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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여호와의 명령대로 (출 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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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명령대로 (출 34:1~9)


인간아 너 왜 그렇게 사니?

어떻게 보면 누가 나를 향해서 하는 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나는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나? 하는 이 마음이 들 때마다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가득합니다.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도 듭니다.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하지만 어느 순간 또 다시 한숨을 내 쉴 수밖에 없는 그런 행태를 또다시 보일 때도 있습니다. 성읍은 정직한 사람의 축원으로 인해 진흥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내 스스로 정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선하게 살아보겠노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그런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을 해 보지만 그런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 내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정말 살기가 싫어질 때도 있습니다. 마음으로야 정말 잘 해 보고 싶었는데 스스로 뒤엎어버리는 그런 말과 행동들이 왜 나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도 했는데 그 말 한마디 곱게 해 주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든 건지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워지는 것은 또 왜 그러는 건지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에도 없는 소리나 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하며 머리를 싸매고 아파합니다. 아니 사실은 다른 사람을 향해 내뱉는 쓴 소리가 나 자신을 향한 소리라는 것을 사실은 그런 내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애써 아니라고 그건 아니라고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던 지요?

오늘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저 성질머리를 어떻게 하오리이까 입니다. 
자기 인생을 돌이켜보면 사실 감사한 것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었어야 할 인생입니다. 그런 자기를 죽게 버려두지 않고 살렸습니다. 왕의 명령대로라면 당연히 죽여 버렸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석 달 동안이나 숨겨놓고 죽을 목숨을 살려주셨던 부모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꾀를 내어 공주가 자주 나오는 강가에 갈대 상자에 담아 띄어 놓아 공주의 눈에 띄도록 만들어 준 것도 고맙습니다. 공주가 노예의 아들임을 알면서도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삼아 일국의 왕자 노릇을 하며 배우며 살게 되었던 것도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가 자기 성질 머리를 죽이지 못하고 사람을 때려 죽였습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것하나 참지 못해서 그만 도망쳐야 했습니다. 겨우 광야로 도망 나와서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도 그곳의 족장을 만나 그의 양떼를 치게 된 것도 그 족장의 사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저 감사한 것뿐입니다. 그런 무지랭이처럼 살던 자기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로 삼아주신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금만 마음이 섭섭하면 투덜대며 원망을 해대는데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죽이겠다고 덤벼들 때는 그저 정나미가 뚝뚝 떨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그걸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 목동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시내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다시 부르셔서 거룩한 산 시내산에 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래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그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희망에 부풀어서 산을 내려오다가 그는 들려오는 소리에 그만 홱 돌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며 그 앞에서 절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만 자기 성질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새겨주신 돌판을 집어던져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모세 그는 확실히 불같은 성질의 사람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애굽에서 애굽 사람을 쳐 죽일 때도 자기 일이었다면 그렇게까지는 안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백성이 얻어터지는 것을 보는 순간 그만 돌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또 그렇습니다. 그냥 자기를 원망하고 시비할 때는 잘 참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망령되게 우상을 만들어놓고 절하며 춤추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돌판을 집어던졌던 것입니다. 

명분이야 처음에는 내 백성을 위해서였고 지금은 하나님을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 자기 백성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던가요? 그러면서도 나는 원래 성질머리가 나빠서 아니면 나는 원래 타고나기를 그래서 그렇다고만 할 수 있는 것인지요?

이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순간 폭발해 버리는데 그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도무지 어떻게 수습을 할 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아무리 머리를 싸매봐도 도무지 대책이 서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말로는 도무지 대책이 안 선다고도 합니다만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것을 하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벌이곤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그것까지도 견디고 이겼어야만 합니다. 그것까지 참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그러려고 작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쌓여왔던 것들이 그냥 터져 나온 것뿐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라고 했는데 그런 모세가 이 지경이 될 적에는 다 그 이유가 있지를 않겠습니까?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원망소리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일마다 그들은 불평을 해댔습니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그래도 꾹꾹 눌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이건 아닌데 싶은 분명한 모습을 보게 됐을 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건 아니잖아. 이건 정말 너무 한 거잖아. 그래 그 꾹꾹 눌렀던 성질을 있는 대로 다 터뜨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공든 탐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그런 일들이 우리 가운데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하나님 어찌 하오리이까 부르짖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우리는 이런 난감한 때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두 개를 깎아라. 네가 깨뜨려 버린 처음 돌판에 썼던 것과 똑같은 글을 거기에 써 주겠다. 내일 아침까지 준비한 다음 아침에 시내 산으로 올라와서 산꼭대기에서 내 앞에 서라. 아무도 너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여라. 산에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면 안 된다. 산 근처에서는 양이나 소에게도 풀을 뜯게 하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하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다면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돌판까지 다 만들어 주셨는데 이번에는 모세에게 준비하라고 합니다. 글은 다시 새겨 주겠지만 돌판은 네가 다시 만들어서 들고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돌판을 만들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들고 산을 올라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화를 내고 돌판을 던져버리는 것은 순간이었지만 그 대가는 참으로 컸습니다.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 산에 올라가 40일을 금식했는데 다시 40일을 금식도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렇게라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해도 할 말이 없었을 모세입니다. 그 이후로는 모세는 정말 온유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을 다 멸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나설 때 그 앞을 가로막고 섰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를 이리저리 다니며, 두루 살피고, 생각해 보아라. 성의 광장을 모두 뒤져, 정직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찾아보아라.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찾아보아라. 너희가 찾을 수 있다면 내가 이 성을 용서해 주겠다.”고 하신 

예레미야서 5장 1절의 말씀처럼 그렇게 모세는 하나님 앞을 막아섰습니다. 차라리 저를 멸하시더라도 이 백성을 용서하여 달라고 했던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다시금 성질을 부리며 백성들 앞에서 “내가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랴”고 하며 두 번씩이나 지팡이로 반석을 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더 이상 이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한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모세가 간절히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다시금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모든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하나님이 참고 기회를 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향해서 여러 번 참으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를 향해서도 하나님이 참고 또 참으십니다. 

그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굴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뿐 아니라 우리들의 자녀들에게까지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말씀에서 벗어나 내 후손들까지도 망하게 할 그런 어리석은 자로 남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다시금 모세에게 주신 말씀들이 무엇입니까? 그중의 하나가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맥추절입니다. 맥추절은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날은 또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을 주셨던 말씀 전수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날이 또한 신약의 성령 강림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맥추절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되 내 힘으로 내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지금까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면 바로 내 힘으로 내 생각을 따라 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백성들이 다 준행하였다고 출애굽기 39장에 수없이 기록한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랬을 때 모세가 백성들을 축복하였고 민수기 6장의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축복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복주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우리는 이 맥추절을 지켜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곧 영적 이스라엘 백성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은 본보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출애굽기 25장 2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예물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기쁨으로 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미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 다시 이 날에 모든 거둔 것의 십분의 일을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는 말합니다. 그건 이중과세가 아니냐고요? 그런데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내라고 하십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백배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자녀들이 복을 받고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의 생업을 복되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게 하여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예물을 드리라고 하시는 이유는 예물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복 주시고 싶어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실패자로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붙잡아주시며 이윽고는 든든히 설 수 있도록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처럼 용기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그 있는 것조차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내게 남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있는 것조차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씨를 심듯 그렇게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섬기는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와 어그러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게 아니다 싶으면 그것을 깨닫게 될 때 빨리 바른 자리로 돌아오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 됨의 자리인 것이요 그것이 바로 회복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바로잡아 나가면 됩니다. 하루아침에 안 된다고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되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주시는 능력대로 은혜대로 다시금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를 놀랍도록 세우시고 이끄시며 넘치도록 복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든든하게 세워져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언제나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모세는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두 개를 깎았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시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했습니다. 모세는 돌판 두 개를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구름 속으로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서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라는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 앞을 지나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이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이다. 나는 그리 쉽게 노하지 않으며 사랑과 진실이 큰 하나님이다. 나는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잘못과 허물과 죄를 용서할 것이다. 하지만 죄를 그냥 보고 넘기지는 않겠다. 나는 죄를 지은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삼대나 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릴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실패했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여호와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모든 구원과 은혜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름이 이제 우리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쉽게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진실로 이끌어 주십니다. 수천 대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잘못과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죄를 그냥 보고 넘기지는 않겠다고 하십니다. 앞에서는 분명히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잘못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신다고 했는데 여기서 다시 죄를 그냥 보고 넘기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돌이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빨리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내 힘으로는 안 되니 하나님의 은혜로 사로잡아 주셔서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할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돌보아달라고 사랑의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부터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살아가겠노라고 다시금 다짐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나도 할 수 있노라고 고백하고 이제 하나님이 도와주실 줄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를 깨달은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모세는 급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리고는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면 저희와 함께 가 주십시오. 비록 이 백성은 고집이 센 백성이지만 저희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를 주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그들은 인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왜 지켜보십니까? 돌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잘못된 우리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맥추절을 지키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새를 잡아서 가두게 되면 참새가 얼마나 성질머리가 나쁜지 그냥 이리 가서 부딪치고 저리 가서 부딪치다가 이윽고는 머리가 깨져서 죽어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성질을 부려봐야 망하는 건 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버텨봐야 손해나는 건 나일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손해나는 일을 왜 합니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복된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성질누리지 마십시오. 그래봐야 나중에 후회할 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약 올리려고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것이 옳으니 그리니 하는 것을 따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말씀을 따라 복되기를 바라셔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이후로 오직 하나님 앞에서 고집부리지 말고 오직 말씀을 따라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쳐나고 나도 복 받고 우리 자녀들도 다 함께 복을 누리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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