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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런 사람을 삼가라 (막 12: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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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을 삼가라 (막 12:35~40)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을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그들을 경계하고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입니까? 말씀을 함께 나누는 중에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길 소원합니다. 

첫째-그들의 해석과 가르침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메시야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가르치는데 인용하는 시110:1절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는 말씀을 가지고 그들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 하셨습니다. 
본문35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쌔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서기관들은 메사야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방으로부터 억압받는 유대민족을 해방시킬 정치적 왕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처럼 메시야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그 예언을 성취하려고 다윗의 혈통을 빌려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였던 서기관들과 자주 논쟁을 하셨습니다. 그러는 중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경된 인도자라고 까지 말씀하셨고, 본문에서는  그들의 교훈과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시고 나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말씀을 가르쳤고, 예수께서는 성령의 감동에 의해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막7:7에서 그들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도다.”

서기관들은 사람의 교훈으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교훈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반박하시기 전에 먼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졌음을 언급하셨습니다. 본문 36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36절)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는데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께 수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중에서도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고 다투었고, 고난당하시는 주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다시 고기 잡으러 바다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비로소 오순절 성령의 체험 후부터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모든 말씀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요14:2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성경은 가르칠 때나 들을 때도 성령의 감동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도 없고, 바르게 가르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 없는 말씀의 선포와 말씀청취는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이 없는 모든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벧후1:20-21절 말씀입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성령의 감동이 없이 자신들의 전통적 해석방법에 따라 율법을 이해하고 가르쳤던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러 왔을 때 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오해함이 아니냐.(막12:24)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한 세례요한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1:31-33절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 하니라.”

당시의 서기관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교훈을 받고 가르치는 일을 했다면  결코 예수님과 논쟁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던 세례요한은 주님과 논쟁한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감동이 결핍된 가르침은 사람들의 영혼에 아무런 감동과 은혜를 끼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감동과 예수의 영광이 함께 하지 않는 가르침은 신앙인들의 영적생활에 커다란 장애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적인 교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관한 학식 있는 학자들의 가르침과 해석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학문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학자라도 그가 성령의 감동이 없이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친다면 그 어떤 성경적 해석이나 가르침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경해석은 자칫하면 사람의 교훈과 가르침으로 타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당시 성령의 감동이 없는 서기관들의 교훈과 가르침은 결국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의 못 받게 하는 일에 열심을 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증거 합니다.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나 듣는 성도나 모두가 성령으로 감동되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큰 역사를 이루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선포하는 저와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둘째-외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는 어느 민족보다도 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르치는 신분인 서기관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까칠해서가 아니라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의 마음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지독하게도 외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 외식이라는 말은 마음속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것을 위주로 사는 삶 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자주 외식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시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그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경계하신 서기관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보여 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오는 음부에서 고민에 빠져있는 부자는 이 땅에서 호화로이 연락하면서 서기관들이 입기 원하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는 긴 옷과 자색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참으로 그는 성경의 말씀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일들을 누리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렇게 사는 자신의 삶이 축복받은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그의 삶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더욱더 멀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은 멸망 받는 이 부자처럼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문안 받는 것을 원했습니다. 무론 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일을 죄를 짓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경계하라고 하신 이유는 남에게 높아 보이기를 원하는 그들의 타락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들을 평가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노숙자 패션을 하고 광야에서 야인처럼 사는 세례요한을 말씀하실 때 그는 왕궁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높아 보이기를 원하는 마음을 속히 버려야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품고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높아지기를 원하는 삶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삶이라는 것을 크게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했습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의 마음은 이미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으로 가득한 타락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소유자는 결코 축복 받은 영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연못에 오리 두 마리와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지나자 연못물이 말라 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하고 이주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것은 날 수 있는 오리가 양쪽에서 막대기를 물고, 그 가운데를 개구리가 물어「비행」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떠나기 전 이들은 누구든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서로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이들은 그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된 농부가『누가 저런 생각을 다 했을까?』라고 하면서 탄성을 지르며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자랑스럽게 대꾸했습니다.“내가 했지” 순간 그 개구리는 그 높은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교만의 결과는 반드시 패망을 불러옵니다.(잠언16:18).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이 공공연하게 성도들 사이에서도 용납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안 될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는 성령이 충만한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그는 교회 내에 가난하고 어려운 교우들을 위해 자신의 부동산을 모두 팔아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모든 이들에게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도 그에게 바나바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면서 까지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 곳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라는 이름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바나바처럼 좋은 일로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밭 값의 일부만을 드리면서 모든 것을 드린 것처럼 사도들에게 거짓을 말했습니다. 이들은 적당히 하고 최고의 효과를 얻어내려는 계산된 지극히 타락한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적은 것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일은 사업에서는 몰라도 성도가 교회에서 신앙인으로서 가져서는 안 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그런 마음을 “사단이 가득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행5:3) 
대접을 받는 일은 그 사람에게 영광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처럼 자신이 남에게 대접을 받기를 스스로 원하는 일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은 잔치나 회당에서의 상좌를 원했습니다. 

간혹 어떤 교회에는 상석이 따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서기관들이 원하는 자리입니다. 대접을 받으려는 마음의 산물입니다. 사단이 뿌려놓은 타락한 마음의 씨앗을 싹틔우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경계하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남에게 대접받는 자리를 매우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는 일은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찾아 높여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주님은 스스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은 결국에는 반드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6:3-4에서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기도를 외식으로 길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과부의 가산이라는 말은 작은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서기관들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사람들로 소개한 것은 그들이 작은 것들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영적생활에서 작은 일을 쉽게 생각하는 영적 교만은 우리 모두가 경계를 해야 할 교만한 마음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외식으로 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실하고 참된 기도는 오래하는 것이 더 큰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외식으로 길게 하는 기도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는 시간만 낭비하고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막12:40)

기도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드려져야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처럼 기도가 다른 것들을 보조하거나 이용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우리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외식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때문에 외식적인 신앙은 빨리 버려야합니다. 왜냐하면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더욱 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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