보릿고개 때 너무나 힘들었는데 이제는 보릿고개도 없으니 정말 감사하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더 기쁘고 더 감사하게 맥추감사절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아브람이 자기 조카 롯이 4개국 연합군에 의하여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군인들을 데리고 가서 연합군을 물리치고 롯을 찾아오다가 있었던 일입니다. 아브람은 돌아오다가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멜기세덱은 영원한 제사장으로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입니다.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람을 영접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립니다. 멜기세덱은 그 전쟁에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하면서 아브람이 찬송해야 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멜기세덱이 찬송하라고 말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봅니다. 그 하나님은 아브람의 찬송을 받으셔야 하고 또 우리의 찬송을 받으셔야 하는 분입니다.
그럼 우리의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알아봅시다.


1. 우리가 찬송해야 할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십니다(19절).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라는 말은 천지만물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전능하사 천지만물을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라는 말은 천지만물의 소유자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천지만물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는 땅을 사고 등기권리증이 내 손에 들어오면 그 땅은 내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 이름으로 등기권리증을 가지고 있어도 내 땅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땅입니다. 인생은 유한합니다. 내가 소유했으니 영원히 내 땅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도 내가 죽으면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의 땅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사람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된 소유자입니다. 

또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라는 말은 모든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주권을 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내 소유의 물건에 대한 주권은 내게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소유인 천지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계획하고 그 일을 실행할 때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성취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허락아래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살 곳을 결정하고 이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결제가 없이는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고 죽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행 17:26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라고 말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이 땅에 지도자를 세우시고 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하나님이 세우셨기에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롬 13:1에 보면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말씀합니다.

또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라는 말은 하나님이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18절에 보면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19절에 보면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20절에서도 역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22절에 보면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으로 번역된 ‘엘르욘’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용어가 ‘하나님’을 뜻하는 ‘엘’과 함께 나와 ‘엘 엘르욘’으로 쓰이는 경우는 ‘지존자’, ‘가장 높은 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린다는 뜻은 모든 것의 창조자요 소유자요 주권자로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시라면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 없이 독립적으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엇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심히 교만한 것입니다. 온 우주에 스스로 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결정하실 분도 역시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요 16:13에 보면 성령님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말하면서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합니다. 성령님도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고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스스로 무슨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요 8:28에 보면 주님께서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 행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 없이 계획하고 하나님 없이 움직입니다. 반대로 다윗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결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행합니다. 이 작은 차이가 두 사람의 인생의 간격을 점점 넓혀놓았습니다. 삼하 3:1에 보면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점점 강성해지고 사울은 점점 약해졌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 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느냐 아니면 하나님 없이 행하느냐의 차이입니다.


2. 우리가 찬송해야 할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19절).

19절에 보면 멜기세덱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축복합니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복 주시는 분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잘 된 것처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시 103:3-5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택은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속성상 복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창 1:28에서 인간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이 말씀 하시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인간에게 최초로 말씀하실 때 복 주시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몇 가지만 찾아보도록 합시다. 

첫째, 복 받을 짓을 해야 복을 받습니다. 신 28장에 보면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고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자녀들에게 복이 임하고 생업의 복이 임합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승리의 복과 재정적인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복을 받고 하늘의 보물창고가 열리는 복이 임합니다. 그 외에도 말로다 할 수 없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둘째, 복 받을 말을 해야 복을 받습니다. 잠 12:14에 보면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복록’이라는 말은 다른 번역서에서는 ‘좋은 것’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사람이 말을 잘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셋째, 주의 종의 축복기도를 받으면 복을 받습니다. 민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의 축복기도의 내용은 24-26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27절에서 하나님은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 주의 종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종들이 빈 축복대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을 나를 위한 고난으로 믿고 주장하십시오. 성경 갈 3:13,14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방법 중에 첫째 방법 즉 복 받을 짓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이론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한계를 가르쳐주시고 “너희들의 힘과 노력으로는 안 되니 예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에 주님의 충족함을 채워주시는 장소입니다.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나는 모든 저주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법위를 영혼구원만으로 제한시킨다면 영혼구원의 복 외에는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의 법칙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법위를 영혼구원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 적용한다면 여러분은 영혼구원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육체가 건강하도록 이루어 놓으신 공로를 믿으시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복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3. 우리가 찬송해야 할 하나님은 대적을 붙이시는 분입니다(20절). 

20절에 보니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대적을 붙이셨다는 말은 대적들을 피할 수 없는 자리로 몰고 가셔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진멸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싸웠던 상대는 네 왕과 그들의 연합군이었습니다. 아브람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적들을 피할 수 없는 자리로 몰고 가셔서 아브람을 통해서 그들을 진멸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을 우리의 손에 붙이시는 분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삼상 17:47에 보면 다윗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대로 하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전쟁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예를 들 수 있는 전쟁이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 군대의 전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훈련되지 않았고 거기다가 비무장상태였습니다. 반면에 애굽 군대는 잘 훈련되었고 완전무장상태였습니다. 객관적인 전력만 가지고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는 애굽군대를 피할 수 없는 자리로 몰고 가셔서 홍해에 수장시키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중에서도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실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그랄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사라를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라고 합니다. 사라의 아름다움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좀 비굴했습니다. 그만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 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1장에 가면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장관이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창 21:22,23)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아브라함과 불가침 조약을 맺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컸는지 보십시오. 

25절에 보면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약하고 두려워서 아내를 팔아먹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높이시고 그 대적 앞에서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갈 3:14 말씀을 믿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나를 위한 고난으로 믿고 받아드리는 사람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대적을 붙이신 것처럼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때로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겼던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내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힘없이 쫓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내하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 23:5의 고백처럼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며 내 잔이 넘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찬송은 위대한 것입니다. 찬송하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창조 되었습니까? 사 43:21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찬송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때문에 찬송하는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천지의 주재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의 대적을 우리에게 붙이셔서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시 150편으로 오늘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찬송하시고 교회에서 찬송하시듯 세상에서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여호와를 찬양하라”(1절) 그분이 행하신 일들로 인하여 찬송하십시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2절) 그분의 위대함을 인하여 찬양하십시오.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2절) 온갖 악기로 찬양하십시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3-5절) 춤추며 찬양하십시오. “춤 추어 찬양하며”(4절) 생명 있는 동안에  찬양하십시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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