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오직 예수만 바라보라 (눅 9:28~36)

  • 잡초 잡초
  • 309
  • 0

첨부 1


오직 예수만 바라보라 (눅 9:28~36)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예수님의 변형’에 관한 증언입니다. 때는 공생애의 후반기로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이 여행의 목적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장차 받으실 고난에 대하여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자신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밝히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크게 기뻐하시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7-19)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할 것과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에 관해서 비로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고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현실로 이루어질 때 제자들이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팔일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이 세 제자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이 곤히 잔 것을 보면 시간이 밤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그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절에 보면,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31절에 보면, 이 세 분이 나눈 대화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관한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주님께서 받으실 십자가 죽음과 그로 인해 받으실 영광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목적이라면 모세와 엘리야가 가장 적격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예언자들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율법과 예언서들의 주제가 구세주에 의한 인류의 구원이라고 할 때 이 두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 세 제자는 곤하여 자다가 깨어났을 때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님과 및 함께 선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심히 놀랐습니다. 32절에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라고 한 것을 보면 세 제자가 꿈을 꾼 것이 아니라 완전히 깬 상태에서 이 광경을 목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막 떠나려 할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했는데, 표현이 약간 다를 뿐 그 의미는 같습니다.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때 제자들은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눈을 들어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서 계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변화산 위의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가르침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나눈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말해 주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별세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별세는 일차적으로 대속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타락한 인류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 대속의 성취에 있었던 것입니다. 

대속은 대신 값을 치루는 것을 말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남의 종 된 사람을 자유케 하려면 그 사람의 몸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값을 주고 종의 신분에서 풀려나는 것을 속량이라고 합니다. 대속은 속량과 같은 의미입니다. 죄인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는 것이 곧 대속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 제물로 바쳤습니다. 짐승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제사는 대속에 대한 상징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유는, 짐승의 피로써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짐승과 사람은 생명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에게 백만 원의 빚을 졌으면 백만 원을 갚아야지, 십만 원을 갚고 다 갚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목숨을 어찌 소나 양의 목숨으로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구약시대에 짐승의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리도록 허락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기의 피로써 드려주실 속죄 제사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로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9장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9)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시대의 속죄제사는 예수님께서 드려주실 속죄제사에 대한 모형입니다. 제물로 바쳤던 소나 양이나 염소는 인류를 위한 대속 제물로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자동차는 실제 자동차에 대한 모형입니다. 인형은 사람의 모형입니다. 모형은 그 모양은 실체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같지 않습니다. 유리조각으로 만든 모형 보석과 진짜 다이아몬드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와 같이 짐승의 피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차원이 다릅니다. 짐승의 피로는 실제로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서는 짐승의 피를 대속물로 간주하시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피로써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려주실 때까지 한정적으로 허용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대속의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모세가 율법서에 기록하였고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그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입증하는 증인으로서 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별세는 대속의 죽음뿐 아니라 죽음에서의 부활과 승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무덤에 장사된 지 삼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천한 몸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몸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지 40일 후에 하늘 구름을 타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승천은 곧 별세를 의미합니다. 산 위에서 변형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그가 죽음에게 삼킨바 될 수 없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보여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부활이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대속주이심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는다는 가르침도,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도 허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고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이 여러분의 대속주가 되심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멸망할 인간들을 대속하기 위해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리셨고, 그를 믿는 자들의 구원을 보증하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올바로 알 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주제임을 말해 줍니다. 

산위에서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신비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켰을 뿐 아니라,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해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면해서 말씀을 주고받았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전해 준 율법은 사람들이 만든 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법입니다. 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인류의 기원과 타락, 국가와 민족들의 기원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기록한 오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인류 구원을 약속하신 최초의 복음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는 하와를 꾄 뱀을 저주하신 말씀이지만 그 속에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뱀은 사단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류의 철천지원수인 사단을 멸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계보 역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줍니다. 거기 보면, 이 계보는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서 시작해서 셋과 에녹과 노아와 셈을 거쳐서 선민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야곱의 열 두 아들을 통해서 열 두 지파가 생기고 선민 이스라엘이 만들어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지파에 속하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그것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대로, 아브라함을 통해서 온 인류가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온 인류가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모세의 율법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성막과 제사장과 각종 제사법에 관한 규례가 나오는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인데,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었고 반드시 제사장을 통해서 제사를 드렸는데, 히브리서 4장 14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히브리서 5장 6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계열에 속하는 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직분이 영원함을 의미합니다. 

그런가하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성전에서 바친 제물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 25절 이르기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모세의 율법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5장 4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엘리야에 관해서 살펴봅시다. 엘리야는 구약시대의 모든 예언자를 대표할 만큼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는 우상숭배자인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했습니다. 그가 기도하자 삼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고, 그가 기도하자 가뭄이 그치고 비가 내렸습니다. 갈멜산 위에서 혼자서 바알의 선지자 450인을 상대로 대결을 벌였을 때에, 그가 기도하니 하늘에서 불이 내러와 제단과 제물을 살랐습니다.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습니다. 이 엘리야를 포함해서 예언자들의 사명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하였고,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나실 것과 그가 고난을 받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은 삼십에 팔릴 것과 그 돈이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데 쓰일 것을 예언했습니다(슥 11:12-14). 이 외에도 시편을 비롯해서 여러 예언서에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언급하신 성경은 구약성경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는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변화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주님의 별세에 관해 말씀을 나눈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사건은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따라야 함을 말해 줍니다. 

변화산 위의 영광스러운 광경을 본 베드로는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하고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이는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영광스러운 천국에서 온 모세와 엘리야에게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얽어서 만든 초막이 어울릴 리가 있겠습니까? 이는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예수님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신비를 보고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신비한 경험을 하면 계속해서 거기 머물고 싶어 합니다. 이 역시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의 연약함을 벌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행할 바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위엄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세 제자는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들이 엎드리어 두려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면서 “두려워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고개를 들어 보니, 영광의 구름도, 모세도 엘리야도 보이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으신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것은 무슨 신비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신 것이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따르시면 “아멘!” 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마귀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생명의 길로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들어오며 나오며 신령한 양식의 꼴을 얻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됩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나던 소리가 그치자, 오직 예수만 보였다는 표현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모세와 엘리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구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역할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주의 일꾼들에게도 적용해야 하는 원칙입니다. 아무리 신령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지라도 예수님을 높이지 않고 자기를 자랑한다면 참 주님의 일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눈에는 예수님만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세상이 겹쳐서 보이면 안 됩니다. 예수님과 돈이 겹쳐서 보여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세상이 보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돈이 보여서도 안 됩니다. 나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지, 십자가는 보이지 않고 현세적인 축복만 보이면 큰일 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기적의 떡을 배불리 얻어먹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를 아신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그 날 주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릴 것이라”고 하시자, 그만 예수님을 배척하고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 대신에 떡이 보였을 뿐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세적인 축복을 바라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목적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간에 언젠가는 주님을 떠나가고 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기본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이 떠나갔을 때,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처럼 우리는 떡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을 보고 따라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하신 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눈에는 오직 예수만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떠한 시험이 다가올지라도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변화산 위에서 세 제자가 목격한 광경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증거대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장차 영광 가운데 강림하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온갖 사이비와 이단이 우후죽숙처럼 생겨나서 미혹하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임으로 강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그 날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