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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롬 10: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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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롬 10:16~21)
  

일전에 우리 교우들과 함께 나눈 말씀 중에 나는 왜 성결교회 목사가 되었는가? 에 대하여 잠시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설교의 시작을 쉽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문을 열었지만 이 질문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질문일 것입니다.

'나는 왜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냥 교회 옆에 성결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를 나가니까 먹을 것도 주고, 친구도 많아서 재미도 있고, 교회학교 반사 선생님은 너무 잘 해주고 해서 그래서 원초적인 부분에서 만족이 있어서 교회를 나갔다는 말이 대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왜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한 뒤에 또 다시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아주 본질적인 질문이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나는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입니다.

이 대답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교우들에게 답을 듣기 전에 제가 대답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그 분이 나의 전인생의 주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그 분이 내 삶의 전부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제 휴대폰은 바탕화면에 사용자 임의로 상용 어구를 새겨서 휴대폰을 켤 때마다 보이도록 한 문구가 있습니다.
제 휴대폰의 상용 문구는 ‘주님의 노예’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노예로 살고 싶습니까?
누구도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찬성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 한 사람의 노예로 살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노예 말입니다.

노예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운 성서적인 단어를 말한다면 ‘dou'lo"’일 것입니다.
이 단어는 ‘종’이라고 번역됩니다.
쇠사슬에 매여 있는 상태의 종을 우리는 노예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자유가 없는 상태의 노예 중의 주의 노예로 살겠다고 매 번 다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분이 나의 주인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느냐? 가 또한 중요한 물음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 확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주의 노예로 살겠다고 다짐한 결정적인 근거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먹을 것을 주고, 많은 시야를 넓혀 준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고민한 것은 철이 들어서였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 대학을 들어가야 하는 어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며, 메시아이며,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나는 그 분이 나의 주님이라는 확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분과의 만남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서 인문학을 접하면서는 더욱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에 대하여 더욱 많은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교회 안에서 종교인으로 살아가며 세상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돈되지 않은 삶을 살던 어느 날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만남에 대하여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히브리서 9:12절의 말씀으로 주님은 저에게 말씀하셨고 저는 그 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우리 교우들에게 말씀드리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음을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곤고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저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히 9:12절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저는 그 날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감격으로 만났습니다.

교우 여러분!
히 9:12절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저 역시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잘 알지 못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들아, 구약에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염소와 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흘려야 했고, 제사장은 그 잡은 제물을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나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단다. 아들아, 그런데 이제는 그런 번거로움이 필요 없게 되었단다. 왜냐하면 내 아들 예수가 직접 제물이 되어서 너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이 박혔고 이 일만 네가 믿는다면 너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줄 것이란다.”

저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독론의 핵심인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귀에 인이 박힐 정도로 들은 말씀입니다.
목사님들을 통하여 세뇌를 당할 정도로 들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히브리서를 그 날 음성을 통하여 들려주시고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해석까지 해 주시는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오늘 설교 포인트의 중요한 핵심을 찾아내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는 것은 말씀을 귀담아 들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의 믿음으로 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할 때 주시는 은혜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저는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라고 정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로마서 37번째의 강해를 통해 말씀이 들리기를 바라지 말고 말씀을 들으려고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얻어야 하는 은혜에 접근해 보십니다.  

1. 말씀을 아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16절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바울의 이 말씀은 이사야 53: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사 53:1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사야가 전한 이사야 53장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고난 받는 종의 예언입니다.
사 53:4-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렇게 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예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예수님을 거부했음을 바울이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지와 그 분의 왕 되심까지도 소상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예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마태복음 2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별이 나타난 곳을 보고 찾아와서 헤롯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 나신 곳을 물으며 그에게 경배하러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왕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충격을 받은 헤롯이 서기관과 제사장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습니다.
그러자 서기관이 대답을 합니다.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처럼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알려 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나신 곳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됩니까? 
성경의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바로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이는 장본인들이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까?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지식으로 알고 있었던 말씀입니다. 
여기에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을 때 그들이 바리새인이요 서기관이요 사두개인입니다.
성경이 지식으로 끝났을 때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합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그냥 아는 것이지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큰 착각을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 박사라면 믿음이 아주 좋을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도올 김용옥씨가 요한복음 강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책의 중간까지 읽어보았는데 정말로 박식한 지식으로 출간한 뛰어난 학술서적입니다.
그런데 도올 김용옥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예수는 ‘역사적 예수’였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수 중에 ‘신앙적 그리스도’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적 예수가 무엇입니까?
“2000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입니다. 그는 30세가 되던 해에 하늘의 명령을 받고 식민지의 굴레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민중들과 함께 하며 대중적인 세를 규합하고 기득권층이었던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지배 권력에 대항하다가 반란의 역도로 몰려 십자가형을 유대총독으로부터 언도받고 사형을 당한 자입니다.”

신앙적인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본래 하나님이셨는데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공의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시며 진정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시기 위하여 겸손하게 섬기시는 사역을 감당하신 왕이시며 동시에 우리들에게 영적인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신 분이십니다.”

도올의 지식으로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전자였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지식으로 아는 것은 지식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역사적인 예수로 아는 것은 그냥 예수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아니라 우리 주님을 신앙적인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는 진정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번역된 ‘말씀’이라는 단어를 원문에는 ‘rJhvmato"’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rJhvma’ 라는 이 단어의 어원은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하고 있는 ‘lovgo"’입니다.

그렇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자주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고스’입니다.
그냥 문자적인 의미에 있어서 성육신 하신 이성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로고스는 우리에게 그냥 로고스의 의미 이상 다른 어떤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레마’는 다릅니다.
‘레마’는 로고스의 말씀이 나에게 임하여 일어나는 능력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레마’의 말씀은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로고스를 아는 것입니다.
이 로고스를 아는 것으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로고스의 말씀으로 굳어져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아는 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닙니다.

제가 부산에서 11개월 전도사로 사역할 때 한 남자 집사님이 40일 금식을 하셨다는 것을 부임 이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부임 심방 겸 해서 그 분의 집을 심방했습니다.
심방하다가 그 분이 40일 금식을 하는 동안 성경을 수도 없이 읽었다는 간증도 들었습니다.
부임 초기에는 누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런 가 했는데 그 교회에서 11개월 동안 담임목사님을 섬기는 동안 교회의 문제를 일으키는 한 복판에 그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흔히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 2회 완료한 평신도 지도자”, 성경통신 신학교를 졸업한 평신도”

지금 크로스웨이 2기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수준이 높은 내용들을 수강생들이 잘 따라오고 있어 감사합니다.
강의를 하면서 수강생들과 영감이 있고 기름부음이 있는 찬양을 부릅니다.
그리고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뜨겁게 기도합니다.
그 때 기도하는 제목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오늘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으로 머물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 배우는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들의 영적인 무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지난 주에 전반기 목회의 부족함을 점검하고 후반기 사역의 기름부음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한 주간 동안 기도원에서 머물렀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비 한 방울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햇살이 얼마나 뜨거운지 한 낮에는 방에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뜨거웠습니다. 
기도원 앞에 계곡이 있는데 물이 말라서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고 있었습니다. 

또한 기도원의 앞마당에 기도원에서 경작하는 밭이 있는데 여러 가지 밭작물이 재배되고 있었습니다.
비가 온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밭작물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농사를 잘 모르는 목사이지만 한 눈에 밭작물들이 나에게 물 좀 주세요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빗줄기가 강해서 그런지 그렇게 오래 내린 소나기는 아니었지만 순간 내린 비의 양으로는 제법 많이 내렸습니다.
속으로 흡족했습니다.

낮의 밭작물들이 물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는데 이 정도의 빗줄기라면 약간은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밭을 보았습니다.
어제 막 짜증을 내던 밭작물들은 거짓말 같이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없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여러 말씀 중에 참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8:6절입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주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이 말라서 타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습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도전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알려고 하면 그것은 아주 무미건조한 말씀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 로고스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영적인 사모함의 눈물을 흘릴 때 로고스의 말씀에 눈물의 습기가 떨어져 그 말씀은 나에게 레마가 될 것입니다.
말씀이 레마가 되어야 그 말씀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2. 말씀을 들으려고 해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주목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울은 믿음의 출원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저는 바울의 이 정의는 정말로 적절한 정의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들이 믿음을 가지려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니 조금 더 세밀하게 말씀을 드린다면 말씀을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려고 한다는 것은 들으려는 사람의 의지를 필요로 합니다.

‘들음’이라는 헬라어 원어 ‘ajkohv’라는 단어는 원래가 주격 단수 명사이지만 영어성경 RSV 의 번역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데 들음이라는 명사를 수동태 동사로 번역을 했다는 점입니다.

‘So faith comes from what is heard and what is heard comes by the preaching of Christ.

무슨 뜻입니까?
믿음은 ‘말씀이 들려지는 것’이라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말씀이 들려지려면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의 의지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강조하고 싶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몸부림치는 자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 역으로 의지적으로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믿음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과 듣지 않으려는 사람과의 차이를 설명하려면 항상 떠오르는 기사가 마르다와 마리아의 기사입니다. 
오늘 오후 예배도 공교롭게 말씀에 대한 본문이기에 또 한 번 마리아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지만 오후와는 다른 각도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고 나사로의 가정에 은혜를 주신 후에 나사로의 집에 심방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오라버니를 살려주신 주님께서 심방을 온다고 하는 것을 알고 나사로의 두 누이동생들은 주님을 맞을 준비에 부산하였습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그녀들의 집에 도착을 하셨습니다.

누가는 이 기사의 시작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눅 10:38절입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언니인 마르다가 주님을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당연히 맏이로서 주님을 영접할 부담감이 동생인 마리아에 비해 더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 아마도 부엌에서 최선을 다해 음식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방에서 움직일 줄을 모르고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누가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눅 10:39절입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혼자서 분주하던 마르다가 주님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 요청은 분노에 사로잡힌 요청임을 누가복음 10:40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압니다.
오늘 오후예배에도 이 말씀을 다시 드려야 할 정도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각도로 해석을 해 봅니다.
말씀을 듣는 마리아,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마리아.
두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포기할 수 없는 주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0장에서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사역의 결과입니다.
사역의 후편입니다.
마리아는 가장 지근거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 최선을 다했던 결과 주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한 지혜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님에게 항의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에게 명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에게 불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한 사역은 동일하지만 그 결과의 후 폭풍은 엄청난 영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연합성회를 위한 기도회가 신흥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신흥교회의 찬양 팀들이 정말로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질병으로 회복 중에 있으셔서 설교를 할 때 준비된 심령으로 만들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사역을 했습니다.
찬양 사역을 인도하는 한 형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형제의 찬양은 찬양이 아니라 차라리 절규처럼 저에게는 보였습니다.
가슴을 쓰다듬고, 두 손을 높이 들고, 또 어떤 경우에는 진동도 하고 그 형제의 찬양의 모습을 통해 이미 은혜는 충만하게 넘쳤습니다.

이제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30분 설교를 하셨습니다.
투병 중에 계시기에 설교단에 그냥 서는 것만으로도 목회자의 소임을 다하신 사역이었습니다.
설교가 시작이 되었는데 마침 그렇게 찬양을 하던 형제가 옆 줄에서 저의 대각선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본인이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의 설교 시간이었습니다.
그 날은 외부에서도 다른 교회의 교인들도 대거 참석했습니다.

보고 싶어 본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은혜로운 찬양 인도의 형제를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는데 30분 동안 담임목사의 설교 시간에 그 형제가 행한 것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며 담임목사의 설교를 의도적으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그토록 예배 전 30분 동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찬양하며 불렀던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 그 청년이 드린 찬양의 외침은 자기만족의 메아리요, 자기도취의 마약이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나라 최고의 청년 목회를 하는 한 목사님이 그의 설교에서 ‘들리는 설교’와 ‘들리지 않는 설교’를 정의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의 지론은 이것이었습니다.
들리지 않는 설교를 행하는 목회자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목사의 신학적인 지평에 따라 이해의 폭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목회자가 그래서 설교 준비에 목숨을 걸라는 메시지로 그 목사님의 일침을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로 말한다면 설교 중 들리지 않는 설교는 없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주의 종이 갖고 설 때 이미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들리지 않는 설교를 들으려고 하는 사모함이 있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들리는 설교는 목회자의 몫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자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겸손함이 있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나에게 정금보다 귀한 믿음을 주시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완전히 마치는 시간이 토요일 오후 6시 이후 즈음입니다.
약간의 시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거의 비슷합니다.
주일 설교를 비롯한 저의 설교의 대부분은 강해 설교이기에 다음 주일에 본문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저의 설교 준비는 언제부터 인가 하면 주일 설교가 끝나는 시간부터라고 엄격하게 말씀을 드리면 드릴 수 있습니다.

목요일까지 삶의 예화를 찾으려고 나름대로는 피나는 민감함으로 삽니다.
목요일 저녁 즈음에 월요일부터 생각한 삶의 예를 주어진 본문으로 연결시키려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목요일은 심방을 제외한 시간에 본문을 중심으로 한 여러 성경을 읽습니다.
영어성경은 물론이거니와 원어성경과 우리나라의 번역본의 성경들입니다.

그리고 금요일부터 주일 설교의 아웃라인을 만들어서 2,3개의 대지를 구분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토요일에 충실하게 원고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렇게 준비된 원고를 오후 6시 즈음 마치면 곧바로 탈고를 합니다.
탈고와 더불어 원고의 내용을 우리 교회의 홈페이지와 제 개인 블로그에 링크합니다.

이유는 제 설교가 남들에게 읽혀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야 더욱 설교 준비에 만전을 기할 수 있다는 의지때문입니다
프린터로 탈고할 때 두 매를 합니다.
하나는 교회 설교 원고 파일에 보관하고 하나는 집으로 가지고 들어가 원고를 외우는 작업을 합니다.
완벽한 외움은 안 될지라도 성도들의 얼굴을 보고 설교를 하는 것이 예의임을 멘토 목사님을 통하여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작업 중에 가장 중요한 작업은 탈고 된 설교 원고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손을 얹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때 단 한 번도 빠짐이 없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설교에 기름을 부어주옵소서, 이 설교를 종이 전할 때 종이 먼저 은혜의 감격에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듣는 성도들에게 들리는 설교가 되게 하옵소서”

교우 여러분!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들려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알려고 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듣지 말고 믿으려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이렇게 선언합니다.
롬 10:17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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