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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니고데모의 고민 (요 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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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고민 (요 3:1∼17)


한때 우리는 성령운동 한다고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한다고 이단이라고 굉장한 핍박을 당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는 자는 마음속에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핍박하기 때문에 괴롭고 우리가 받은 성령의 체험이 진실하고 참되고 참 은혜로운 것인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마음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와 같이 똑같은 갈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회의 정회원인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결론짖고 자꾸 욕을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비상한 분이고 이단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동료들은 예수님이 이단이고 죽어야 마땅하다고 말을 하니 마음에 갈등이 일어난 것입니다. 
 

 1. 니고데모의 첫 번째 고민

 니고데모의 고민은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의 완고한 저항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엄청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단정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은 깨닫게만 하지 죄를 씻을 수 있는 힘이 없으니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로 오셨으니 당신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니까 유대인들에게는 눈에 가시처럼 되고 이단과 이방인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예수님에 대해서 저항을 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애를 썼는데 니고데모에게는 굉장한 마음에 고통과 갈등이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을 지켜야 되겠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이단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이단이라 하며 완고한 저항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 행위가 아닌 자기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구주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으로 생각하고 율법에 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알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이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 병상에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병원에 가서 그를 전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환자에게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강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선생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함께 처형당한 강도 중 한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많은 죄를 지었으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할 때 십자가상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선생님도 지금 강도처럼 회개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환자가 “누구를 강도취급 하느냐? 내가 어디 강도냐? 나는 강도가 아니다”라고 화를 냈습니다. 목사님이 “강도도 구원 받는데 선생님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니까 그는 “나는 강도가 아니니까 회개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존심 하나 때문에 자기는 강도가 아니고 강도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는 가졌어도 구원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킨 의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완고하게 대항하고 반항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비록 산헤드린회원이요, 율법의 선생이었지만 완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마음속에 깨달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체불명의 사람,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하나님께 구원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통하지도 아니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 생각에는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 아니고는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주장하고 지키지 아니한다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 갈등을 느끼고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니고데모의 두 번째 고민

니고데모의 고민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거듭나야 하늘나라에 간다는 말에 기절초풍했습니다. 자기는 내내 가르친 것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어야 행위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듭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씀했는데 니고데모는 영적인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서 주님을 쳐다보고 정색을 하고 “주님 사람이 늙어서 어떻게 거듭납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그는 영적인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4∼6)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가는 사람은 종류가 다르다. 아담의 후예들은 모두다 영이 죽고 육만 남아있는 사람인데 육을 통해서는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가 없다. 죽은 영이 도로 살아나서 새사람이 되는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안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태어나야 영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을 니고데모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는 육으로 태어나서 육의 생각인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고 하는데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예수를 통해서 거듭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 때문에 기가막힌 것입니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이 늙은 나이에 들어갔다가 도로 태어날 수 없는데 이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야 된다고 하니 이 왠말인가. 또 그냥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 물과 성령은 또 무엇인가” 그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걱정 근심이 꽉 들어찼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고 교회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거듭나지 않고 육으로써 아무리 훈련을 해도 그것은 빛난 육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육체에 좋은 옷을 입히고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린다고 해서 육체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속이 달라져야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목포에 부흥회를 갔을 때 집사님 한분이 양손에 손가락이 없는 몽당손을 가지고서 헌금을 거두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그 집사님을 사무실로 불러서 물었습니다. “왜 몽당손이 되었습니까?” 그 사유를 설명하기를 도박이 좋아서 자나깨나 도박 생각밖에 없어서 부모가 유산으로 준 재산을 다 도박으로 탕진하고 나중에는 집안에 있는 물건 다 갖다가 도박으로 잃어버리니까 그 형제들이 도박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작두에다가 손가락을 넣어서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물고 나니 손가락이 없는 몽당손으로 또 도박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자기 부인에게 돈 안 빌려 온다며 부인을 죽이겠다고 하므로 부인이 달아났습니다. 달아났는데 끝까지 따라가서 산에서 붙잡아 가지고서 바위 끝으로 끌고가서 바위에서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부인이 마지막으로 기도 한번 하고 죽을테니까 기도할 때까지 밀지 말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부인이 간절히 기도하길 “하나님, 저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니까 여한이 없습니다만 이 사람은 도박에 미쳐서 살다가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니 너무나 불쌍합니다. 제가 죽더라도 이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옵시고 이 분에게 행복을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목석같은 그도 부인이 자기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데 마음에 감동이 되어 ‘내가 정말 미친 사람이고 못난 사람이구나’ 그래서 부인이 기도하다가 들으니까 뭐가 바삭 하더랍니다. 돌아보니까 몽당손을 입으로 깨물어 피를 줄줄 흘리면서 “내가 각오하고 새사람이 되겠다고 아무리 결심을 해도 안되니 날 좀 변화시켜 주시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기에 당신이 이렇게 선하고 착한 사람으로 변화되다니 나도 좀 데려다 주시오” 그래서 그 부인이 목포순복음교회로 데려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그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자 속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도박이 사라지고 도박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고 부인을 미워하던 생각도 없어지고 새사람이 되어서 그 교회에 성도가 되고 그 다음에는 집사가 되어서 몽당손으로 헌금을 거두면서 봉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열 손가락 다 잘라도 속이 변화 안되면 여전히 손가락 없는 도박쟁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들어와서 거듭나니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왔다갔다 한다고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지키려고 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7절로 9절에 예수님께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신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를 보고 “저 밖을 바라보아라”하니까 마침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리고 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거듭난다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가 없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그 사람이 변화되면 사람의 행동에서 변화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을 좋아하던 사람이 선을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던 사람이 하늘나라를 좋아하고, 교회를 미워하던 사람이 교회를 찾아오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를 보고 ‘아, 저 사람 성령으로 거듭났구나’ 그렇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했다는 증거는 변화가 다가오는 것이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야 거듭났다고 할 수가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 반동안 따라 다녔지만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에 열흘동안 기도하니까 하늘에서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강한 바람같이 우리속에 들어와서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을 주시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온유와 절제같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깨닫게 하심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변화받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구약성경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통해서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때 주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다가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서 물리게 하시매 수많은 사람이 뱀독이 올라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나와서 회개하고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하니 모세가 기도하니 하나님이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매달고 “누구든지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뱀독에서 해방이 된다”고 하니까 뱀독이 올라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놋뱀을 바라보자 마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놋뱀에서 해방되고 다 죽음에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물려서 사망의 독이 올랐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속아서 선악과를 따먹고 사망의 독이 올라 그 후손들 대대로 뱀독으로 죽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세계는 사망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고 마음으로 죄의 노예가 되고 육체적으로 죽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이 뱀독에서 해방시킵니까? 종교가 해방시켜 줍니까? 율법 행위가 해방시켜 줍니까? 인간의 노력과 수단으로 해방됩니까? 이 뱀독을 고쳐줄 자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하기를 뱀독을 고쳐야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을수 있으니까 내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높이 십자가에 들려서 너희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이 독을 내 보혈이 능력으로 청산해 버리고 말것이니 남녀노유, 빈부귀천 할것없이 나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죄악의 독이 해소되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찬송가 135장 ‘갈보리 산 위에’는 조지 버나드 목사님이 작사, 작곡한 곡입니다. 그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1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슬픔과 고통을 오직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어느 날 조지 버나드 목사는 십자가에 대해 집중하며 묵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십자가 너무 험하다. 바라보기도 괴롭다’ 그 다음에는 고통 받는 십자가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이 몸찢기고 피흘려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가’ 그렇게 묵상하면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는데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의미가 마음에 너무나 명확하게 새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홍수처럼’ 십자가의 은혜가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때 즉시 펜을 들어 쓴 것이 바로 이 찬송입니다. 특별히 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뜨겁게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일세∼”

기독교 신앙이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끌어안고 사는 것입니다. 아침에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점심 때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저녁에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나깨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끌어안고 주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보혈의 은혜, 성령의 은혜가 비와같이 쏟아집니다. 하나님께 가까워지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기도할 때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에게 쏟아지며 우리가 성령으로 새힘을 얻게 되고 능력을 얻고 성령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율법의 행위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는 더러운 걸레 같다고 성경은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일을 행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걸레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거듭나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행위는 아름다운 행위가 되지만 거듭나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하는 행위는 더러운 걸레와 같은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의 신비한 역사로 영생을 얻게 되고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 땅에서의 생이 끝나면 영원한 천국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구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고 변화받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 받아야 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행위가 변화되고 마음의 생각이 변화되고 삶의 생각이 변화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므로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흑암의 세계에서 건져내어져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긴 새로운 국적을 가지고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 기도 -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도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니고데모가 보통 사람보다 훌륭한 것은 율법을 엄숙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을 아무리 장식해도 영이 되지 않습니다. 새롭게 태어나야 영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새로 태어나는 길은 예수 믿는 길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은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생각하고 성령으로 말하고 성령으로 행동하며 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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