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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요일 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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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요일 4:7~15)


오늘은 교우부가 주최하는 동행축제주일입니다. 

오늘 2부 예배에는 교사헌신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히브리어를 배우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배우다’는 말은 ~T,d>m;l.W 이라고 하는데, 가르친다는 말은 dMel;m.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동사에는 원형이 있는데, 접두어나 접미어를 제외하고 나면 세 글자의 원형이 남게 되는데, 그것이 라마드입니다. , 이 말의 뜻은 배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변형시켜 능동강세형으로 사용하면 ‘가르친다’는 말이 됩니다. 히브리어의 능동강세형이란 의미는 어떤 행위에 있어 스스로를 힘쓰고, 바쁘게 그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우는 일에 스스로 힘쓰고, 바쁘게 열심을 내면 그것은 가르친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은 가르침이 곧 배움을 야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잘 배우는 사람은 잘 가르치는 사람이요, 잘 가르치는 사람은 잘 배우는 사람입니다. 학생의 점수가 곧 교사의 점수요, 교사는 학생에게 배움을 야기시킬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학생의 점수가 곧 교수의 점수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당 서정주씨가 지은 유명한 시가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학생 때에 서정주 시인의 여러 시를 즐겨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국화옆에서, 광화문, 귀촉도, 자화상 등이 있습니다. 

“국화 옆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정말 아름다운 시입니다. 국화는 언제 피는 꽃입니까? 가을에 피는 꽃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를 피우기 위하여 봄이 있었고, 여름이 있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를 피우기 위하여, 천둥 번개치고, 비바람도 있었습니다. 노오란 꽃잎을 피려고 간밤에는 무서리가 많이 내렸습니다. 시인에게는 기다림으로, 인내로 잠이 오지 않는 수없는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소쩍새는 한 여름 내내 울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성공도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되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교사들은 한 영혼을 담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송이 국화꽃과 같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하려면 수고에 수고를 거듭하고 눈물로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멘토’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멘토링(Mentoring)은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구성원을 1대1로 전담해 지도조언하면서 실력과 잠재력을 개발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조언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멘토, 조언을 받는 사람을 멘티라고 한다. 멘토란 “지혜와 신뢰로 인생을 이끌어주는 지도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멘토는 정신적 지주요, 어떤 스승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훌륭한 선생님을 말합니다. 

멘토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말입니다. 고대그리스의 이타이카 왕국의 왕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떠나면서 자기 친구에게 부탁하기를 자신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잘 가르치고 보살펴서 혹시 내가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아들을 좋은 왕으로 길러달라고 맡겼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이 바로 ‘멘토’였습니다. 

왕의 친구 멘토는 오딧세우스의 부탁을 받고, 왕자 테레마코스를 잘 지도하고 어떤 상담에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멘토는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왕자의 선생님으로, 때로는 친구로, 좋은 선생님으로 그리고 상담자로, 자상한 아버지와 같이 잘 지도해주었습니다. 왕이 수년 간 전쟁을 마치고 자기 나라로 돌아오는데, 모든 백성들이 아주 평안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는 아주 평안하였고, 모든 사람들이 다 넉넉하고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라의 형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왕, 젊은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데, 온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새로운 왕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왕이 왕궁에 돌아와 보니, 자기 없는 사이에 왕자는 아주 훌륭한 지도자로 자라난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멘토라는 왕의 친구가 잘 지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로 멘토라는 말은 경험과 경륜이 많은 사람으로 잠재력을 볼 줄 알고, 그가 나아가려는 분야에서 꿈과 비전을 잘 이루도록 도움을 주며, 도전을 주고, 본을 보이는 후원자를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교사들은 훌륭한 멘토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좋은 선생님, 꿈과 비전을 심어주는 교사가 되십시오. 여러분의 제자들이 앞으로 우리 민족을 책임지고 이끌어갈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나의 멘토는 바로, 주일 학교 때의 나의 담임선생님이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소녀를 구출한 사람”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 들어 있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없는 어린 소녀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이층의 자기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어느 날 밤 소녀의 집에 불이 나서 할머니는 어린 소녀를 구하려다가 화마에 그만 숨을 거두었습니다. 불은 순식간에 번져갔고, 벌써 아래층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소녀는 이층 창문에 나타나 울부짖으며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때 군중들 사이에는 소방대의 도착이 늦어지리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다른 곳에도 큰 화재가 일어나서 소방대원들이 모두다 그곳에 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한 사람이 사다리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것을 집 벽에 기대고는 번개같이 올라가 집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그의 팔에는 소녀가 안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녀를 인도하고 밤의 어둠 속으로 흔연히 사라졌습니다. 그 소녀에게는 살아 있는 친척이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몇 주일 뒤 마을의 구민회관에서는 누가 이 소녀를 집으로 데려가 길러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듣고 소녀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한 선생님이 일어나 자기가 그 소녀를 맡아 키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교사는 자신이 소녀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한 농부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농장에서 이 소녀를 키우겠다고 했습니다. 농장에 사는 것이 어린 소녀에게 있어 건강하게 되고 안정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을 농부는 강조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름대로 소녀가 자신들과 함께 살면 좋은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마침내 마을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나는 이 아이에게 여러분들 모두가 지금까지 말한 좋은 조건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다 돈과,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회의 진행되는 동안 소녀는 시선을 땅에 떨군 채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회의를 맡아 사회하는 의장이 말했습니다. “그럼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은 안 계십니까?” 그 때에 한 남자가 회관 뒤쪽에서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는 걸음걸이가 느렸고, 어딘가 아파보였습니다. 맨 앞으로 걸어 나온 남자는 어린 소녀 앞으로 곧장 다가가 두 팔을 내밀었습니다. 군중은 숨을 멈추었습니다. 그 남자의 두 손과 두 팔은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소녀가 외쳤습니다. “이 분이 바로 저를 구해주신 분이예요!” 소녀는 펄쩍 뛰어 올라 자신의 생명을 의지하듯 그 남자의 목에 두 팔을 안았습니다. 그 운명적인 날 밤에 그렇게 매달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소녀는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몇 분간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런 다음 고개를 들고 그 어른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의장이 모두에게 말했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글을 이것으로 그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짧은 글을 읽고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녀는 말할 것도 없이 자기를 구해준 남자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좋은 조건과 환경보다도 자기를 구해준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사랑을 받아보셨습니까? 여러 분 한 사람을 위하여 화상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사다리를 타고 불길을 헤치면서 구해주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그런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1)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시면서 이어 9절 말씀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4:9)고 하셨습니다. 

원문의 “우리에게”라는 말을 잘 살펴보면 아주 유익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evn h`mi/n” ‘엔 헤민’이란 말인데, 어떤 학자는 “우리 사이에”라는 말이다, 어떤 학자는 “우리 안에”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네 가지 해석을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안에, 우리 사이에, 우리를 위하여 독생 성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성자를 보내신 것을 우리를 죄에서 살리려 하심이요, 우리를 변치 않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를 믿어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살리신다는 말은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었고, 죽은 상태였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죄악 세상에 그냥 두시고 버리신다면 주어지는 것은 영원한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살리려고 하셨습니다. 

2)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한 화목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려면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아들 안에서 다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범죄한 영혼을 죽어야 하고, 심판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에게 내려야 하는 심판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님에게 내리시므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셨고,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안에서 모든 사람을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은 두려운 심판주이셨으나, 아들 예수님을 믿고 보니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셨습니다. 

3) 사랑의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13절입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 거하게 되었고,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5절 말씀에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고 했습니다. 

4) 서로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7절 말씀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하셨습니다. 11절 말씀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정말 얼마나 사랑하신 것입니까? 어거스틴의 말을 잘 인용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는데 천하인간에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너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할 사람이 나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정말 위대한 사랑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장애 아들을 사랑하는데, 생명 다해 사랑하지만,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 같은 아들을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사도 요한이 사랑을 강조하실 때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5)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한다면 그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미워할 사람은 하나도 없고, 무두다 사랑할 사람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까? 

요일3:18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전도폭발을 일으키신 제임스 케네디 박사는 “예수가 만약 태어나지 않았다면”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태평양의 외진 섬에서 한 미국병사가 영어를 할 줄 아는 한 원주민을 만났습니다. 그 원주민은 손에 성경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 미군병사는 성경을 든 손을 가리키며 뭘 좀 안다는 듯이 씩 웃었습니다. “우리 문명 세계 사람들은 이제 그 책을 더 이상 믿지 않소.” 그러자 그 원주민이 씩 웃으며 되받아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손에 들고, 그 말씀을 믿는 것은 당신들로선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리고 배를 두드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아미 내 뱃속에 들어가 있을 거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누리는 사람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정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식인종이 변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처럼, 우리의 완전히 뒤집어지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식인종이 변한 것만 변한 것은 아닙니다. 이기적인 사람, 다른 사람을 죽어라고 미워하면서 살던 사람이 진정한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았고,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서로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이냐,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냐 하는 것을 판정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의 동산을 이루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용서하며, 서로 아껴주고 봉사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이 일에 우리는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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