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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위로냐 믿음으로냐 (갈 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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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로냐 믿음으로냐 (갈 3:1~14)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까요? 무엇으로 성령을 말미암아 받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복음진리를 떠난 갈라디아 성도들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판한 후에 이 모든 것이 행위가 아닌 믿음이라 답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대해서 갈라디아 성도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보일 정도로 강력하게 복음을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꼬임에 홀리듯이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홀딱 넘어갔습니다. 참 하나님 백성이 되려면, 십자가 복음만 믿을 것이 아니라 뭔가 행위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그런 모습이 분별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멍청이 같다고 책망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체험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행위”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했을 때 성령을 받은 사실입니다(2). 그들은 오직 “성령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바보같이 “이제는 육체로” 마치려고 합니다(3). 4절의 “많은 괴로움”은 문자적으로는 ‘많은 것들’입니다. 즉, 그들은 성령을 받은 후 체험한 많은 것들을 모두 허사로 만들고 있습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5).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신 것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을 받고 그분의 능력이 나타남을 체험하는 것은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모든 성도의 삶은 그렇게 성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부터는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면 어리석다고 책망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는 언제나 말씀이 흥왕할 때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성령을 받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기를 갈망한다면, 무엇보다 ‘듣고 믿는’ 일이 있어야 하겠지요. 듣고 믿으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각종 음향 기기들로 한껏 감성적인 분위기를 조장하고 비명 지르듯 크게 기도하는 등, 몸부림치는 열광적인 ‘어떤 행위들’을 통해서 성령을 받아내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자 한다는 것은 뭔가에 홀린 것이며 참으로 멍청하다고 책망 받을 일입니다. 

우리 교회, 우리 가정,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능력으로 역사하시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눈앞에 선명하기까지 복음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그리스도의 말씀이 가르쳐져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나의 삶과 가정과 교회에 흥왕할 수 있도록, 인간의 행위가 덕지덕지 덧붙은 왜곡된 복음이 바르게 교정될 수 있도록, 복음에 굳게 서서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결코 행위의 대가가 아님을 명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인들은 유대주의자들처럼 율법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는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유대인들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고 합니다. ‘의로 정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 선언하셨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 심지어 할례를 행하기도 전에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창 17:14).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의 모형인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7)만이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은 많았습니다.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도 있었고 다른 후처들에게서 태어난 아들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삭만 아브라함의 아들로, 그분의 백성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원리는 아브라함의 혈통인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혈통과는 무관한 이방조차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시려고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시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8, 창 12:3, 18:18, 22:1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9).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원리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위해 만들어낸 이론이 아닙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만들어낸 이론도 아닙니다. 신구약 구속사 전체에 걸쳐서 변함없이 적용된 원리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할례나 율법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과 관련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의 후세대들 역시 아브라함과 동일한 방식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이신칭의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바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루터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믿음으로 복을 받는 것과는 정반대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문맥에서 “율법의 행위”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처럼 되기 위한 율법적 행위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하여 그 후손들에게 이르기까지 구속사의 문맥에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아보려는 모든 인간의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이라는 표현은 적어도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정적인 사람들 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율법책에는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기록되어 있는데(10),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신 27:26)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고,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원리는 확고부동합니다(11, 합 2:4). 복음은 오직 믿음을 요청하는 원리입니다. 반면에 율법은 완벽한 행위를 요청하는 원리입니다. 율법은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고 합니다(12, 레 18:5). 이 두 원리는 함께 결부시킬 수 없는 상극의 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행위를 덧붙여서 의로워져 보고자 하는 시도는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오직 믿음의 원리로 살든지, 아니면 항상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율법의 원리로 살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율법은 ‘이것을 행해라. 저것도 행해라’고 지시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율법의 모든 지시를 완벽하게 해낼 수 없습니다. 결국 율법의 원리를 선택하는 사람은 저주를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노력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는 사람은 저주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행위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은 저주받으려고 작정한 사람입니다. 업적으로 하나님께 칭찬받아보려는 사람은 멍청한 바보입니다. 의롭게 되기 위한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고안하는 사람은 저주받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저주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행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행하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13a). 신명기 21장 23절을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행위에 있어서 아무런 흠도 없는 완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왜 나무에 달리셨습니까? 왜 그분께서 저주 아래 계셨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율법의 저주 아래서 종노릇 하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주 받으신 결과로 두 가지 명백한 사실이 발생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다는 사실 입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14). 이방인인 갈라디아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우연히 발생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성취하신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이방인도 오직 믿음을 의로 여기신 사건이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혈통을 따라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관계적인 의미와 법정적인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비참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책임에 짓눌리고 죄에 오염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분께서 택하신 자로 죄를 용서받고 관계가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칭의는 여전히 부패한 상태에 있지만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선언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모든 권리를 다시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판결입니다. 이 모든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았으므로, 이제 와서 율법적인 행위를 덧붙이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는 것은 행위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행위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도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에 근거가 있음을 확고히 붙들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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